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es “주의 기도 위험한 그리고 위대한” 3/3 모든 것의 영원한 주인에게 (마태복음 6장 9절 – 13절) 2014년 10월 26일

  함께 예배하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오늘은 주의 기도 - 위험한 그리고 위대한,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을 통해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가장 모범적인 기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요. 하나님을 위한 세 가지 기도 그리고 우리를 위한 세 가지 기도를 차례로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허락된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은혜라는 고백과 함께, 아직도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나누며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죄의 용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조건 없는 은혜이지만, 우리끼리 용서해야 하나님도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은, 그 만큼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마음 속에 원한이 있다면 어떤 평화도 행복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시험과 악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도 드렸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럴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제 송영이라 불리는 주기도의 마지막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법륜 스님의 강연을 다녀왔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는데, 무엇보다 머리에 남는 말은 모든 고통이 욕심으로부터 온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불교와 우리 신앙의 언어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말하고 이해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지요. 그리고 하나님 말씀 전하는 이 귀한 시간을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해설로 채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욕심을 살피라는 말은 참 많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맡기고 자족하며 사는 삶. 행복과 평화의 한 중요한 조건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욕심 없이 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사랑을 되돌려 받으려는 욕심 버린 채 그저 사랑하라고 하는데, 어디 그게 쉬운가요? 말하자면 욕심을 버리려는 생각 자체도 집착이 되어 “욕심 없는 상태”로의 욕심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완전한 삶의 지경에 이를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되, 요한복음 13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려면, 우리의 옛 자아는 죽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 밖에 방법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약 500년 전에 이러한 진리를 깊이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마틴 루터 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497번째 주일입니다. 천주교 신부였던 그는 거룩한 삶에 대한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독일어로 직접 번역할 정도로 말씀에 대한 사랑도 매우 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고자 할 수록 자기 안에 있는 죄성과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어떤 행위와 사고도 온전히 의롭지 못함을 깨닫게 되어 힘들어 할 때에, 로마서 1장 16,17절의 말씀을 통해 확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온전히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의를 통해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우리 개신교의 중심 사상입니다. 오직 그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에 이릅니다. 그러니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그분의 은혜이지요. 이 말씀은 다른 어떤 resource 가 아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가 이야기하는 그토록 높고 깊은 삶의 지경을 꿈꾸고 소망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욕심으로 가득찬 우리가 여전히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고, 작은 잘못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가 용서 하겠다고, 용서의 사람이 되겠다고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또 죄로부터 자유한 삶을 감히 꿈꿀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기도를 드릴 자격이 없지만, 우리를 의롭다 불러 주시는 그 분의 은혜 때문에, 그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담대히 이런 기도를 되풀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능력과 의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 때에 그 분은 우리의 삶을 다스리실 것이고,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에 그 분은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이고 결국 그 분께서 온전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송영의 내용입니다.

  주기도 마지막 부분의 내용을 살피기 전에 한 가지 이야기 할 것이 있습니다. 알고 계신가요? 우리가 보는 성경의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작성된 필사본이고 여전히 더 오래된 사본들이 발견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성경의 원본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 때론, 우리를 성경의 ‘문자’에 메이지 않게 하는 좋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본이 100%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때론 생략되어 있는 것 그리고 또 때론 덧붙어 있는 사본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본들의 차이를 통해 원본의 모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본문비평이라고 하지요. 여러분들 성경에는 송영 부분이 괄호 속에 묶여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본에는 없다는 뜻이고, 실제로 본문 비평을 하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 것은, 이 부분이 원본에는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전통이 이 말을 복음서 속에 간직하는 이유는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학의 권위자인 요아킴 예레이마스는 “예수님은 주기도에서 송영을 말씀하지 않았지만 송영을 드리는 것에 찬성하셨음이 분명하다” 라고 말합니다. (김영봉,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

