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 칼럼 - 조선의 크리스마스 (2014년 12월 21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어떤 모양으로 성탄절을 기념했을까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성탄절 예배는 1884년 알렌 선교사가 마련한, 이웃간의 조촐한 식사 모임이었습니다. 그 후로 교회도 생겨나고 기독교인들도 늘어나게 되는데, 1899년 <대한 그리스도인 회보> 는 부평교회의 성탄절 풍경을 이렇게 보도합니다.
 
구주님 탄일에 등불 이백 오십개를 전후 좌우에 달고 십자가와 태극기를 세우고... 기쁜 마음으로 찬미할새 근처 여러 동네 사람들이 남녀 노소 없이 구경하여 회당 문이 다 상하도록 들어오며 하는 말이 우리도 돌아오는 주일부터 다 예수를 믿겠다 하고... (이덕주,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 p.130)

그 날의 모습 중에, 성탄절 장식으로 교회 앞팎에 250개의 등불을 달았다는 보도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는 사실, 불교 사찰에서 행하던 연등 달기를 따라 한 것이었지요.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알리고자 우리 선조들은 ‘우리 방식’대로 정성껏 등불을 달았던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등불은 성탄절에 구경꾼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은 결국 예수를 믿겠다는 고백을 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조선의 겨울밤을 밝혔을 수많은 등불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하고 평화로워집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수많은 크리스마스 불빛들이 화려하게 세상을 비추는 2014년보다 더 진지하고 간절하게 성탄을 맞이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이 성자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에 대해 알지 못하던 때에, 주님은 작은 연등들 속에서 홀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모두의 휴일이 된 이곳 미국과 한국에서도 그 참 의미와 감격의 소식이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생일에 예수님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지길, 그 분 생신에 그 분이 소외되지 않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가 (누가복음 2장 14절)

Advent Sermon Series, "The Blessing of Waiting" 3/3 의도된 초대 (누가복음 2장 8절 - 20절) - 2014년 12월 21일

  함께 예배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오늘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의 마지막 주입니다. 어떤 성탄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성탄절에 받을 선물들, 만나게 사람들, 새롭게 만들게 추억들많은 것들이 우리 앞에 있지요. 하지만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처럼 성탄은 Big Shopping day 또는 Family Gathering day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처한 자리가, 구원을 필요로하는 상황임을 알게 , 우리는 성탄의 의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같이 되신 하나님의 오심을 마음으로 기뻐할 있는 것입니다. 희망을 찾아 수백마일을 여행해 동방박사와 같은 마음. 간절함 속에 무릎을 꿇고 왕을 맞이하는 기쁨이 가능합니다.

 오늘은 영광스러운 자리에 초대된 첫번째 사람들. 바로 양을 치는 목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탄의 기쁨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말은 바로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라는 천사들의 찬양일 것입니다. 땅에서 말을 처음 들은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어 율법학자도, 이름을 알만한 예수의 제자도 아닌, 들에서 밤새 양을 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굿간에 처음으로 초대됩니다.

  아이를 나면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먼저 초대됩니다. 부모님들이나 가족들 또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풍선과 선물을 들고 분만실로 찾아오기 마련이지요. 와도 되는 사람 혹은 와야 하는 사람. 가장 가까운 친구 혹은 가족이 손님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가정에 가장 가까운 친구, 땅에서의 가족은 바로 목자들입니다.

  목자들은 우리가 성화에서 보는, 깨끗하고 하얀 옷을 입고 귀여운 어린 한마리를 안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들에서 사는 사람들이었고 초장과 물을 차지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약학자들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거룩의 정치학이 지배하는 사회였다고 말합니다. 로마에게 이스라엘이 지배 당하는 것이 자신들의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구약성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인과응보적인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죄를 자신의 것이라고 하면 좋은데, 인간이란 본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는 나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어려움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창녀, 세리, 장애인과 같은 사람들의 탓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자들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누명을 쓰며 사회를 유지하는 희생양이 됩니다.

