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ans of Grace - 감리교인은 누구인가? (빌립보서 3장 13절 - 17절) - 2014년 11월 2일

Means of Grace - 감리교인이란 누구인가?  빌립보서 3장 13절 - 17절

 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오늘은 이미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서 있는 전통이 무엇인가, 감리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를 통하여 대언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설교시간은 강의나 사적 이야기로 채워져서는 아니 됩니다. 머리를 채우거나 귀를 즐겁게 하는 이야기 듣기가 아니라,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 말씀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올바른 설교듣기입니다. 성경 말씀에 충실해야 하며,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에 하고자 하시는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귀중한 시간을 감리교회에 관한 이야기로 채우려 하는 것은, 이 전통과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행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여기라 말합니다. 바울의 삶을 통해, 그리고 함께 신앙하는 누군가의 삶을 살핌으로 그와 같은 옳은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교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교단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서 있는 전통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그것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가능하고, 다른 이들과 평화로운 대화와 교류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 신앙의 수단, 우리가 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길 소원합니다.  

자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기독교 라는 이름 안에 참으로 많은 종파들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주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뒤에 주님은 각기 다른 일을 시키시려고 사람들을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교회 안에서도 맞는 말이지만 교회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개신교에는 많은 종파들이 있지요. 어떤 종파는 성령의 세례를 강조하고, 또 어떤 종파는 사회 참여나 평화 운동에 더 적극적입니다. 매우 이성적인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신비주의를 자신들의 자랑으로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 다름이 참 감사합니다. 유한한 인간으로 우리는 그 누구도 나만 옳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주, 하나의 믿음, 그리고 하나의 세례에 동의할 수 있다면 저는 서로의 다른 전통들을 통해 우리의 하나님 이해가 더 풍요로워진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 다름의 풍요로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리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감리교인이라는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고 신앙을 나눕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18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사회 변화가 있었습니다. 농업 중심의 봉건 사회는 급격하게 공업화 되었고,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으며 (런던의 인구는 1720년에서 40년까지 세배로 늘어납니다)  대량 생산과 시장 경제의 발전과 같은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많은 문제들이 생겨났지요. 심각한 아동 노동, 그에 따른 교육의 기회박탈, 도시 빈민 문제, 의료 서비스의 부재 등등… 런던의 감옥은 포화상태가 되었고, 알코올이 자유롭게 유통되면서 사람들은 술과 도박에 점점 더 빠져갔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교회는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지요. 영국의 국교회는 그래서 교구마다 목회자가 있고 그래서 매 주일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지만, 그들의 신앙이 그들의 삶 속에서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형식화 된 신앙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부흥운동,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시기에, 옥스포드 대학의 몇몇 청년들이 경건한 삶의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을 회복하려는 실험을 시작합니다. 바로, 고대 동양의 언어들과 종교철학을 공부하던 1703년생 존 웨슬리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말입니다.사무엘 웨슬리라는 목사의 19 자녀 중 15번째 아들로 태어난 존 웨슬리는 매우 엄격한 종교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는 동방 정교회와 고대 교부들의 가르침에 빠져들게 되지요. 그가 시작한 이 holy club을 통해, 그들은 매일 같이 함께 성만찬을 나누고 성경을 연구하며 금식을 합니다. 웨슬리는 지속적인 훈련과 규칙이 없이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규칙쟁이들이라고 부르고, 이 별명이 후에 감리교(Methodist) 의 공식적인 이름이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감리교의 가장 큰 특징일 것입니다. 바로 수단과 규칙을 중요시 하는 일 말입니다. 당시 영국사회 부흥 운동의 중심에는 열광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신비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지요. 이제 곧 말씀드리겠지만, 웨슬리는 이러한 체험을 매우 중요시 했습니다. 마음의 종교, 마음의 할례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안들은 그러한 은혜를 보존하는 수단으로서의 method 들, 즉 Means of Grace를 폐기처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찬과 금식, 기도와 성경읽기 그리고 선한 행위들을 통해여 은혜를 더욱 충분히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을 잃은 의미는 개인의 삶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기 어렵고, 공동체의 삶 속에서 충분히 공유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감리교인들의 전통을 논하면서 우리는 웨슬리의 미국 선교여행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웨슬리는  1734년에 미국 선교 여행을 왔다 가거든요. 결과적으로 그 선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소피 홉킨이라는 여자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웨슬리가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목사랑 결혼을 했어요. 성만찬을 받기 위해 나온 그에게 웨슬리는 성찬을 베풀지 않습니다. 이 일이 문제가 되어서 웨슬리는 미국 선교를 접게 됩니다. -보세요, 우리는 웨슬리를 신앙할 수 없습니다. ^^-  그런데, 이 여행 중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바로 이것입니다. 57일의 여정이었다고 합니다. 풍랑이 오지요. 흔들리는 배안에서 평화를 잃지 않는 모라비안- 독일출신의 신비주의집단-들의 모습을 봅니다. 