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6일 주보 칼럼 - 지금 내겐 안보여도...

  소련이 해체된 후 내부적으로 많은 혼란을 겪고 있던 러시아는 90년대 중반에 선교사와 외국인 규제 법안이 만들었습니다. 이 법은 러시아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추방하기 위한 법률로서, 러시아 혁명 (1917년) 이전에 러시아에 존재했던 종교단체만 인정을 하고 그 후에 러시아에 들어온 교단은 모두 일정 기간 내에 러시아를 떠나야 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당시 연합 감리교회는 Moscow에 신학교를 세울 정도로 활발한 선교 활동을 진행 중이습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모든 선교의 성과를 내려 놓고 그 나라를 떠나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지요.
 
  그 때, 세인트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 사역하시던 한 선교사님이 오래된 신문기사 하나를 발견합니다. 기사에는 1900년대 초반 감리교도Methodist라는 사람들 5명이 한 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는 아주 짧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감리교회가 혁명 전부터 존재하던 교단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지요. 이를 근거로 결국 연합 감리교회는 당시 러시아 선교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백년 전에 신실한 소수를 통해 그 땅의 교회를 지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지난 여름, 개척교회를 준비하고 있을 때 만났던 러시아 선교사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 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모두가 아니라고 격려해 주시면서 말입니다. 개척교회 사역을 우리 교단에서는 church planting 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믿음을 가지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예배의 묘목을 심습니다. 어떤 열매가 어디에서 언제쯤 맺혀질지는 하나님만 아시겠지요.
 
  혹시 결과가 쉽게 나타나지 않아 선한 일인 줄 알면서도 주저하는 일이 있으세요?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 일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반드시 열매 맺을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8)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 그 자체가 아닙니다...다만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대로 그 씨앗에 몸을 주시고 그 하나 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십니다. (고전 15:37,38)

진리에 발 딛고 자유하다 (사도행전 4장 5절 - 12절) - 2015년 4월 26일)

함께 예배함이 큰 기쁨입니다.
교회의 시계는 부활절후 제 4주를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 두시간에 걸쳐 살펴 보았듯이 부활하신 주님은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가서 the second chance를 주십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습니다. 내 양을 치라는 명령 그리고 이곳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라는 명령과 함께 말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렇게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갔던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성령행전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교회가 세워지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할 때, 신도가 3000명 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행 2:41)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모든 소유를 공유하였고, 날마다 성찬을 하고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하여 늘었다고 전해줍니다. 3장이 되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합니다.  


주께서 생전에 하신 두가지 일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가르치시고 고치신 일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했던 일도 바로 이 두가지 입니다. 가르치고 고치는 일. 그렇다면 우리 교회 공동체에게 부여된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예수 따름이라면 가르치고 고치는 일이 교회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베드로가 성전으로 들어가는 미문(아름다운 문) 앞에서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3장 6절 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줄 은과 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을 줍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십시오! 성경은 그가 걷고 또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전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누군가를 걷게 하거나 고침받게 할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때 여전히 치유와 회복의 일들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를 통해 아프리카의 말라리아가 치유되고, 교회를 통해 사람들의 눈이 밝아지는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여전히 그런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도 절망에 빠진 사람이 뛰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이야기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따르게 되자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 그리고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직간접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하나님을 모욕한다는 죄명을 그리고 영원한 왕에게 왕이 되고자하는 정치범이라는 누명을 씌워 불과 한달 반 전에 십자가 형을 집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고 다니는 존재들은 눈에 가시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의 행각에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을 때에 몰려와서 그들을 붙잡습니다.


잡아 놓은 지 이틀 째 되는 날 유대인들의 지도자, 장로, 율법학자가 모였습니다. 6절에는 가야바도 있다고 합니다. 제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세워 놓고 묻습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병든 자들을 고치고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하고 다니는 것이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가야바 앞에서 말입니다. 가야바의 앞 뜰에서 베드로는 한번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 거기서 베드로는 말 했습니다.”내가 그를 알지 못한다. 내가 그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저 계집아이를 저주하면서 맹세하는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불과 한달 반 전에 그랬던 베드로입니다. 그렇게 말해 놓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했던 베드로 입니다. 지금 그가 말합니다.
“나에게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이 누구의 힘으로 된 것인지를 묻는가? 당신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이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 일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살리신, 나사렛 출신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리십니까? 비겁했던 사람 베드로가 이제는 목숨을 걸고 진리를 향해 몸을 던지고 있습니다. 참 자유를 향한 베드로의 심장소리가 들리십니까?


