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예배, '분열의 예수님' (누가복음 12장 49절 – 53절) - 2015년 3월 1일


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오늘은 96주년 되는 대한민국의 3.1절이고 누가복음 12장의 말씀을 통해, 이웃과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하신 신앙의 선배들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저와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 보신 분들은 아실테지만, 제가 문자를 보내거나 메일을 쓸 때마다 항상 쓰는 꼬리말이 있습니다. 바로 “평화”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특권, 그리고 그 선물을 가지고 마땅히 세상 가운데 퍼트려야 할 것이 바로 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빕니다. 혹은 평화…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평화를 이야기 해 줍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과 사이 좋게 살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우리이기에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하지만,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간극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통해 회복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니,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자.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평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듭난 사람으로서 이웃과의 평화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그렇게 해석하시는 분들이 있지요. 수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평은 이웃들과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말입니다. 참 좋은 통찰이라 생각합니다. 동의 합니다. 평화의 또 다른 한 축은 네 이웃을 나의 몸 처럼 사랑하고,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처럼, 최선을 다해 모든 사람과 함께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만 이룰 수는 없습니다.주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고, 또 그 평화를 지속 확장시키는 일 가운데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그리고 우리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 주시려 오셨다고요. 오죽하면 그 분의 또 다른 이름이 평화의 왕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말씀을 함께 읽자마자 ‘아멘’ 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51절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올 줄로 아느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틀렸다. 난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 모두 속은 것일까요?
그 분이 오시던 날 목자들은 이제 땅 위에 평화가 임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속았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는데, 이 말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던지, 그 말이 거짓말이던지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예수님이 화평의 복음을 전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누가복음의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실 때, 베드로는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일까요?

혹시 누가가 잘 못 들은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0장 34절 이후에 거의 동일한 말씀이 전해집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고, 세상에 불 대신에 칼을 가져다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를 비판하면서, 코란에 있는 폭력적인 구절들을 무작위로 인용하는 것처럼, 혹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본다면, 우리를 싸잡아 욕하기 딱 좋겠습니다. “그 봐라, 너희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다.” “당신들의 예수님이 며느리들보고 시어머니에게 맞서라 가르치지 않았냐?” 하고 말입니다.  

이 이해하기 힘든 말,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여기, 96년전 오늘 이 말의 깊은 뜻을 이해하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분열을 일으킨 사람들, 문제를 만들었던 사람들, 무엇인가 옳지 않은 것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3월 1일을 특별한 날로 만들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민족 대표 33인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이었습니다. 천도교인이 15명인데, 이 신흥종교의 아주 많은 부분이 기독교 사상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그리고 일본의 만행에 빌붙어 자기 배를 불리던 이들에게, 모든 사람은 노예 상태를 벗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치는 복음의 메시지는 평화의 메시지라기 보다는 분열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유관순. 자랑스러운 감리교인입니다. 그녀는 세상에 불을 질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3.1 운동이 끝난 후에 9,500 명이 감옥에 투옥되는데, 그중에 3,400 명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에, 기독교 인이 1.3% 밖에 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단지 3.1 절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 4.19 민주화 운동, 6.10 민주화 항쟁 등등 대한민국이 진짜 평화를 위해 한 발짝씩 나갈 때마다 교회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교회는요, 때론 문제를 만드는 곳이어야 합니다. 좋은 게 좋다고 말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소금이라고 비유하지요. 썩지 않도록 소금을 쳐서 따끔거려도, 바르게 만드는 사람들이 기독교인, 예수쟁이들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분명히 분열시키는 능력을 갖습니다. 그저 좋은 게 좋다고 말하는 기독교인이 되려면 예수를 뺀 기독교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실, 문제 만들기를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전해진 개신교가 한국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정동, 새문안 같은 최초의 교회들이 세워지던 거의 같은 시기에 광혜원, 배제학당 등이 세워집니다. 그리고, 계집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세워지지요. 처음에 그 학교 어땠을 것 같아요? 아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대단한 무리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어디 여자가 글을 읽으려 합니까? 딸아아이의 교육을 두고 가족들을 갈라졌을 것입니다. 100분토론이 있었다면 아주 열띤 토론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00년이 조금 더 지난 지금, 여러분이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우리는 여자 대통령을 갖게 되었지요.