 이 송영은 세 가지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라, 권세 그리고 영광입니다. 첫 말은 나라에 대한 고백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로마의 통치하에 있는 이스라엘에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나라는 황제의 것이지요. 하지만, 마치 황제의 이름을 딴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듯이 (요한복음 21장) 주님은 우리에게 다스리는 자가 이 땅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 기도는 자연스레 우리에게 묻지요. 과연 당신을 다스리는 힘은 무엇입니까? 법이 나라의 운영 원리라면, 당신을 다스리는 법은 어떤 것입니까? 힘과 형벌을 앞세운 황제의 법입니까 아니면 생명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사랑의 법입니까? 나라가 아버지에게 있다는 말은 곧 우리가 방금 찬양한 것처럼 아버지가 우리를 다스려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삶의 최고 통치자의 자리는 항상 하나님을 위해 비워져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바로 권능입니다. 두나미스라는 말인데, 힘을 말하지요. 정치학이나 (잘은 모르지만) 물리학에서 힘이란 다른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무언가 변화되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권능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은 나와 이 세상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 능력이 아버지에게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에는 변화기 절실한 일들이 참 많은데, 잘 바뀌지 않습니다. 이 상황과 관계들이 좀 변하면 좋겠는데, 좀처럼 그런 일은 일어나질 않습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내가 좀 변화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됩니다. 될 것 같다가도 얼마 지나면 또 그 자리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변화의 능력이 내가 아닌 아버지에게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변할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고, 또 그 변화를 기다리며 새롭게 빚어주실 토기장이 같은 아버지를 기다립니다.
 세번째는 영광입니다. 모든 영광을 아버지의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 어려운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정받기를 원하고, 높아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이라는 말에는 무겁다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어느 자리에 있건 우리는 그 무게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영광이 모두 아버지에게 돌아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기도와 삶을 통해 결국 높아지셔야 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때에만 우리의 삶은 온전한 의미를 찾습니다. 아버지와 하나된 삶을 꿈꾸는 우리들에게 아버지의 영광이란 곧 우리 삶의 참된 의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영원히 속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우리의 모든 삶의 주인이시고, 모든 능력의 근원이시며 또한 모든 영광의 대상입니다.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그 찬란한 경배와 예배의 장면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참되게 고백할 때 우리의 믿음과 삶이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주 부터 우리는 매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함께 드리기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리기 합당한 삶의 지경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 확신하고 또 기대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스님의 강연회를 다녀와서

지난 금요일에는 UW Madison에서 한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법륜 스님의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사실, 교회 주보에 스님의 이야기를 쓰는 일이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우리와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이 매일 같이 다른 종교인들과 어울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면, 작은 동네, 메디슨에 있었던 이런 행사를 모른 척 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요.
강연장에 있으면서 든 첫 번째 생각은, “목마른 사람들이 참 많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타는 금요일 밤이었거든요. 강연장과 잇대어 있는 State st.에서는 같은 시간에 Homecoming parade가 한창이었습니다. 하지만 화려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일을 뒤로 한 채, 깊고 본질적인 것들에 관심하는 사람들이 방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온전히 행복할 수 있을지 묻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전 어떤 희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대부분의 문제를 인간의 욕심과 연관지어 설명하였습니다. 물론 기독교와 불교는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도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지만, 이 “욕심이 고통의 이유”라는 말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 원죄의 이유이기도 한데,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우리를 에덴에서 범죄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고 설명합니다. (1장 15절)
 
강연이 있은 후 저는, 한 이웃 종교인이 전해준 ‘욕심’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기도자리에 앉습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날 때에만 이 욕심 가득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를 새롭게 하시어 욕심 없이 살아하게 하소서. 보내신 삶의 자리에 만족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사랑해준 만큼 사랑 받으려는 욕심을 거두고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시듯”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들에 핀 꽃과 같이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자유로이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잠언 28장 25절)