베드로를 둘러싼 자들의 관심은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이제까지 편안함을 제공해 준 구조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관심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 분의 부탁 - 내 양을 치는 것 - 입니다. 성전 문앞에서 비참한 삶을 보내는 사람, 부활의 주님을 알지 못한 채 이 땅에서 허무한 것 만을 쫓아 살다가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베드로의 관심입니다. 내가 줄 수 있는 다른 것은 없지만 예수님이면 문제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합니다.


제사장들은 누가 살아났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혹여 누군가 새로운 삶을 허락 받았다고 하면,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 내용에 관심하여야 좋은 지도자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누가 고쳐졌는지, 누가 아파하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픈 자를 싸매주고, 버려진 자를 거두워 주는 것이, 그들이 그리도 중요하게 여기던 토라의 가르침이건만 그들의 눈은 그 생명의 가르침에 어둡기만 합니다. 그들에게 베드로는 당당히 교훈합니다. (12절)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다. 오직 예수의 이름 속에 생명이 있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말이  18절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라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과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어떤 것이 옳은지 판단하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두번째 기회를 누리는 베드로를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답답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못 알아 들었고, 배신 했고, 부활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감히 주님을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하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변화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닏.  8절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사도행전은 사실 성령행전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그 성령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 분의 이끄심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나약하고 넘어지는 실패자의 모습을 버리고, 진리를 향해 우리의 전 존재를 투신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형언할 수 없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의 말년에 베드로 전후서를 씁니다. 베드로전서 2장 1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모든 사람을 존중하며, 믿음의 식구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십시오. 3장 17절 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 고백과 함께 베드로는 참 자유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성령은 베드로에게, 주께서 Chief Corner Stone 인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세상의 힘과 권력이 아니라 그 모퉁이 돌에 두 발을 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흔들림 없이 부활의 주님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모퉁이의 머릿돌이시라는 4장 11절은 시편 118편의 인용입니다. 구약 성서를 인용하여 말하는 것은 거기 모여 있는 지식의 독점자들 – 제사장들이나 율법학자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너무도 적절하게 시편을 인용하자 그들은 무식한 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는지 궁금해 합니다 시편 118편은 사울의 갖은 위협에도 결국 왕위에 오른 다윗이 하는 고백입니다. 사울을 아시지요?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셨지요. 하지만 그는 하나님 품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진리를 져버리고 자신이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다윗이 나타나자 질투가 쳐 올라 그를 죽이려 합니다. 수천의 군대와 함께 자신의 사위이며 충신인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실패합니다. 결국 다윗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집 짖는 자는 사울을 말하고 버렸지만 다시 중요하게 쓰여진 돌은 자신을 말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집을 지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 구절 바로 다음 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베드로 앞에 앉아 있는 수많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집 짖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님이라는 돌을 버렸지요. 베드로는 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버린 그 돌이 내 cornerstone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반석 위에 나를 세우십니다…


베드로에게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키신 성령님이 이 시간 우리를 이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집 짖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다른 무엇 아닌 예수라는 corner stone 위에 우리의 두 발을 딛기 원합니다. 결국 없어지고 흔들릴 세상의 기반이 아니라 영원하신 이름 예수를 모퉁이돌 삼아 살아가기 원합니다. 맡겨주신 양들을 사랑하며 당당하게, 비겁하지 않게, 그리고 후회없이 살아갑시다. 성령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생명이 살아나는 성령의 열매가 생겨날 것입니다.

엠마오 (누가복음 24장 30-35절) - 2015년 4월 19일 소풍 예배

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예배당이 아니라 주님 주신 자연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종교 개혁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God writes the Gospel not in the Bible alone, but also on trees, and in the flowers and clouds and stars. 깊이 동의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아름다운 봄날이면 바람으로, 꽃으로 그리고 하늘색으로 우리에게 말 걸어 오시는 창조주를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예배를 시작하면서 읽은 시편 8, 시인의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호수와 하늘에 둘러 쌓여 읽은 말씀은 누가복음 2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 입니다. 누가는 마가복음에서 단 두절에 걸쳐 이야기되고 있는 엠마오 길의 이야기를 거의 24장 후반부의 전체를 들여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한 누가에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계셨을 때의 일들을 전하여 주는 누가복음과, 약속하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시작되는 사도들의 이야기 - 사도행전을 연결하는 데에, 오늘의 이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이 됩니다.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절 이후의 날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십니다. 말씀을 살펴 보지요.

