2015년 2월 22일 주보 칼럼 - 사순절, 경건의 훈련

첫날 아침 구보를 마치자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벌써 오래 전 일이지만 그날의 느낌은 하나도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조교들의 호각소리, 무겁고 불편한 군화 거기다가 군가는 왜 시키는지… 신병훈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서너 주가 지났을 때 문득 예상하지 못한 기분이 들더군요. ‘어 상쾌한데?’... 6주(40일간)의 신병 훈련이 끝났을 때, 어느덧 완전히 달라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게으른 사람이 아침에 뛰는 일을 즐기게 될 줄이야…”
 
  사순절 첫 번째 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주일을 제외한 부활절전 40일간의 기간으로, 신자들은 이 사순절을 지킴으로 자신의 영성을 “훈련”합니다. 한국 교회는 주로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해 기도에 집중하고, 금식이나 선행 그리고 요즘 많아진 ‘미디어 사용 줄이기’ 도 영적 훈련의 방법들입니다. 신병훈련소의 구보가 그러하듯, 40일 동안 무언가를 정하여 지켜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실하게 40일을 지켜낸 사람들은 거룩한 생활을 깊이 즐길 수 있게 되었고, 그러기에 부활의 기쁨도 더 크게 누릴 수 있습니다.
 
40일 동안 무작정 금식을 한다거나 성경을 독파한다고 우리가 저절로 성인이 되거나 구원을 위한 포인트를 쌓는 것은 아닙니다. 이 훈련의 목표는 ‘정한 바를 이루는 끈기’ 혹은 ‘자기를 이기는 극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어지는 교제” 입니다. 사순절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게 알고, 생명과 평화의 사람이 되는 일이 중요합니다.
연합 감리교회의 Daniel Benedict 목사님은 사순절 기간 동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영적 성장의 방법들을 소개하는데요, 그 중 몇 가지는 * 매일 홀로 기도하는 시간 갖기 * 복음서 읽기 * 영적 일기 쓰기 * 하루에 하나씩 감사한 것 찾기 * 하루 하나 선행하기 * 상처 준 사람 용서하기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 say NO 하기 * 음식 절제하기 * 욕/험담 하지 않기
 
이 중 마음 가는 몇 가지를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붙여보시는 것 어떨까요? 지키기 조금 어려울지모르지만, 3주쯤 지나서 ‘어 좋은데’ 하실 것입니다.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되실지 모르지요. ‘내가 이런 거룩한 삶을 내가 즐기게 될 줄이야~” 평화를 빕니다. 

2015년 2월 15일 주보 칼럼 - 잠언을 읽다가...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제 국민(초등)학교 시절 과목들의 이름은 바른, 슬기로운 그리고 즐거운 생활이었습니다. 바르고 슬기롭고 즐거운 삶을 위한 공부라... 누가 지었는지 참 좋은 이름들입니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이름은 슬기로운 생활입니다. 슬기 (지혜) 가 있어야 바르고 즐거운 삶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자로 슬기로움을 뜻하는 “혜慧” 는 날카롭다는 뜻의 彗 와 마음 혹은 중심을 뜻하는 心이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 “지혜”란 겉으로 드러난 현상으로부터 날카롭게 중심을 파악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잠언의 말씀은 이 “감추어진 이유와 이치를 통찰하는 능력”이 “여호와를 경외함” 그리고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 으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쳐 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 9장 10절)
 
참된 신앙은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때론 무의미하거나 불합리해 보이는 일들도, 믿음의 눈으로 “날카롭게” 바라보면,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되지요. 그러니 어찌, 거룩하신 분을 알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였던 모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홍해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뒤로 쫓아오는 이집트 군대의 병거와 마병으로 인해 백성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여호와를 신뢰하였던 지혜로운 사람. 모세는 날카로운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애굽기 14장 13절)
 
홍해와 같은 암담한 현실을 마주하게 계십니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먼저 여호와를 알고 그 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을 통하여 결국 선한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그분이 당신의 생각을 날카롭게 하실 것입니다. 참 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2015년 2월 1일 주보 칼럼 -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난 주, LA에서 있었던 컨퍼런스 중에, 잠시 한국에 다녀온 동료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한국에서 크게 느낀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돈 내는 곳’에서 사람들이 무척 친절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돈과 관련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참 무뚝뚝하더라는 것입니다.