Series “주의 기도 위험한 그리고 위대한” 2/3 위험한 부탁 (마태복음 6장 9절 – 15절) 2014년 10월 19일


함께 예배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지난 주부터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로 따지면 삼국시대에 가르쳐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가르침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기도가 여전히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우리를 참되고 깊은 기도의 세계로 이끈다고 믿습니다. 온고함 속에 지신하는 일이 우리 안에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에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 라는 말입니다. 그는 하늘에 계십니다. 잠언 5장의 말씀처럼 우리는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은 어디에도 있고,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나 분과  함께 하듯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전통 가운데 신독이라는 덕목이 있지요. 홀로 있을 때에도 마치 누가 있는듯이 삼가하라누가 있단 말인가요? 우리 조상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알기도 전에, 성경의 가르침을 알기도 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들은 지난 주간 신독하며 사셨는지 묻고 싶네요.

그런데, 분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고 해도 두려워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분은 우리의 잘못을 체크하는 감시자라기 보다는 사랑으로 바라보고 있는 존재, 바로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빠라는 사실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입니다. 분께서 아빠임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걱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가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분은우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시지만 또한 옆에 있는 사람, 그리고 세상 모든 존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 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됩니다. 마음을 알기 때문에, 분에게 돌아와야 하는 사람들에게 분을 전할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 알려주신 후에, 예수님은 먼저 분의 이름이 거룩하여 지기를 원한다는 기도를 드리십니다. 입만 열면 우리의 요구를 쏟아내기에 바쁜 우리의 기도와는 달리, 먼저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높여 드립니다. 그렇게 , 아버지의 이름이 우리 안에 충분히 높여질 ,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고 무게로부터 자유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한 우리의 바램은 아버지의 이름이 세상 곳곳에서 거룩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의 삶을 돌아 보면, 아버지가 때문에 자랑스러워 하실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잠언 25장에, 충성하는 자는 그를 보낸 주인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다고 합니다. 세상을 돌아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들만 들려옵니다. 아파트의 경비원은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해서 자살을 시도하고요, 경기도에서는 무고한 사람들 수십명이 죽었습니다. 미국이 주도한 시리아 공습에서 민간인 10명이 죽었다고 보도되고, 홍콩에서는 250명이 다쳤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우리와 똑같이 마음 아파하시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무척이나 안타깝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때문에  시원한 냉수 한잔 하시는 같은 기쁨을 느끼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버지의 이름이 세상 모든 것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는 자연스레 분의 나라가 임하고 뜻이 가운데 이루어지게 달라는 기도와 연결됩니다. 아버지의 ,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사랑이고, 행복이고 생명과 평화이지요. 생명과 평화가 도처에서 살아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바실레이아 데오 라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요, 많은 신약 학자들이 예수님이 땅에서 가르쳐 주신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 나라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라는 영토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치적인 개념이지요. 공간적으로 나라를 세우려 했던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운 결과만을 남겼습니다. 그러니까 뜻을 명확히 하려면 하나님의 다스림 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나라가 임한다 그것은요, 아버지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아버지 세상 모든 민족이 아버지의 다스림 속에, 아버지의 통치 속에 살아가게 주십시오 라는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삶을 다스려 주옵소서. 기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우리 삶을 다스리고 있는지, 무엇이 우리의 생각가 행위를 이끌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성공을 향한 욕심, 소유를 향한 전력 질주 혹은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기 위한 자기애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있다면 기도를 통하여 다시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이 다스림의 자리에 앉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때에만, 우리를 만드시고 거두실 분이 지금의 삶을 이끄실 때만 우리는 참되게 살아갈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아버지 되심을 기도하고 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첫번째는 양식을 위한 기도입니다. 