13. 그날,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마리아와 같은 몇몇 여자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에 전해진 그날에, 여전히 부활의 소식을 믿지 못하는 사도들과 제자들의 틈 바구니 속에서, 그 비열한 도시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가 살았던 곳, 엠마오로 향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따뜻한 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엠마오가 실제적으로 어디인지에 대해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 따르던 스승을 잃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슬픔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삼십리 길. 그러니까 약 11km 정도 거리면 보통 걸음으로 세시간 남짓 걸릴텐데, 엠마오에 도착하였을 때 날이 어두워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아마도 지금처럼 따사로운 오후의 봄 햇살을 맞으며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14절에 기록한 대로 이 모든 일을 이야기하며 걷는 길에 맞는 봄 햇살은 삼년 전 예수라는 선생을 따라 나설 때 만났던 따스한, 그리고 희망 찬 봄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를 따르게 되었건, 혹은 그의 생명과 같은 말씀을 듣고 온 생을 결심하게 되었건 그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이라는 신비한 인물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했고, 용서와 사랑의 힘을 경험했으며 치유와 회복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 만사가 변하는 놀라운 사건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틀 전에 그 분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그 수치스러운 십자가가 위에서 맨몸뚱이로 말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들 인생의 희망과 의미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얼굴빛이 침울하였다고 전해줍니다.

상실로 인한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부활의 기쁨과 회복의 복음이 시작됩니다. 그 잃어버림이 누군가에게는 절망의 이유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진정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누구도 채울 수 없는 갈급함. 누구를 만나도 갈할 수 없는 갈증이 하나님으로부터만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림이 축복이다 라는 말이 가능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 잃어버린 자들의 여정에, 예수님께서 이미 동행자로 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소리 없이 발 맞추어 걸으시며 그분은 글로바와 그의 길벗에게 묻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소?’ 아파하는 영혼들과 위로자 예수님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무슨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신 예수님은 그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십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이 정말 좋습니다. 왜 예수님이 모르고 계셨겠습니까? 그들이 하는 말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물으시고 귀 기울이십니다. 제자들의 이야기가 25절까지 계속되는데, 예수님은 그 사이에 한번도 그들의 말을 막으시거나 자르지 않으십니다. 말을 들어 준다는 것은 그를 인정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계신 것처럼, 가장 좋은 위로는 들어줌입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무슨 일 있었니? 그리고, 우리에게 서로의 좋은 청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하신다고 하셨는데, 누군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것은 가장 잘 사랑하는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이야기 또는 한풀이가 끝나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입을 여십니다. 그런데, 그 첫마디가 참 놀랍습니다. 25절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이것은 공격하는 말입니다. 아직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미련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내가 그렇게 얘기 했건만. 참된 사랑은 죽는 자리까지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그 죽음은 단지 슬픈 일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완성이라고 그렇게 알려주고 당부했지만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나의 영광은 세상의 죄를 대신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온다고 선지자들이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상실감으로 진리를 놓친 제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 말 가운데 녹아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함께 걸으며 대화하다가 엠마오에 도착합니다. 수많은 보물과 같은 이야기 중에 다시 한번 우리의 시선이 머무르는 단어는 바로 29절의 강권(개역개정) 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시지 못하게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도 그렇게 헤어지고 싶어하시지는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28절입니다. 예수는 더 가려하는 것 같이 하시니...  아마도 주님은 이들이 나를 좀 잡아 주기를 바라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단 한번의 사양함도 없이 그렇게 하자고 하시며 그들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아마도. 상상해 보건데, 그들이 예수님을 그 순간 자기집으로 초대하지 않았다면 그날 밤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오늘 아주 멋진 길동무를 만났다네. 그 사람은 요즘 세상 소식에는 조금 어두웠지만 조상들의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정말 좋은 인품을 가지고 있었지. 그와 함께 걷는 길이 우리에게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그렇게 우리는 엠마오까지 왔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네. 함께 걷는 길이 즐거웠습니다. 잘 가시오. 좋은 여행 하시고, 기회가 되면 또 만납시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을 초대하지 않았다면. 우리 집에 들어오소서. 나와 함께 식사라도 하시고, 더 말씀해 주소서. 하고 강하게 초대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는 것도, 자기들 삶의 희망이 여전히 아니 더욱 크게 살아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유하소서. 예수님은 우리의 초대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세상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그 분 뜻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능력 있으신 분께서 여러분들 마음 문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초대를 기다리시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3 20절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아멘.