아, 한국은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메디슨으로 돌아올 항공권을 첵인했지요. 그런 선택사항이 있더라고요. ‘10불을 더 내면 비행기에 빨리 탈 수 있게 해 준다‘ 말하자면 돈을 조금 더 지불하면 늦게 공항에 도착하더라고 합법적(?)으로 새치기를 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말입니다. 마이클 샌댈의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의하면 이런 ‘새치기 권리 구매 현상’은 3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아, 세상 다 똑같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성전에 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은 금반지를 끼고, 멋진 옷을 입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들이지요. 세상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부유해 보이는 사람을 좋은 자리에 앉히고 가난한 사람은 아무데나 앉게 하였습니다. 어쩌면 항상 그래왔던대로 별 생각없이 그렇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교회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만일 너희가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짖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4절과 9절)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한 가지 방법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기, 특히 ‘돈 안 되는 사람에게 친절하기’일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과는 다르지요. 그러한 다름과 구별을 성경은 ‘거룩Holines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장 15절)
 
여러분의 거룩한 생각과 실천을 응원합니다. 

2015년 2월 8일 주보 칼럼 - 건강한 교회, 자라다

지난 몇 주일에 걸쳐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처음으로 교회에 온 사람들, 오랜만에 신앙을 찾아온 사람들, 그리고 그런 벗들의 귀환(?)을 기뻐 맞이하는 사람들을 속에서 ‘메디슨 감리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두고 기도할때마다 드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건강한 부흥과 성장’ 이란 무엇인가? 지금이야말로 이런 것을 점검하기에 좋은 때입니다.
 
교회가 ‘살아있는 예수님의 몸’ (골1:24) 이라면 성장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 수가 늘어나는 것이 성장의 전부가 아닙니다. 저는 교회의 성장을 세 가지로 생각합니다. 1. 교회 구성원들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 각자가 하나님과 더 깊이 사귀어 가며 하나님을 향해 자라갈 때, 외적 증가는 없더라도 우리는 건강한 교회일 수 있습니다. 어제보다, 지난 달보다 혹은 작년보다 하나님과 더 가까우신가요? 2. 양적인 성장도 중요합니다. 조직이 커지는 일이 전부는 아니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끊임없이 복음 안으로 초대할 수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땅끝까지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합니다. 3. 세상을 향한 선한 영향력의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70-80년대,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 큰 성장을 거두었지만 이 세 번째 일에는 충분히 깨어있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잃은 교회들에게 실망하였습니다.
 
건강한 교회를 꿈꿉니다.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 각자의 신앙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양적 성장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된 우리를 통해 메디슨의 이민-유학 사회와 이 땅 구석구석에 ‘생명’과 ‘평화’가 전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사도행전 2장 46-47절, 새번역)

1월 25일 주보 칼럼 - 쓸데 없는 걱정

“도둑이야, 도둑이야!!” 한 사람이 거리를 달려가며 소리쳤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물었지요. ‘도둑이 어디 있소?’ ‘우리 집에요’ ‘그를 보았소?’ ‘아뇨’ ‘잃어버린 물건은 있소?’ ‘없어요’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도둑이 당신 집에 들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소’ ‘침대에 누워 있는데, 도둑들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집에 들어와서 잽싸게 움직인다는 사실이 생각났어요. 그런데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와 있는 것 아니겠소? (이현주, '보는 것 마다 당신')
 
  이 우스운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유는, 우리들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라는 심리학자는 ‘느리게 사는 즐거움’ 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이며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글쎄요, 정말 걱정의 4%만 의미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우리가 하는 고민 중 대부분은 마음 먹기에 따라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것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잠언은 심령의 근심이 뼈를 마르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17장 22절) 어떤 일을 깊게 생각하고 여러 상황을 대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 때문에 걱정이 많아지고 마음이 분주해져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걱정이 많아서야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과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왠지 모를 불안과 근심이 차 오를 때, 하나님 앞에 조용히 앉아 우리 마음을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요? 뭐가 그리 걱정인지 소리내어 말해 보거나 적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지혜의 성령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쓸데없는 걱정으로부터 우리 마음을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근심 없는 마음을 바라며,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요한복음 14장 27절)

