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발 딛고 자유하다 (사도행전 4장 5절 - 12절) - 2015년 4월 26일)

함께 예배함이 큰 기쁨입니다.
교회의 시계는 부활절후 제 4주를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 두시간에 걸쳐 살펴 보았듯이 부활하신 주님은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가서 the second chance를 주십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습니다. 내 양을 치라는 명령 그리고 이곳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라는 명령과 함께 말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렇게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갔던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성령행전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교회가 세워지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할 때, 신도가 3000명 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행 2:41)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모든 소유를 공유하였고, 날마다 성찬을 하고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하여 늘었다고 전해줍니다. 3장이 되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합니다.  


주께서 생전에 하신 두가지 일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가르치시고 고치신 일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했던 일도 바로 이 두가지 입니다. 가르치고 고치는 일. 그렇다면 우리 교회 공동체에게 부여된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예수 따름이라면 가르치고 고치는 일이 교회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베드로가 성전으로 들어가는 미문(아름다운 문) 앞에서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3장 6절 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줄 은과 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을 줍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십시오! 성경은 그가 걷고 또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전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누군가를 걷게 하거나 고침받게 할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때 여전히 치유와 회복의 일들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를 통해 아프리카의 말라리아가 치유되고, 교회를 통해 사람들의 눈이 밝아지는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여전히 그런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도 절망에 빠진 사람이 뛰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이야기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따르게 되자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 그리고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직간접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하나님을 모욕한다는 죄명을 그리고 영원한 왕에게 왕이 되고자하는 정치범이라는 누명을 씌워 불과 한달 반 전에 십자가 형을 집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고 다니는 존재들은 눈에 가시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의 행각에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을 때에 몰려와서 그들을 붙잡습니다.


잡아 놓은 지 이틀 째 되는 날 유대인들의 지도자, 장로, 율법학자가 모였습니다. 6절에는 가야바도 있다고 합니다. 제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세워 놓고 묻습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병든 자들을 고치고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하고 다니는 것이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가야바 앞에서 말입니다. 가야바의 앞 뜰에서 베드로는 한번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 거기서 베드로는 말 했습니다.”내가 그를 알지 못한다. 내가 그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저 계집아이를 저주하면서 맹세하는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불과 한달 반 전에 그랬던 베드로입니다. 그렇게 말해 놓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했던 베드로 입니다. 지금 그가 말합니다.
“나에게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이 누구의 힘으로 된 것인지를 묻는가? 당신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이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 일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살리신, 나사렛 출신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리십니까? 비겁했던 사람 베드로가 이제는 목숨을 걸고 진리를 향해 몸을 던지고 있습니다. 참 자유를 향한 베드로의 심장소리가 들리십니까?


베드로를 둘러싼 자들의 관심은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이제까지 편안함을 제공해 준 구조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관심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 분의 부탁 - 내 양을 치는 것 - 입니다. 성전 문앞에서 비참한 삶을 보내는 사람, 부활의 주님을 알지 못한 채 이 땅에서 허무한 것 만을 쫓아 살다가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베드로의 관심입니다. 내가 줄 수 있는 다른 것은 없지만 예수님이면 문제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합니다.


제사장들은 누가 살아났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혹여 누군가 새로운 삶을 허락 받았다고 하면,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 내용에 관심하여야 좋은 지도자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누가 고쳐졌는지, 누가 아파하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픈 자를 싸매주고, 버려진 자를 거두워 주는 것이, 그들이 그리도 중요하게 여기던 토라의 가르침이건만 그들의 눈은 그 생명의 가르침에 어둡기만 합니다. 그들에게 베드로는 당당히 교훈합니다. (12절)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다. 오직 예수의 이름 속에 생명이 있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말이  18절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라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과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어떤 것이 옳은지 판단하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두번째 기회를 누리는 베드로를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답답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못 알아 들었고, 배신 했고, 부활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감히 주님을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하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변화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닏.  8절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사도행전은 사실 성령행전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그 성령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 분의 이끄심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나약하고 넘어지는 실패자의 모습을 버리고, 진리를 향해 우리의 전 존재를 투신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형언할 수 없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의 말년에 베드로 전후서를 씁니다. 베드로전서 2장 1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모든 사람을 존중하며, 믿음의 식구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십시오. 3장 17절 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 고백과 함께 베드로는 참 자유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성령은 베드로에게, 주께서 Chief Corner Stone 인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세상의 힘과 권력이 아니라 그 모퉁이 돌에 두 발을 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흔들림 없이 부활의 주님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모퉁이의 머릿돌이시라는 4장 11절은 시편 118편의 인용입니다. 구약 성서를 인용하여 말하는 것은 거기 모여 있는 지식의 독점자들 – 제사장들이나 율법학자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너무도 적절하게 시편을 인용하자 그들은 무식한 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는지 궁금해 합니다 시편 118편은 사울의 갖은 위협에도 결국 왕위에 오른 다윗이 하는 고백입니다. 사울을 아시지요?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셨지요. 하지만 그는 하나님 품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진리를 져버리고 자신이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다윗이 나타나자 질투가 쳐 올라 그를 죽이려 합니다. 수천의 군대와 함께 자신의 사위이며 충신인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실패합니다. 결국 다윗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집 짖는 자는 사울을 말하고 버렸지만 다시 중요하게 쓰여진 돌은 자신을 말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집을 지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 구절 바로 다음 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베드로 앞에 앉아 있는 수많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집 짖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님이라는 돌을 버렸지요. 베드로는 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버린 그 돌이 내 cornerstone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반석 위에 나를 세우십니다…


베드로에게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키신 성령님이 이 시간 우리를 이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집 짖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다른 무엇 아닌 예수라는 corner stone 위에 우리의 두 발을 딛기 원합니다. 결국 없어지고 흔들릴 세상의 기반이 아니라 영원하신 이름 예수를 모퉁이돌 삼아 살아가기 원합니다. 맡겨주신 양들을 사랑하며 당당하게, 비겁하지 않게, 그리고 후회없이 살아갑시다. 성령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생명이 살아나는 성령의 열매가 생겨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