폭풍중에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을 보고 웨슬리가 두렵지 않냐고 묻자 두렵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웨슬리는 나중에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는데, 자신은 외면적 신앙은 있지만 내면적 신앙이 없다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는 기쁨의, 마음의 찬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교 여행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웨슬리를 모라비안들의 모임으로 이끌게 되고요, 결국 1738년 5월 24일 성령을 체험한 그는 일기에 이렇게 씁니다.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존 웨슬리는, 그리고 이제껏 이어지고 있는 감리교의 전통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신비한 체험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내적인 믿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럼에도, 체험만 있으면 됐지 다른 건 필요 없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결국,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지도자였던 진젠도르프하고도 헤어지거든요. 훈련과 방법들. Means of grace 없이는 우리가 은혜를 지속적으로 체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초기 감리교 운동은 옥스포드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도시 빈민들, 광산 노동자들의 틈 속에서 퍼져 나갑니다. 최고의 학문을 통한 성서 이해는 창녀와 죄수들을 향한 실천으로 이어지고요, 전통을 중시하는 그들은 말씀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옥외 설교를 감행합니다. (당시 옥외 설교는 영국 국교회로부터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초기 감리교인들은 우리의 의지적 결단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영광되게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에 대해서 초기 감리교인들이 형식주의와 열광주의를 모두 거부하였다면, 신학적인 측면에서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왜곡된 칼빈주의”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말하자면 “지나친 예정론”이 틀렸다고 말한 것이지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고, 그 믿음은 선물이다 라고 주장하는 개혁주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더욱 강조하려다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라는 교리에 이르게 됩니다.자신의 삶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우리는 고백적인 언어로 예정론을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나고 보니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고, 그분의 섭리였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성경적인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이 먹을 반찬까지 정해 놓으셨나요? 웨슬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신앙은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고, 이 땅에서 책임있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웨슬리에 따르면, 그리고 우리 감리교회의 교리가 고백하는 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가 있어야 참된 인격이고, 그런 인격이라야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자유의 공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은 모두 구원을 얻도록 예언되었다” 라고 고백하지만, 그리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 특수한 예정들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삶의 모든 부분이 다 예정되어 있다,  특히 구원받지 못할 이들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게 일부 예정론자들의 교리와 감리교회가 보이는 가장 큰 차이일 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개입하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 반, 우리의 노력 반 이렇게 이루어 진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 속에 열려진 미래를 향해 책임있게 살아가야 한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결코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꼭두각시를 보고 즐기는 건 진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이것이 웨슬리로 하여금 끝까지 성결의 연습을 지속시킨 이유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은혜의 수단들을 소중히 간직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책임있는 크리스천으로 살게하는 힘입니다. 이, 구원을 향한 여정, 거룩해지는 과정을 충실히 걸어가면서 감리교도들은 세상을 성화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노예해방운동, 양성 평등운동 그리고 교육 사업에 가장 적극적으로 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감리교인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그의 산상수훈 설교에서 기독교는 개인적인 종교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종교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에 웨슬리 목사님의 책 중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이 그의 민간요법에 관한 의학책입니다. 초기 감리교인들은 고아원을 세웠고, 학교를 지었으며, 노동조합을 조직합니다. 부자들에게 후하기만 한 세금정책을 바꾸기 위해 애쓰기도 하고 말입니다. 성찬이나 성경읽기 뿐만 아니라 이러한 행동들도 모두 은혜의 수단이 됩니다. 이 일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특성상 여러분들 중에 대부분은 몇년 내로 메디슨을 떠납니다.  빨리 떠날 수록 좋은 것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감리교회를 프로모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은혜의 수단을 중요하게 여기는 감리교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이지만, 연애할 때도 그렇듯이 표현되지 못한 마음은 마음 없는 행위 만큼이나 무의미합니다. Means of Grace 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다음주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으로 성찬을 나눕니다. 2000년을 이어온 오랜 전통이 우리 안에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되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헌금도 할 것입니다.  꼭 헌금을 준비해 오십시오. 한 해 동안 잘 살았잖아요. 이제 한해를 마무리하고 대강절부터 새 해를 준비할텐데, 지난 한해 우리 삶을 지켜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지요. 그리고, 웨슬리 전통을 따라 그 돈을 모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려고 합니다. 그것이 은혜의 수단이 됩니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혜가 더 오래도록 간직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에든 있지만 이 방식으로 그 은혜를 기억하고 나눌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우리는 완전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 완전한 사랑의 사랑이 되고자하는 거룩한 열정이 우리 안에 생겨나길 바래 봅니다.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