  부류가 바로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들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일에도 누군가는 양을 돌보아야 했기에 안식일은 율법의 방식대로 지킬 없었습니다. 음식을 먹으며 손을 씻을 수도 없었고, 유목을 하다 보면 며칠이고 밖에 나가 있어야 했기에 성전을 때에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은 자기 땅이 없이 곳을 돌아다니며 양들을 먹여야 했기에, 초원과 물을 확보해야 하는 그들의 삶은 전쟁터였습니다. 중에, 갑자기 다가온 천사는 그들에게 그리 반가운 대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처음으로 초대됩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나타납니다. 의도적으로 그들을 초대하였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위대함이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처럼 변변한 선물 하나도 드릴 없었던 그들. 하지만 성경은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첫번째 성탄이란 본래 이런 사람들의 잔치였습니다. 첫번째 성탄의 이야기는 나사렛이라는 동네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이야 예수님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냥 작은 시골 동네입니다. 탈무드에는 이스라엘의 63 도시 이름이 나오는데, 나사렛 없습니다.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도 자신의 글에서 45개의 이스라엘 도시를 언급하는데, 나사렛은 없습니다. 위대한 성탄의 이야기는 거기, 나사렛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성경은 그녀에 대해 요셉과약혼한 여자라고만 설명합니다.( 1 27) 어느 가문 사람인지, 행실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그저 짐작할 뿐입니다. 누가복음 1장의 엘레사벳에 대한 소개를 보면 대비가 뚜렷합니다.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이고, 율법을 지키는 없는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성탄의 중심 인물은 엘리사벳이 아니라 마리아 입니다. 여관의 스위트룸이 아닌 거라지, 왕이나 총리의 방문이 아닌 이름을 없는 동쪽 나라 사람들의 예고 없는 방문. 그리고 이집트로의 도피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이렇게 이름 없는 도시에서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시작됩니다. 오늘 설교의 결론부터 말씀드릴까요? 만약 당신이 이름 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지신다면, 당신의 삶이 초라하고 너무 보잘 없게 생각된다면,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이 일하시기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적어도 크리스마스 스토리를 보면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이 힘도 있고, 도시 출신의 능력자라면 두려워하십시오. 어쩌면, 깨어 있지 않으면, 성탄의 이야기로부터 소외될 있습니다. 낮은 사람들의 틈에 몸과 마음을 두셔야 합니다.  
   누가 성탄의 기쁨에 초대됩니까? 성탄의 이야기는 궁전이 아니라 마굿간, 요람이 아니라 밥통, 대한항공1등석 객실이 아니라 오래 , 아니 추운 날의 버스 정류장에서 시작됩니다. 거기엔 작은 사람들만 초대 됩니다. 하나님의 작은 사람들에 대한 우선하는 관심 마리아의 노래를 들어보면 분명해 집니다. 누가복음  1 45, 힘센 분이 나에게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46,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51 그는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52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53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54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천사들의 소식을 듣고 싶다면, 영광스러운 자리에 초대받고 싶다면, 목자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아름다운 천사들의 노래를 들으려면 들에, 밤에, 냄새나는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이런 설교를 하기가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또한 그들과 온전히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따뜻한 안에서 몸을 씻고 깨끗한 옷을 입고 잠을 잡니다. 아직 그들 속으로 온전히 뛰어 들기에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조금씩 거리의 사람들, 밤에 일하는 사람들과 삶을 나누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의 좋은 친구가 되면, 예수님의 좋은 친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내내 성탄 카드를 썻습니다. 카드를 쓰다보니 교회 목사님들, 우리 교회를 도와 주시는 분들 에게 먼저 제가 카드를 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분들은 말고도 다른 카드를 많이 받으실텐데 생각하면서, 이렇게 했습니다. 분에게 한통, 작은 분에게 한통. 그러니까 보이고 싶은 분에게 카드를 한통 후에는 나에게 아무 유익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한통의 카드를 보냈습니다. 아주 작은 일이었지만 목자들과 친구가 되는 한가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소식이 가장 먼저 어디에 전해 지겠나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관심이 달라질 것입니다. 아주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자녀의 선물을 사면서 똑같은 선물을 도네이션 할 수도 있고, 컴퓨터나 핸드폰을 열면 몇 분 안에 그런 일을 해 주는 사람들에게 돈을 보낼 수 있습니다. 지금 실천할 수 있는 수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소외되고 차별 받는 이들과 함께 삶을 나눌 때, 우리는 그 초대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지 전에 가지만 생각해 볼까요? 목자였을까요? 세리도 있고, 병자도 있고 거룩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목자였을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목자가 하는 일은 예수님으로 땅에 오신 하나님의 일하심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여러차례 자신을 목자다 하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선왕 다윗도 목자였고, 출애굽을 이끌었던 모세도 40 동안 양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을 통해 양떼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닮아갔던 것이지요.  
우리 모두가 아는 시편 23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나를 기르시는 목자다. 그래서 내가 부족합이 없다. 사망의 골짜기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의 지팡이가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양치기의 힘은, ‘함께 있는 입니다. 하나님이 낙농업자나 목장주가 아니고 우리의 양치기이신 이유는 그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바로 옆에 그의 지팡이가 있기 때문에 무섭지 않고, 목이 마를 때도 걱정이 없는 것은, 그가 목마름을 아시고 함께 물가로 내려가 주시기 때문입니다. 양치기는 언제나 양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 때문에 고약한 냄새가 베고, 안식일의 율법도 어겨야하고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들어야 했지만 그는 결코 우리를 떠날 없습니다. 양치기 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경륜과 양치기의 삶이 닮있습니다. 그러니 주께서 그들을 좋은 친구로 제일 먼저 초대하지 않으셨을까요?  
   