물어보지요. 집에 하루치의 양식이 없는 있으십니까 (우리 집에 오세요) 냉장고가 개발되면서 사람들의 탐욕은 늘어났지만 그것이 없더라도 우리는 대부분 하루 이상의 양식을 비축하고 살아갑니다. 그럼 기도는 무엇인가? 바로, 매일 매일의 양식이 하나님께로부터 것임을 고백하고, 인식하고 - “까먹지 말고”, 감사하며 살아가리라는 고백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우리를 살아있게 하시는 분이 분이 하나님이심을 마음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고, 어려운 날이 오기 전에, 때가 되서야 뒤늦게 깨닫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과 식사 속에서, 결국 땅의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햇빛과 비의 주인, 땅과 공기의 창조자를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식사를 하며 감격과 감사를 회복하는 우리가 됩시다. 출애굽의 시기 동안 매일 매일 만나를 신비로 경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날 없습니다. 그런데, 만나가 당연한 것이 되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잊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기도 속에도우리라는 단어는 의도적으로 사용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북반구의 음식물 쓰레기만으로 남반구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있는 정말 이상한 세상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일용할 양식. 우리에겐 당연한데, 누군가에겐 정말 절실한 기도가 되기도 합니다. 기도 속에 땅의 뒤틀어진 모습을 다시 옳게 만들려는 거룩한 욕심이 담겨나길 소원합니다. 이렇게 매주 기도하는 우리를 통해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제공되길 바랍니다. 우리 12월에 no more malaria 김밥 장사 하려고 합니다. 좋은 훈련과 시도가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주의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은 중에 하나에 대해서만 부연 설명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4.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실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어떻게 보면 우리가 용서 받는 조건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용서란 어떤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용서이기에 조건이 있을 수도 없고, 조건을 채운다고 해도 당연히 하나님께 용서하시오 하고 당당히 요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조건처럼, 아니 조금은 협박처럼 용서해야만 용서 받을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용서가 중요하기 때문 아닐까요? 아버지의 용서는 조건이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계시기 때문 아닐까요? 용서는 그런 이미에서 명령입니다. 정말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 용서하기 힘든 상황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기가 미안하고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용서 하셔야 합니다. 결코 용서할 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당신이 사람을 용서하시기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용서 없이 우선, 당신의 삶이 행복할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한 행복과 자유를 향한 명령입니다. 누군가를 향한 나쁜 마음을 여전히 품고 계십니까?  간이 필요할 때가 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마음은 풀어져야 합니다. 기도 가운데 용서할 없는 마음까지 하나님께 드려봅시다. 내일은 용서하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으로 생각해 기도는 바로 시험과 악한 자에게서의 구원입니다. 얼마나 많이 시험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까? 크던 작던 우리는 항상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악한 세력을 마주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주 그들에게 우리 마음을 내어 줍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시험 앞에서 약한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말씀의 도움이 필요하고 성령님의 동행하심이 필요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의 표현으로 우리는 마치 장의 종이와 같아서 쉽사리 찢어지고 구겨집니다. 그런데, 종이가 반석에 달라 붙으면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반석에 달라 붙으면 결코 쉽사리 찢어지지 않게 됩니다. 영어 단어 religion 바로 이러한 표현인데, 이는 다시 묶다 라는 라틴어에서 유리한 말입니다. 근본적인 것에, 어떤 위대한 것에 우리 자신을 다시 묶을 때에만 우리는 시험과 악한자의 도전에서 바로 있게 됩니다. 그러기에 기도 속에 깨어 있어서 하나님에게 우리를 묶어 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가지 기도를 우리를 위해 드렸습니다. 우리가 안에 있을 구하는 것들은 반드시 들어준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방식대로 기도하면 들어주시겠지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양식 대하며 감사와 만족을 느낄 것입니다. 용서할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불가능할 같았지만 어느 순간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과 악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게 것입니다. 여전히 힘들어도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이야기하며 것입니다.

우리 이렇게 기도하며 이렇게 살아갑시다. 위험하고 어려운 기도지만, 좁은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평화와 생명의 길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셨던 예수님, 우리 모두의 배를 불리고자 스스로 생명의 빵이 되신 예수님,자신의 원수들도 사랑하셨던 용서의 예수님 용서하셨던 예수님, 그리고 어떤 시험과 악의 유혹 속에서도 결코 중심을 잃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