2015년 1월 18일 주보 칼럼 - 영적으로 스마트해지는 법

moment라는 어플리케이션이 있습니다. 하루 동안 몇 번 그리고 얼마동안 스마트폰을 사용했는지를 체크해 주는 앱이지요. 이틀 동안 사용해보니 저는 하루에 스물 다섯번, 100분 정도를 사용하더라고요. Analysis Mason의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스마트폰 사용시간은 하루 평균 198분입니다. 한국인들은 평균 219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kt 경제경영연구소)

  이 손바닥만한 기계는 참 고마운 친구입니다. 날씨도 알려주고, 멀리있는 친구의 소식도 실시간으로 전해줍니다. 성경도 들어 있고, 좋은 찬양곡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덕분에 예상치 못한 기다림이나 따분한 강의도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루함이 사라지면서 다른 유익들도 없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연구들이 지루함이 창의성creativity의 바탕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꼭 창의성 뿐만 아니지요. 영성 Spirituality 은 일정 정도의 ‘한가로운 마음’, 혹은 ‘느린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때론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폰을 내려 놓고 마음을 한가로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푸른 하늘이, 앙상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나무들이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의 눈망울이 우리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잠시의 여유 혹은 지루함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 걸어 오십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잠잠히,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까운 지인 중에 마리아와 마르다라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에수님이 집에 오시자 마르다는 여러가지 일로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막10:40) 그런가 하면 동생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 발 앞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지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다’
 
이번 한 주, 스마트폰을 좀 멀리 하고 지루함을 즐겨보는 것은 어떠세요? facebook 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face를 대하고, 아침을 기사검색 대신 기도로 시작하시는 건 어떨까요? 침대에 누워 십 년 후의 모습을 생각해 보거나 오랜만에 종이와 펜으로 일기를 써 보는 일, 버스를 기다리면서 내가 지금 여기 왜 있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일은요?

모든 문명을 거부하고 아미쉬가 되자는 말이 아닙니다. 가능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조금 더 한가하게 만들는 일은 영혼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랍니다. 이번 주 제 목표는 하루 열번, 한시간 이내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1월 11일 주보 칼럼 - 마음 아픈 뉴스를 대하여

가고 싶은 나라의 순위에 항상 프랑스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에펠탑이나 루브르 때문이 아닙니다. 파리에서 떼제베를 타고 한 시간 반쯤 가면 테제라는 마을에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예배 장면을 본 후로 프랑스는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 라는 노래로 알려진 테제 공동체입니다. 그곳엔 세계 30여 나라에서 모인 기독교인들이 함께 노래하며 또 봉사하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테제를 소개하는 란에는 ‘우리는 거기서 인류의 평화가 가능하다는 큰 희망을 봅니다’ 라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그 나라로부터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지난 7일, 프랑스의 언론사 샤를리 엡도에 무장 테러범 세 명이 침입해 사람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습니다. 사망자는 12명, 테러의 이유는 이들이 이슬람교를 풍자하는 만화를 그렸기 때문이랍니다.
 
샤를리 엡도의 만평을 찾아 보았습니다. 언론에서 이야기하듯이 이슬람에 대한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그림도 있었고, 개중에는 제게도 많이 불편한 그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이러한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신성神聖은 언론이 그린 만화가 아니라,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테러범들에 의해서 모독을 당하셨습니다.
 
이 일을 접하면서,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힘으로 제압하려는 유혹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인터넷을 하다보면 우리 신앙에 대한 무지막지한 조롱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총칼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그런 말 못하게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대응하는 가장 바른 방법은, 그런 말 못하도록 바르고 멋지게 살아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풍자는 ‘제대로 된 삶’으로만 그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의 테러범들이 이슬람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이 일이 종교/민족간의 적대상황으로 발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테러와 살인은 마땅히 지탄받아야하며 이 땅에서 하루 속히 사라져야 합니다. 종교와 신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폭력과 전쟁은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떼제가 노래하는 ‘가능한 인류의 평화’를 위해 함께 아픈 마음으로 기도하며,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해야 할 때 입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5절)