결국 양치기는 가장 아름다운 생파에 초대된 최고의 손님이 된다.

추운 밤을 들에서 보내고 있는 양치기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며 기쁨의 잔치에 가장 먼저 초대됩시다. 그곳에서 우리의 참된 목자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을 반겨 주실 것입니다. Merry Christmas!!


주보 칼럼 - Imagine No Malaria (21014년 12월 14일)

2009년 캘리포니아의 롱비치에서 열린 TED 강연 중에 빌 게이츠는 유리병 하나를 열며 청중들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말라리아는 모기를 통해 전염되지요. 제가 몇 마리 가져왔습니다. 여길 좀 돌아다니게 할께요. 가난한 사람들만 간염되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Malaria is brought by mosquitoes and I brought some here. I will let them roam around. There is no reason that only poor people should be infected”
 
빌게이츠의 예상대로 청중들은 술렁였고, 잠시 후에 그는 웃는 얼굴로 이 모기들이 말라리아와는 상관없는 것들임을 알려 줍니다. 그의 기지 넘치는 발표는 사람들에게 큰 여운을 남겼습니다. 왜 가난한 사람들만 이런 공포 속에 살아야 하는가…
 
이미 1950년대 이후로 미국에서는 말라리아가 없어졌고 한국에서도 전방의 군부대가 아니고서는 말라리아 환자를 구경할 수 없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아직 60초마다 한명씩 이 말라리아 때문에 사람이 죽어간다고 합니다. 그 중 상당수는 어린 아이들이고요. 인간의 힘으로 충분히 예방/치료를 할 수 있는 병임에도 아직 말라리아는 그들에게 큰 위협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해 있는 연합감리교회 위스콘신 연회의 450여개 교회들은 2015년 6월까지 아프리카의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100만불을 모금하기로 결정하였고, 현재까지 65만불 이상을 모금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부터 기말 시험을 보는 학생들에게 삼각 김밥을 파는데요, 그 수익금을 Imagine No Malaria fund 에 보태려 합니다.
 
지구촌이라는 한마을에 살고 있는 “네 이웃을 있는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부탁입니다.(마22:39) 또 병들고 굶주린 자들에게 하는 일이 곧 예수님에게 하는 일이라고 그 분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 25:40)
10불이면 한 생명을 말라리아로부터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함께 하시겠어요? 꼭 가난한 사람이 그런 위험 속에 살라는 법은 없잖아요. (wisconsinumc.org 를 통해 donation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 새번역)

Advent Sermon Series, "The Blessing of Waiting" 2/3 - 희망의 여정 (마태복음 2장 1절 - 11절) 2014년 12월 14일