때론, 분쟁 없이 어떤 성숙도 발전도 없습니다. 좋은 게 좋다고요? 남자아이들과 똑같이 똑똑한 아이들이 전혀 아무런 교육의 기회도 제공받지 못하던 사회… 어떤 남자들에게는 그것이 평화로워 보일지 모르지요. 하지만, 그건 가짜 평화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라고 말씀하실 때의 평화는 바로 그 가짜 평화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평화라는 말(에이레네)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던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제국주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잖아요. 로마는 세상에 평화를 약속했습니다.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다… 마치 일본군이 우리 나라에 자기들의 정부를 주둔시키면서 발전과 안녕을 약속했던 것처럼… 힘 없는 자들은 그저 선택된 소수를 위해 희생하라, 그러면 자유롭지는 않지만 적당히 살 수 있게는 해 주겠다. 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지요. 그 가짜 평화를 두고 예수님은 제대로된 니킥을 날리십니다. 힘으로 지배하는 평화? 전체주의적이고 거짓된 평화? 아니다 나는 분열을 일으키련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요, 분열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지만, 서로를 미워하거나 죽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서로 맞서고 갈라지게 될 것이라 말씀하시지만, 전쟁을 선포하시지는 않습니다. 참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때론 복음이 우리를 갈라 놓게 합니다.

거창한 민족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분열이 필요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제 좋은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한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진지하게 믿어 보려는 친구입니다. 진지하게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자신의 삶 모든 구석에서 신앙이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 입니다. 그렇게 신앙을 갖고 보니 회사 동료들과 단란 주점에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열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사이 좋게 같이 가는 게 좋은 건가요? 그게 평화스러운 건가요? 그 곳에서 주님 주신 아름다운 “성”을 돈으로 사고, 그렇게 뱃속 가득한 욕망을 채우고, 친구들과 함께 함으로 죄책감을 조금 덜하게 하고… 아니지요. 거기엔 불이 필요합니다. 분열이 필요하고요, 옳은 것과 그릇 것 간의 분열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이요. 그들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정죄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저, 맞서야 하고, 죄된 상황과 대립하여야 하며, 옳은 것을 위해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진리를 위해 사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때, 우리의 신앙은 진정한 권위를 되찾을 것입니다.

여전히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분열하라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세상이 좀 바뀌어야 합니다. 그저 착하게 살자… 이 말이 답이 아닌 것입니다. 사순절인데, 다른 예수님의 말씀을 보기도 참 바쁜 시기인데 삼일절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우리 안에 애국하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친정권적인 보수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에게 주어주신 이웃들, 사람들을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일은 때로는 분열을 가져오는 일입니다. 문제를 절감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삼포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연예, 결혼, 출산 그리고 거기에 둘을 더 포기한답니다. 인간관계 그리고 내 집마련… 이 세상에도 불이 필요합니다. 미워하지 마십시오. 그저 정의를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2%가 채 안되던 그 시절, 3.1 절을 통해 민족의 아픔을 그치게 하고자 수많은 신앙인들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니까 그저 눈 감고 거짓된 의미에서 평화롭게 할라 하지 않으십니다. 진리를 품은 용기를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주변을 둘러 보십시오. 분명히 고쳐져야 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분열의 예수님. 여전히 그 분열은 참된 평화로의 길입니다. 가짜 평화에 물든 사람들을 흔드시고, 분열시키셔서, 하나님 속의 참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은 역사를 통해, 그리고 지금도 계속됩니다. 그 일에 쓰임 받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참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