신자인 우리들은 하나님을 만났던 경험을 나름의 방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합니다. 마치 슬픈 빛을 띠고 서로에게 지난 일을 말하고 있는 엠마오 길의 두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그 때에 어디선가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함께 발 맞춰 걸으시면서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직접 해주시는 말씀. 이것을 교회에서는 계시라고 부릅니다. 진리의 드러남이지요.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그냥 떠나지 마시고 우리와 함께 유하소서. 바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진리와 사랑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고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 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그의 사랑하는 딸과 아들인 인간들의 만남, 소통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한 예배는 서로 빵을 나누는 성스러운 만찬에까지 이어집니다.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나누는 자리. 그곳에서 신자들은 모든 삶의 에너지를 얻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아름다운 성찬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30절과 31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곳, 여전히 그 분이 우리의 산 소망임을, 어두운 두 눈 밝혀 알게 되는 곳, 그런 감격의 장소가 엠마오라면, 우리의 엠마오는 바로 이곳, 주님을 예배하는 이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 - 즉 자기를 드러내심과 그에 대한 인간들의 알아차림 곧 반응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엠마오의 식사는 곧 예배이고, 우리의 예배는 곧 엠마오의 하나님 체험입니다.

성찬 때에 빵을 떼어 주시듯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예배를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나누어 주십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말씀으로 함께 계시고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들으며 하나님의 현존.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내 앞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영적 시야를 확보한 제자들은 세상에 대해서도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됩니다. 비천해 보이는 자신들의 상황이 희망차게 느껴집니다. 낮은 자가 높아지고 버림받은 돌이 모퉁이 돌이 되는 대 반전과 전환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 십자가 앞에 나왔지만 예배를 마치고 십자가를 등지고 나갈 때에는 샘솟는 듯한 삶의 에너지를 소유하는 것이 바로 성례전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연합할 때에 당연히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한 구절의 말씀만 더 생각해 보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33절 전반부입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엠마오 길에서 시작된 예배는 황홀한 성만찬의 자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행복하게 살았다. 라는 글로 성경은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보내집니다. 예루살렘에 아직 위험한 도시입니다. 예수 처형 후 제자들은 자기네 운명이 어찌 될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이제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보다 힘찬 사랑이 그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파송입니다.

  엠마오길의 예배 안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신 여러분. 아니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밝아진 눈으로 발견하신 여러분. 이제 여러분 삶의 자리로 당당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살아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에서 여러분들을 도우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다시 거슬로 돌아가는 여러분의 엠마오 길을 축복합니다

The Second Chance (요한복음 21장 15절 - 17절) - 2015년 4월 12일


함께 예배하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한국에 다녀 왔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난 열흘을 돌아 보았습니다. 가장 좋았던 일은 죄다, 누군가 함께 만나고 식사를 나눈 기억이었습니다. 물론 이곳에서는 쉽게 먹을 수 없는 한국 음식을 먹었습니다 J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래도록 다른 공간에서 달리 살아온 벗들과 음식 나누면서 하나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후 첫째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모두들 알고 있지만, 그 분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까지 40일동안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복음서 전체를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그리도 더디 깨닫던 제자들이, 사도행전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참 제자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조금 섣부른 결론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주님의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고나서야 제자들은 무엇이 진정한 가치인지를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성경에 그리 많지 않은 장면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대표적인 두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특이한 것은 두 이야기가 모두 예수님과 함께 한 식사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부활이 영적인 것, 기억과 의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건이고, 그가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밥 먹는 일은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들의 식사는 주님이 진실로 살아나셨다는 것을 말하고, 그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The Second Chance 를 통해서 누군가 진정한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은 우리 또한 그 거룩한 두번째 기회의 식탁으로 부르십니다.