영화 설교 : 인터스텔라를 가르는 눈물 (요한복음 11장 1절, 32절 - 44절) – 2015년 1월 25일

함께 예배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오늘은 영화와 함께 하나님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가끔 영화 설교를 준비할 생각인데, 설교에서 영화를 이용하는 이유는 단지 하나, 말씀을 보다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명한 슬램덩크의 대사처럼 영화는 단지 거들뿐입니다. 우리 교회의 영화 설교는 최근에 화제를 일으킨 인터스텔라입니다. 우주, 종말 그리고 우리의 생존은 과학과 영화의 주된 재료이면서 동시에 우리 신앙의 중요한 요소이지요. 접근 방법은 많이 다르지만 말입니다. 속회 모임 중에 인터스텔라 라는 영화를 소개 받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영화는 공상 과학 영화라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과 사랑을 다룬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으로부터 가져온 영감을 아주 많이 담고 있었습니다. 영화 장면을 보기 전에 성경 말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 그러니까 천년 정도 전에, 지구 반대편에 세명의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자 둘과 남자. 이들의 부모에 대해서는 성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부모가 있었는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없습니다. 남매 중에 막내 동생은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깨뜨린 사람입니다. 교회 전통은 그녀가 창녀였다고 말해 왔지만,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자가 창녀였는지 아닌지도 우리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속되는 이들의 삶은 암울한 그림자로 덮여 있습니다. 바로, 그들 중에 오빠가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죽는다지만, 자신과 관련된 죽음은 언제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고,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것이 인간 모두의 실존입니다. 장면 기억 나세요? (장면 1, Mann 박사가 쿠퍼를 죽이려 하는 장면) 이게 무슨 장면이냐하면, 멸망해가는 지구를 구하려고 다른 행성을 찾아 사람들을 보내는데, 거기서 Mann박사는 지구로 신호를 보내고 기다린 거예요. 사실은 가능성이 없는 행성이지만 살고 싶어서, 신호를 보내고, 다시 자기만 살려고 사람들을 배신을 하는 것이지요. 이게 인간입니다. 죽음 앞에 있는 인간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언제나 그것은 두려운 것이고 이기기 힘든 것입니다. 사실, 영화, 아니 대부분의 헐리우드 영화가 죽음 앞에 인류 공동체 속에서 자기만 살아 것인가? 아니면 희생적인 모험을 통해 모두 살아날 것인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박사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장면 볼까요? 신호를 보내고 동면에 들었던 박사를 찾아가는 장면이예요. (장면 2) 오랜 기다림 끝에 처음 만나지요. 이들이 진행했던 인류 구원 프로젝트의 이름은 Lazarus Project 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는 죽습니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단절 또는 격리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으로 생의 모든 관계가 끝나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죽음을 넘어서는 믿음입니다. 나사로는 죽지만,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그런데 그가 살아났다고 인간이 갖는 죽음의 문제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결국 죽습니다. 그러니 그가 살아난 기적에 우리 생각이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이야기가 말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가 그의 친구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이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셨다는 것이고, 불쌍히 여기심과 함께 아파하심을 통해, 무덤의 문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은 동굴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에는 돌을 막아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도 그러했지요. 돌문은 건널 없는 강을 상징합니다. 삶과 죽음. 개의 완전히 다른 차원. 말하자면 돌문 안쪽 세계와 바깥 세계의 거리는 인터스텔라 - 별과 별의 거리 - 보다 멀지요. 돌문 바깥에 사는 사람들은 돌문 안의 공간과 시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39절입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우리 시간의 개념으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차원의 존재이십니다. 그는 죽음 넘어에 있는, 음부의 권세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무덤을 가로질러 소리로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사로야