함께 예배하는 일이 기쁨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교회의 전통은 오늘 그리스도의 초를 둘러 싸고 있는 개의 초들 중에 네번째 초를 밝히면서, 기쁨을 이야기하지요. (첫번째 초는 희망을, 두번째는 평화를 그리고 네번째 초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도 박사들이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라고 말해 줍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여러분의 마음이 요즘 어떠십니까? 기쁘십니까? 바라는 것은 함께 드리는 예배가 우리 마음에 원래 있는 기쁨을 회복시켜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 성탄절 마구간의 풍경은 사실, 하나의 복음서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그림이 아닙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의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만 나오고요, 목자들 그리고 지난 주에 살펴 안나와 시므온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런가하면 마가는 세례요한의 선포로부터 복음서를 시작하고, 요한복음은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관점으로부터, 다양한 제자 혹은 신앙 공동체의 증언을 통해 더욱 입체적이고 온전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변에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신앙인이 있다는 것은 우리 공동체의 예수님 이해를 깊게 하는 자산이고 힘이 됩니다.그것이 하나의 하나님, 하나의 믿음,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에 관한 것인 , 우리의 다름은 자체로 축복이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조금씩 다른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증언들도 조금씩 강조점이 다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누가는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적어 놓았고요, 마태는 군인들이 부활의 소식을 감추려 했다는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도마 이야기나, 디베리아 바닷가에서 베드로가 회개하는 장면을 자세히 전해 줍니다. 그런데, 공통되는 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 10. “ 여자들이 무서움과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누가복음 24 52. “저희가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요한복음도 화개하는 베드로의 기쁨을 마지막 장에서 이야기해 줍니다. 부활을 만난 이들은 모두 기뻐하였다는 것이지요.
모든 주일은 작은 부활절입니다. 그러니 우리 오늘 예배를 통해 기쁨을 회복합시다. 두려움, 슬픔, 무기력함, 분주함, 걱정으로 가득한 마음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기쁨하길 소원합니다.

그럼, 이제 이들은 무엇 때문에 그리도 기뻐하였나, 동방에서 박사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지요. 우선, 이사람들이 누구였을까요?    어떤 이들은 그들이 왕들이었다고 합니다. 시편 72 11편에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만왕이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그를 섬기리로다하지만 마태복음만 보아서는 그들이 왕이었는지 턱이 없습니다. 아닌 같습니다. 이들을 가르키는 magoi 라는 말은 ( 말에서 magician 오는데) 고대에 별을 보며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특히 페르시아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 교의 사제들을 지칭하지요. 그래서 많은 신약학자들은 사람들이 지금의 이란 , 페르시아로부터 왔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말이 맞다면, 이들은 적어도 1,000 마일 이상을 여행한 사람들입니다. 별을 보고, 왕을 찾아서 말입니다. 여기서 뉴욕까지 950 mile 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3명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명이서 그런 여행 못합니다. 게다가 그들이 가지고 비싼 선물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여행을 위험하게 했을 것입니다.

여기 왕을 찾아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생의 삶을 드려 순종할 대상 앞에 무릎 꿇기 위해 목숨을 걸고 길고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별빛을 허락하십니다. 때론 불빛이 멀고 희미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찾고자 언제나 거기엔 우리의 길잡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별빛을 따라 희망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인생이 여행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행 길에 왕을 만나게 됩니다. 왕은 왕궁에 살고요, 왕은 화려할 전혀 없는 민가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도 그들이 집에 들어갔다라고 보도합니다. 박사들이 도착한 시점은 아기 예수님이 태어난 직후가 아닐 것입니다. 왕은 힘이 성인이고, 왕은 아직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 입니다. 그런데 왕은 박사들의 방문에 두려워 떨고 있고 다른 왕은 그저 편히 울거나 웃고 있었을 것입니다.

진리를 찾는 여행자들은 종종 그들만의 왕을 만나게 됩니다. 왕은 힘있고 화려해 보입니다. 그에게 절하면 당장 명예와 부를 얻게 합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왕은 쉽게 찾을 없습니다. 때론 밤이 되야 빛나는 별을 쫓아 애써 찾고 탐문해야 합니다. 무엇이 참된 진리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선택은 언제나 여행자들의 몫입니다.
헤롯 the Great 나름 안됐습니다. 유대의 순수 혈통이 아닌 이두메인으로 통치자의 자리에 앉아서 로마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분봉왕의 신세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지키고 키워가고자 폭력을 행사하고 경쟁자들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이 태어난 지역, 베들레헴의 영아들을 학살하는 범죄를 자행합니다. 복된 탄생이 세상 권력의 폭력성을 까발리는 장면입니다.

천마일이 넘는 여정 끝에 이들은 왕을 차례로 만납니다. 동화작가 이현주 목사님의 표현대로 한다면 살려고 남을 죽이는 왕과, 살리려고 나를 죽이는 왕이 그들 앞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앞에 절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앞에 여러분의 선물을 내어 놓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떤 분에게 여러분의 인생을 거시겠습니까?

 헤롯을 만나고, 그와 한참을 대화하고 후에, 그들이 궁전을 나왔을 , 진리의 별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말해 줍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무척이나 크게 기뻐하였다.” 오늘은 기쁨의 주일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진정한 왕에게로 인도하는 별빛이 여러분들을 기쁘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만이 우리에게 기쁨을 허락하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