베드로를 아시지요. 게바, 반석이라 불리웠고,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리라를 말씀을 주께로부터 들은 제자입니다. 교회의 타가 된 사람. 하지만 그가 바우라면 그것은 그렇게 흔들리는 바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 그 바우라는 사람은 주님을 모른다고 했고,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통곡하는 약한 인간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살펴보면, 아 이런 사람을 통해서도 주께서 교회를 세우시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성경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특별한 하나님을 통해 변해간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베드로는 빈 무덤과 주님의 부활을 경험했지만, 오늘 말씀에서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옛날처럼 갈릴리 호수가에서 고기를 잡는 일입니다. 요한은 그 바다(사실은 호수입니다.) 를 디베랴 라고 지칭합니다. 이 이름은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에서 왔습니다. 황제의 바다에서, 바울은 이제 곧 자신의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그가 다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은 누가복음 5장에서 보았던,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과 매우 유사합니다. 고기는 잡히지 않고, 그 헛수고 끝에 주님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베드로는 어부 입니다. 어부에게 고기를 잡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수고로움 중에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도 그랬고, 지금 여기 요한복음에서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그는 빈 그물질을 하고 있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전에도 여전히 빈 그물질 중입니다. 여러분은 가끔 빈 그물질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십니까? 무언가 의미가 없는 일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으시는지요. 삶과 관계가 텅 비어 있어 쓸쓸한 허무의 경험을 하지 않으시는지요? 그가 밤새 건져 올리는 빈 그물은 예수님 없는 우리 삶의 공허함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그렇게 지쳐 간 새벽에 주님은 다가 오십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 당신의 경험과 기대가 아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일하라. 그러자 고기가 가득 올라 옵니다. 11절에 의하면 153 마리 였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른 배는 결국 만선이 됩니다. 153이라는 숫자는 매우 인기있는 숫자 입니다. 모나미 볼펜에도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우리의 삶의 문제들. 빈 그물과 배가 풍성하여 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153이라는 숫자에 어떤 주술적인 힘이 있어서 우리를 부자되게 한다뭐 그런거는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153마리를 잡았던 배드로성경은 그가 연일 계속되는 만선의 기적으로 갈릴리 지역 수산업계의 거부가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아름답게 순교합니다. 거기 있는 제자들 대부분 세상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누구보다 의미있는, “허무하지 않은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153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들이 물고기를 모두 세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구요 또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153이라는 숫자를 써 놨을까요? 요한은 숫자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이유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신약학자들의 도움을 좀 받아볼까요? 히브리어 알파벳에는 각각 할당된 숫자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히브리 이름이  바요나 시몬인데 그 숫자들을 모아보면 바요나는 35, 시몬은 118. 그래서 이걸 합치면 153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So what?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1부터 17까지를 합하면 또 153이 된답니다. And then so what? 그런데 조금 더 흥미로운 해석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오리겐은 예수님 시대에 물고기의 종류는 모두 153가지로 알려져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물에 그 바다에 사는 모든 종류의 물고기들이 잡혔다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다시 한번 이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데, 그들이 불러 모을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저는 이 해석이 참 좋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시는 배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방주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지요. 7절에, 요한. 그 사랑하시는 제자로부터 베드로는 그가 주님이심을 전해 듣습니다. 웃깃을 여미고 바다에 뛰어 들어 그에게 달려 갑니다. 뭍에 올라와 보니 예수님은 아침 상을 차려 놓으셨습니다. 9절 입니다. ‘잡은 것을 조금 가져 오너라 아침 먹자베드로의 터질듯한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지난 3년간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고동락 했습니다. 그저 가깝게, 잘 지냈다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같이 자고 같이 먹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전파하며 사람 낚는 일을 실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든든한 믿음을 보시고, 바우라고 불러 주십니다. 그 위에 교회도 세워주시겠답니다.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그 관계가 깨지고, 가야바의 여종 앞에서 선생을 부인하고 저주합니다. 그럴 꺼라는 말씀까지 들었는데, 딱 그렇게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이 하신 첫 말씀은 아침 먹자 입니다. 바우라 여기며 그 듬직함을 사랑했던 제자, 하지만 넘어지고 좌절한 제자에게 주님은 찾아 오셔서, 그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 주십니다. 축 쳐진 어깨로 밤새 물질한 아들이 안쓰럽기만 한 어머니처럼 주님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두번째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하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 분의 끝까지 사랑하심이 투명하게 전해져 옵니다. 연약한 우리들에게 반드시 두번째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또 주시는 기회를 믿으면 베드로가 되는 것이고,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포기하면 가롯 유다가 되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것이니까 잘못 해도 된다고요?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은 철이 좀 덜 든 분들이지요. J 자 여기까지가 베드로와 예수님의 만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극적인 화해의 장면에서 예수님은 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15절이 되면 함께 식사를 하던 제자들은 사라집니다. 아침 바닷가에 베드로와 예수님 둘만 남습니다. 그리고 물으시지요.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겐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사랑하지만,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사랑을 자신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시잖아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하는 성경 원어의 뉘앙스가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 같은 질문을 세 번 던지시는데, 처음 두 번과 마지막에 사용하신 단어가 다릅니다. 첫 두번은 사랑하느냐를 물으실 때 아가파오 라는 동사를 사랑하십니다. 아가페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 를 알고 계시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필레오 라는 동사를 써서 대답합니다. 거칠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정 혹은 자연적인 애정을 말합니다. 존 마쉬나 JB 필립 같은 신학자들은 완전한 사랑을 물어보시는 주님께, “주님, 제가 주님을 좋아하는 줄 아십니다정도로 대답하며 즉각적인 응답을 회피한 것이라 해석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아가파오 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떤 목사님은 그래서 이 부분의 행간을 이렇게 읽습니다. . ‘주님, 제가 변치 않는 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아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사랑은 그저 인간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저는 저의 사랑이 언제 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죄송해요. 하지만, 그게 저예요그럼에도 주님은 당신의 양떼를 부탁하십니다. 그리고 세번째 질문에서 주님은 베드로의 언어였던 필레오를 사용하십니다. ‘내가 너의 연약함을 잘 알단다. 그럼, 그 부족한 사랑으로라도 나를 사랑해 주겠니?’ 베드로의 회피하는 대답은 이제 더 이상 도망할 곳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대답하지요. 17절입니다. 근심하여 말하되,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필레오) 합니다. 주님은 그 연약한 우리의 사랑만으로도 우리와 당신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며 우리에게 양떼를 맡기 십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지금도 빈 그물에 낙심하고 슬퍼하는 우리를 위해 해변 저 편에서 투박한 손으로 생선과 떡을 구워 놓고 기다리시는 어머니 같은 주님. 매일 죄 짓는 삶 속에서도, 우리의 작은 힘으로나마 주님을 사랑하기 원하시는 그 분세상의 주인, 만물의 창조자, 하지만 우리의 사랑을 그리워하시는 분.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그 분께 우리의 사랑을 고백합시다.  