저는 오늘 본문에서 35절이 좋습니다. 예수님이 우십니다. 예수님이 신약 성서에는 두번 우세요. 예루살렘을 보면서 평화를 알지하시며, 안타까움에 우시는데, 여기서는 슬픔 때문에 우십니다. 어떤 주석은 부활에 대해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답답해서 우신다고 하시는데,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은 답답했거든, 그런데 여기서만 우세요. 우리의 상실에, 우리의 아픔에 그리고 죽음 앞에 우리의 실존에 온전히 동참하시는 그분의 눈물을 봅니다. 그리고 눈물이 그를 소리치게 합니다. “ 돌을 치워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리라, 인터스텔라와도 같은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 가운데 틈을 내어라 왜요? 사랑하시니까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힘을 보여주사, 결국에는 모두가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으리라는 희망을 보여주시려고 그리 하십니다. 일은 예수님의 부활에 예고편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기도할 이렇게 기도하세요. 말을 항상 들으시지만, 이제는 힘과 사랑을 보여주소서그리고 말씀하시지요. 나사로야 나오너라예수님의 나사렛 프로젝트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사랑이 인터스텔라의 거리, 차원의 다름을 극복합니다. 사랑이 우리를 만나게 합니다. 영화 속에서 브랜든 박사는 이야기를 아주 직접적으로 합니다. (장면3, 쿠퍼와 브랜든의 대화, 증명할 없는 사랑에 대한)

어쩌면 우리는 세상의 신비를 너무 오랫동안 머리로만 생각하려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랑이 우리를 만나게 합니다. 나사로의 이야기우리 때문에 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인터스텔라의 차이와 거리를 극복하게 합니다. 사랑이 다리가 됩니다.

사실, 영화 속에는 많은 인터스텔라가 등장합니다. 별과 , 은하와 은하의 거리, 브랜든 박사 모녀의 거리, 쿠퍼와 머피의 거리 생각들을 우리 현실로 가져와 볼까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터스텔라를 살아갑니까영화의 딸과 아버지는 물리적으로 광년 떨어져 시간을 보내지만, 그리고 다른 시간을 살아가지만 결국 책장 하나를 두고 만나지 못한 살아갑니다. 어쩌면 영화는 딸과 아버지, 우리와 우리 부모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어요. 아니 조금 넓혀보자면 우리와 타인의 관계가 바로 인터스텔라입니다. 사실은 우린 모두 다른 시간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난 겨울이 짧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길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고통스럽고, 어떤 이에게는 행복하고타인의 거리는 언제나 억만광년입니다. 그런데 인터스텔라를 관통하는 길은 사랑, 눈물 밖에 없어요.
인간 관계 안에서 항상 인터스텔라가 있다면, 보다 훨씬 차이와 다른 차원은 바로 우리와 하나님의 다름 입니다. 우주를 이해할 있어요? 그걸 누가 만들었는지, 그게 이런 모양인지 이해할 있습니까? 과학이 무용하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때론 과학이 알려 주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있습니다. 연세대학에서 천문우주학을 가르치는 이영욱 교수는 현대우주과학과 창조섭리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지동설을 주장하던 갈릴레오의 시대처럼 현대 과학의 발견들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들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뱅의 순간은 관측이 불가능하고, 거기에는 어떤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힘이 개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광활함 가운데 우리가 존재한다는 , 그리고, 작은 존재가 우주를, 세상을 꿈꾼다는 것이 바로 기적 아니냐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의 별과 드넓은 바다를 보니까 이것들을 지으신 이의 위대함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뭐길래 그런 존재가 나를 사랑하십니까...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차원과 우리의 차원. 엄청난 차이가 우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차이가 크면 클수록, 인터스텔라가 멀면 멀수록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은 위대해 집니다. 죽음의 공포가 크면 클수록, 마리아와 마르다의 눈물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한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죽음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극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과감한 고백을 있는 것입니다.


언약 이라는 말이 구약 성서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가 끝난 후에도 그의 사랑하는 모든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말로 약속.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그분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되었습니다. 언약의 히브리어가 무엇인 아세요? 베레 입니다. 단어와 영어 단어 between 어원을 함께 합니다. 사이가, 차이가, 거리가 언약을 가능합니다. 우리를 사랑하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인터스텔라가 있습니다. 사랑함으로 소통할 있고요, 그렇게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나사로 프로젝트를 통해 사랑을, 인터스텔라를 가로지를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사이를 책으로 매꾼 것은 의도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바로 아름다운 , 성경을 사이에 두고 있지요. 사랑의 편지 덕에 우리는 무한한, 다른 차원의 하나님과 소통할 있고, 전혀 다른 차원의 당신과 삶을 나누어 가질 있고, 우주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있습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영생을 허락하시는 언약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