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es “주의 기도 위험한 그리고 위대한” 3/3 모든 것의 영원한 주인에게 (마태복음 6장 9절 – 13절) 2014년 10월 26일

  함께 예배하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오늘은 주의 기도 - 위험한 그리고 위대한,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을 통해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가장 모범적인 기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요. 하나님을 위한 세 가지 기도 그리고 우리를 위한 세 가지 기도를 차례로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허락된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은혜라는 고백과 함께, 아직도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나누며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죄의 용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조건 없는 은혜이지만, 우리끼리 용서해야 하나님도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은, 그 만큼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마음 속에 원한이 있다면 어떤 평화도 행복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시험과 악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도 드렸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럴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제 송영이라 불리는 주기도의 마지막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법륜 스님의 강연을 다녀왔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는데, 무엇보다 머리에 남는 말은 모든 고통이 욕심으로부터 온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불교와 우리 신앙의 언어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말하고 이해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지요. 그리고 하나님 말씀 전하는 이 귀한 시간을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해설로 채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욕심을 살피라는 말은 참 많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맡기고 자족하며 사는 삶. 행복과 평화의 한 중요한 조건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욕심 없이 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사랑을 되돌려 받으려는 욕심 버린 채 그저 사랑하라고 하는데, 어디 그게 쉬운가요? 말하자면 욕심을 버리려는 생각 자체도 집착이 되어 “욕심 없는 상태”로의 욕심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완전한 삶의 지경에 이를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되, 요한복음 13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려면, 우리의 옛 자아는 죽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 밖에 방법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약 500년 전에 이러한 진리를 깊이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마틴 루터 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497번째 주일입니다. 천주교 신부였던 그는 거룩한 삶에 대한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독일어로 직접 번역할 정도로 말씀에 대한 사랑도 매우 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고자 할 수록 자기 안에 있는 죄성과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어떤 행위와 사고도 온전히 의롭지 못함을 깨닫게 되어 힘들어 할 때에, 로마서 1장 16,17절의 말씀을 통해 확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온전히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의를 통해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우리 개신교의 중심 사상입니다. 오직 그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에 이릅니다. 그러니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그분의 은혜이지요. 이 말씀은 다른 어떤 resource 가 아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가 이야기하는 그토록 높고 깊은 삶의 지경을 꿈꾸고 소망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욕심으로 가득찬 우리가 여전히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고, 작은 잘못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가 용서 하겠다고, 용서의 사람이 되겠다고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또 죄로부터 자유한 삶을 감히 꿈꿀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기도를 드릴 자격이 없지만, 우리를 의롭다 불러 주시는 그 분의 은혜 때문에, 그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담대히 이런 기도를 되풀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능력과 의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 때에 그 분은 우리의 삶을 다스리실 것이고,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에 그 분은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이고 결국 그 분께서 온전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송영의 내용입니다.

  주기도 마지막 부분의 내용을 살피기 전에 한 가지 이야기 할 것이 있습니다. 알고 계신가요? 우리가 보는 성경의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작성된 필사본이고 여전히 더 오래된 사본들이 발견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성경의 원본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 때론, 우리를 성경의 ‘문자’에 메이지 않게 하는 좋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본이 100%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때론 생략되어 있는 것 그리고 또 때론 덧붙어 있는 사본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본들의 차이를 통해 원본의 모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본문비평이라고 하지요. 여러분들 성경에는 송영 부분이 괄호 속에 묶여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본에는 없다는 뜻이고, 실제로 본문 비평을 하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 것은, 이 부분이 원본에는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전통이 이 말을 복음서 속에 간직하는 이유는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학의 권위자인 요아킴 예레이마스는 “예수님은 주기도에서 송영을 말씀하지 않았지만 송영을 드리는 것에 찬성하셨음이 분명하다” 라고 말합니다. (김영봉,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

 이 송영은 세 가지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라, 권세 그리고 영광입니다. 첫 말은 나라에 대한 고백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로마의 통치하에 있는 이스라엘에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나라는 황제의 것이지요. 하지만, 마치 황제의 이름을 딴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듯이 (요한복음 21장) 주님은 우리에게 다스리는 자가 이 땅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 기도는 자연스레 우리에게 묻지요. 과연 당신을 다스리는 힘은 무엇입니까? 법이 나라의 운영 원리라면, 당신을 다스리는 법은 어떤 것입니까? 힘과 형벌을 앞세운 황제의 법입니까 아니면 생명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사랑의 법입니까? 나라가 아버지에게 있다는 말은 곧 우리가 방금 찬양한 것처럼 아버지가 우리를 다스려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삶의 최고 통치자의 자리는 항상 하나님을 위해 비워져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바로 권능입니다. 두나미스라는 말인데, 힘을 말하지요. 정치학이나 (잘은 모르지만) 물리학에서 힘이란 다른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무언가 변화되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권능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은 나와 이 세상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 능력이 아버지에게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에는 변화기 절실한 일들이 참 많은데, 잘 바뀌지 않습니다. 이 상황과 관계들이 좀 변하면 좋겠는데, 좀처럼 그런 일은 일어나질 않습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내가 좀 변화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됩니다. 될 것 같다가도 얼마 지나면 또 그 자리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변화의 능력이 내가 아닌 아버지에게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변할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고, 또 그 변화를 기다리며 새롭게 빚어주실 토기장이 같은 아버지를 기다립니다.
 세번째는 영광입니다. 모든 영광을 아버지의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 어려운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정받기를 원하고, 높아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이라는 말에는 무겁다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어느 자리에 있건 우리는 그 무게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영광이 모두 아버지에게 돌아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기도와 삶을 통해 결국 높아지셔야 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때에만 우리의 삶은 온전한 의미를 찾습니다. 아버지와 하나된 삶을 꿈꾸는 우리들에게 아버지의 영광이란 곧 우리 삶의 참된 의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영원히 속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우리의 모든 삶의 주인이시고, 모든 능력의 근원이시며 또한 모든 영광의 대상입니다.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그 찬란한 경배와 예배의 장면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참되게 고백할 때 우리의 믿음과 삶이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주 부터 우리는 매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함께 드리기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리기 합당한 삶의 지경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 확신하고 또 기대합니다.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