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Chance (요한복음 21장 15절 - 17절) - 2015년 4월 12일


함께 예배하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한국에 다녀 왔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난 열흘을 돌아 보았습니다. 가장 좋았던 일은 죄다, 누군가 함께 만나고 식사를 나눈 기억이었습니다. 물론 이곳에서는 쉽게 먹을 수 없는 한국 음식을 먹었습니다 J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래도록 다른 공간에서 달리 살아온 벗들과 음식 나누면서 하나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후 첫째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모두들 알고 있지만, 그 분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까지 40일동안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복음서 전체를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그리도 더디 깨닫던 제자들이, 사도행전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참 제자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조금 섣부른 결론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주님의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고나서야 제자들은 무엇이 진정한 가치인지를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성경에 그리 많지 않은 장면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대표적인 두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특이한 것은 두 이야기가 모두 예수님과 함께 한 식사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부활이 영적인 것, 기억과 의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건이고, 그가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밥 먹는 일은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들의 식사는 주님이 진실로 살아나셨다는 것을 말하고, 그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The Second Chance 를 통해서 누군가 진정한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은 우리 또한 그 거룩한 두번째 기회의 식탁으로 부르십니다.

베드로를 아시지요. 게바, 반석이라 불리웠고,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리라를 말씀을 주께로부터 들은 제자입니다. 교회의 타가 된 사람. 하지만 그가 바우라면 그것은 그렇게 흔들리는 바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 그 바우라는 사람은 주님을 모른다고 했고,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통곡하는 약한 인간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살펴보면, 아 이런 사람을 통해서도 주께서 교회를 세우시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성경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특별한 하나님을 통해 변해간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베드로는 빈 무덤과 주님의 부활을 경험했지만, 오늘 말씀에서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옛날처럼 갈릴리 호수가에서 고기를 잡는 일입니다. 요한은 그 바다(사실은 호수입니다.) 를 디베랴 라고 지칭합니다. 이 이름은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에서 왔습니다. 황제의 바다에서, 바울은 이제 곧 자신의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그가 다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은 누가복음 5장에서 보았던,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과 매우 유사합니다. 고기는 잡히지 않고, 그 헛수고 끝에 주님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베드로는 어부 입니다. 어부에게 고기를 잡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수고로움 중에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도 그랬고, 지금 여기 요한복음에서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그는 빈 그물질을 하고 있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전에도 여전히 빈 그물질 중입니다. 여러분은 가끔 빈 그물질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십니까? 무언가 의미가 없는 일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으시는지요. 삶과 관계가 텅 비어 있어 쓸쓸한 허무의 경험을 하지 않으시는지요? 그가 밤새 건져 올리는 빈 그물은 예수님 없는 우리 삶의 공허함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그렇게 지쳐 간 새벽에 주님은 다가 오십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 당신의 경험과 기대가 아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일하라. 그러자 고기가 가득 올라 옵니다. 11절에 의하면 153 마리 였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른 배는 결국 만선이 됩니다. 153이라는 숫자는 매우 인기있는 숫자 입니다. 모나미 볼펜에도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우리의 삶의 문제들. 빈 그물과 배가 풍성하여 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153이라는 숫자에 어떤 주술적인 힘이 있어서 우리를 부자되게 한다뭐 그런거는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153마리를 잡았던 배드로성경은 그가 연일 계속되는 만선의 기적으로 갈릴리 지역 수산업계의 거부가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아름답게 순교합니다. 거기 있는 제자들 대부분 세상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누구보다 의미있는, “허무하지 않은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153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들이 물고기를 모두 세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구요 또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153이라는 숫자를 써 놨을까요? 요한은 숫자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이유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신약학자들의 도움을 좀 받아볼까요? 