2015년 4월 19일 칼럼 - 다시 4월 16일...

  지난 4월 16일은 서해 바다에서 큰 배가 깊은 바다에 잠긴 지 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른들의 탐욕과 무책임함으로 생떼 같은 아이들과 무고한 사람들 304명이 그날 목숨을 잃었습니다. 믿기지 않는 소식에 처음에는 혼란스러웠고, 그 후에 여러 소식들을 들으며 분노했습니다. 자녀를 잃은 이들의 단장하는 아픔을 보며 함께 눈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조금씩 잊혀져 삼백예순다섯 날이 지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월호 이야기를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이제 삶으로 돌아오자고 말합니다. TV를 보다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그러하듯 채널을 돌리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은, 그래서 오늘도 예배에 사용되는 소중한 주보 전면에 ‘세월호’ 라고 쓰는 것은, 여전히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이들을 기다리는 아홉 가족이 있고, 억울함과 궁금함 때문에 마음으로 자녀를 떠나 보내지 못한 부모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고자하는 우리들은 성령이 곧 ‘위로자’ 이심을 알기에 누구보다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단 며칠이라도 그들과 마음을 함께 하고자 다시 노란 리본을 달았습니다. 다운타운 주차장을 나오는데 계산을 하던 미국인이 그게 뭐냐고 묻습니다. 작년 한국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고를 추모하기 위해서 달았다고 이야기하니까 '나도 기도할께요' 라고 합니다. 그 따뜻한 공감의 말에 종일 서늘하던 마음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공감”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셔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 받으셨습니다.(히 2:15) 그리고 그 모습 우리가 닮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십시오” (롬 12:15)
다시 4월 16일을 맞이하는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탁입니다.