히브리어 알파벳에는 각각 할당된 숫자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히브리 이름이  바요나 시몬인데 그 숫자들을 모아보면 바요나는 35, 시몬은 118. 그래서 이걸 합치면 153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So what?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1부터 17까지를 합하면 또 153이 된답니다. And then so what? 그런데 조금 더 흥미로운 해석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오리겐은 예수님 시대에 물고기의 종류는 모두 153가지로 알려져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물에 그 바다에 사는 모든 종류의 물고기들이 잡혔다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다시 한번 이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데, 그들이 불러 모을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저는 이 해석이 참 좋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시는 배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방주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지요. 7절에, 요한. 그 사랑하시는 제자로부터 베드로는 그가 주님이심을 전해 듣습니다. 웃깃을 여미고 바다에 뛰어 들어 그에게 달려 갑니다. 뭍에 올라와 보니 예수님은 아침 상을 차려 놓으셨습니다. 9절 입니다. ‘잡은 것을 조금 가져 오너라 아침 먹자베드로의 터질듯한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지난 3년간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고동락 했습니다. 그저 가깝게, 잘 지냈다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같이 자고 같이 먹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전파하며 사람 낚는 일을 실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든든한 믿음을 보시고, 바우라고 불러 주십니다. 그 위에 교회도 세워주시겠답니다.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그 관계가 깨지고, 가야바의 여종 앞에서 선생을 부인하고 저주합니다. 그럴 꺼라는 말씀까지 들었는데, 딱 그렇게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이 하신 첫 말씀은 아침 먹자 입니다. 바우라 여기며 그 듬직함을 사랑했던 제자, 하지만 넘어지고 좌절한 제자에게 주님은 찾아 오셔서, 그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 주십니다. 축 쳐진 어깨로 밤새 물질한 아들이 안쓰럽기만 한 어머니처럼 주님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두번째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하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 분의 끝까지 사랑하심이 투명하게 전해져 옵니다. 연약한 우리들에게 반드시 두번째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또 주시는 기회를 믿으면 베드로가 되는 것이고,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포기하면 가롯 유다가 되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것이니까 잘못 해도 된다고요?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은 철이 좀 덜 든 분들이지요. J 자 여기까지가 베드로와 예수님의 만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극적인 화해의 장면에서 예수님은 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15절이 되면 함께 식사를 하던 제자들은 사라집니다. 아침 바닷가에 베드로와 예수님 둘만 남습니다. 그리고 물으시지요.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겐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사랑하지만,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사랑을 자신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시잖아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하는 성경 원어의 뉘앙스가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 같은 질문을 세 번 던지시는데, 처음 두 번과 마지막에 사용하신 단어가 다릅니다. 첫 두번은 사랑하느냐를 물으실 때 아가파오 라는 동사를 사랑하십니다. 아가페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 를 알고 계시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필레오 라는 동사를 써서 대답합니다. 거칠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정 혹은 자연적인 애정을 말합니다. 존 마쉬나 JB 필립 같은 신학자들은 완전한 사랑을 물어보시는 주님께, “주님, 제가 주님을 좋아하는 줄 아십니다정도로 대답하며 즉각적인 응답을 회피한 것이라 해석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아가파오 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떤 목사님은 그래서 이 부분의 행간을 이렇게 읽습니다. . ‘주님, 제가 변치 않는 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아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사랑은 그저 인간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저는 저의 사랑이 언제 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죄송해요. 하지만, 그게 저예요그럼에도 주님은 당신의 양떼를 부탁하십니다. 그리고 세번째 질문에서 주님은 베드로의 언어였던 필레오를 사용하십니다. ‘내가 너의 연약함을 잘 알단다. 그럼, 그 부족한 사랑으로라도 나를 사랑해 주겠니?’ 베드로의 회피하는 대답은 이제 더 이상 도망할 곳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대답하지요. 17절입니다. 근심하여 말하되,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필레오) 합니다. 주님은 그 연약한 우리의 사랑만으로도 우리와 당신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며 우리에게 양떼를 맡기 십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지금도 빈 그물에 낙심하고 슬퍼하는 우리를 위해 해변 저 편에서 투박한 손으로 생선과 떡을 구워 놓고 기다리시는 어머니 같은 주님. 매일 죄 짓는 삶 속에서도, 우리의 작은 힘으로나마 주님을 사랑하기 원하시는 그 분세상의 주인, 만물의 창조자, 하지만 우리의 사랑을 그리워하시는 분.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그 분께 우리의 사랑을 고백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