2015년 4월 12일 주보 칼럼 - 가만히 들어주기

  1883년 7월의 어느날, 감리교회 소속의 존 가우처 목사님는 시카고 역에서 기차에 올랐습니다. 그 기차엔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향하는 한 무리의 동양인들이 타고 있었지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미국으로 파송된 민영익, 김옥균 중심의 보빙사절단이었습니다. 흥미로운 복장에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간 가우처 목사님은 그들로부터 조선이라는 나라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여행을 마치고 자기 집 볼티모어로 돌아간 가우처 목사님은 선교 기금을 마련하고 이미 일본에서 활동 중인 메클레이 선교사로 하여금 조선을 방문하도록 요청 합니다. 이듬해인 1884년에 메클레이는 김옥균을 통해 고종황제로부터 교육과 의료를 위한 선교사의 내한을 허락받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1885년 아펜젤러, 스크랜턴 그리고 언더우드 목사님의 조선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만일 그날 가우처 목사님이 보빙사절단이라는 이방인들을 그대로 지나쳤더라면…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대신, 자기 이야기만 하기에 바빴더라면… 혹은 호기심에 접근한 후에 듣는 척은 하지만 경청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하였던 ‘다가가서 정성껏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위대한 변화의 시작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주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일은, 슬픈 빛의 제자(눅24:17)들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시고, 잠잠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신 일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길 위에서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하는데, 이 모든 일은 주님의 들어주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만져주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너무 빨리 말하기 전에, 들어주세요. 먼저 귀 기울이며 함께 걸어 주십시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주님의 일을 우리 안에 시작하실 것입니다. 평화!

2015년 4월 5일 부활절 칼럼


 선생님을 만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그는 삶의 모든 희망이요,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를 통하여 하늘의 뜻을 배울 수 있었기에 그가 곧 하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이틀이 지난 새벽녘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처참한 최후를 지켜 본 마리아의 마음은 무너져 있습니다. 혼란스러웠고 두려웠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요 20:11)
 
그곳에서 첫 번째 부활절 아침 마리아가 본 것은 ‘옮겨진 돌’, ‘빈 무덤’ 그리고 ‘마리아야 하고 이름 부르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살아나신 주님을 만난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죽음과 절망은 결코 예수님 이야기의 마지막 결론이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무덤 앞에 선 마리아의 심정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슬픔과 절망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들이 생겨나지’ 하고 묻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무덤 밖에서 울던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된 부활의 소식은 우리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The worst thing is never the last thing!! 
부활을 믿는 신앙, 그것은 결코 빼앗기지 않는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Happy Easter!!

2015년 3월 29일 주보 칼럼 - 6일 반의 고난 주간

   기독교인들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인 부활전 전의 주를 고난주간Holy Week 이라고 부르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기간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향하여 나아가셨던 마지막 일주일의 일들을 묵상하고 그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영광스런 부활의 아침을 기다립니다. 신자들은 고난 주간에 보다 경건한 삶을 추구하고 세상적인 즐거움을 절제합니다. 한국 교회 신앙의 선배들이 고난주간을 지켜왔던 대표적인 방법은 금식입니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절제함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낮추며, 분과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배고픔이 자체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전통적인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에는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아침 금식 했습니다. 배가 고플 때마다 내가 사순절을 보내고 있구나라고 리마인드 있어서 좋았고, 항상 당연시 왔던 식사를 감사한 마음으로 대할 있었습니다. 작은 돈이지만 아침식사 비용을 모아 배고픈 이들과 나누는 일도 즐겁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제가 수요일날 한국에 잠시 다녀오거든요. 아침 12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했는데, 목요일에 비행기에서 내리면 메디슨 시간:새벽3, 한국 시간:오후5 이렇습니다. 메디슨 시간으로 금식을 하자면 거기 시간으로 새벽 2시까지 아무것도 먹으면 안되고, 한국 시간으로 중간에 바꾸면 목요일 아침 금식은 지키지 못하는 셈이 됩니다. 기내식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결론지었냐고요? 아직 고민중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걸로 걱정을 하나?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맞습니다. 형식/율법을 지켜내는 일보다 마음으로 뜻을 간직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도 의미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하고 생각하는 동안, 안에고난 주간 그리스도와 함께 보내고 싶어하는 의지가 확인되고 그것이 커져가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형식을 지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거룩이라 이름 붙여진 이번 주간, 여러분은 어떻게 주님과 가까워 생각이세요? 2015 고난주간, 당신이 선택하신은혜의 수단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로마서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