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기뻐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폐회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양해를 구하고 참석자 중 가장 먼저 달라스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메디슨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고 밀린 일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딩 10분 전에 방송이 흘러 나옵니다. 시카고 지역 관제센터의 화재로 시카고행 모든 비행기가 취소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심한 직원은 환불을 받아가던지 아니면 내일 오후 비행기를 타던지 하랍니다.
“아… 나…”
지난 5일 동안 목회자 학교에서 
받았던 은혜가 하마터면 모두 날아갈 뻔한 순간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세미나 장소로 되돌아 왔지요.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에이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불편한 마음을 털어내 버리자 마음에 평화가 생겨났습니다. 물론 혼자서 아이들과 하루를 더 지내야 하는 아내에게는 미안했지만요. 그리고 그곳에서 참 좋은 하루를 지냈습니다. 좋으신 목사님들과 보다 깊고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지난 오일 동안 열심히 듣고 배운 것들을 조용히 review 할 수 있는 시간도 갖을 수 있었거든요. 저녁엔 추어탕도 먹었고요. (여보, 미안~^^) 지금 저는 휴스톤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전 하나님께서 일부러 저를 달라스에 하루 더 잡아 두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저에게 뜻하지 않은 ‘좋은 만남과 시간’을 허락하시려고 관제센터에 불을 놓으시거나, 더 급한 다른 사람들의 발을 잡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거든요. 하지만 이렇게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건을 통해 감사할 만한 것, 좋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이렇게 명령하시지요.  
“언제나 기뻐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 18절)
 
그런데, 가족들은 진짜 빨리 좀 만나고 싶네요.^^ 평화를 빕니다.

칼럼: 같이 놀래?

  지난 화요일(9/16)에 “얘들아 놀러와”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네 명의 아이들과 엄마들이 모여서 말 그대로 재미있게 놀았지요. 아이들에게는, 깨끗한 방을 금방 어지럽히는 능력이라든지 착한 엄마를 소리 지르게 하는 능력과 함께 아주 신기한 재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친구를 만드는 기술”입니다. 아이들끼리 서로 친구가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친구가 되는 시간” 따위는 그들에게 없는 듯 합니다. 어떤 분유를 좋아하시는지, 어느 산부인과 출신인지를 묻기 전에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가 말합니다.같이 놀래?”

  그렇게 타인과 쉽사리 하나가 되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왜 그분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아이들의 것(마가복음 10장 14절)이라고 말씀하셨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친구 만들기 선수”^^ 셨지요. 우리 아이들처럼 예수님도 누군가를 만날 때, 이것 저것 재어보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만남이 있는 모든 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아이들의 모습은 좋은 거울이 되어 우리 어른들의 삶을 비추어 줍니다. 어른들에겐 왜 그렇게 친구 사귀기가 힘든 건지… 작가 장영희는 그녀의 책 ‘문학의 숲은 거닐다’ 서문에서 ‘같이 놀래’(want to play) 라는 말이 얼마나 소중한 말인지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하지요. ‘“같이 놀래”라고 말하며 손을 뻗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 (p.10) 깊이 동의합니다.

  얘들아 놀러와 가 있던 날 저녁에 제 딸 수진이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아빠, 메디슨 참 좋다 친구도 많고…’

오늘, 당신이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같이 놀래?’ 해 보면 어떨까요? 이것 저것 재지 말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의 메디슨이 참 좋아질 것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시리즈 설교 “왜”] 2/3 왜 교회인가 - 진리실험 공동체 part II (사도행전 2장 37절-47절) - 2014년 9 월 21일

함께 예배하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예배를 시작한지 넷째 주 되는 날이고요, 지난 몇 주간에 걸쳐서 우리는 라는 질문을 스스로 묻고 답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인가? 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았고, 지난 주에는 왜 교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란 진리를 실험 공동체다 라는 말씀을 드렸지요. 교회를 통해 행하시는 첫 번째 기적은 서로 말이 통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 성령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는 서로 소통하게 되지요. 성령은 사랑의 영이고, 사랑하면 서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것을 실험해 보는 공동체.  그게 바로 이곳 교회입니다. 건물도 아니고요, 조직도 아니고, 그저 함께 참되고 다른 삶을 살아보는 공동체이지요.

사실, 이제 드릴 말씀은 지난 주에 하려던 설교의 후반부 입니다. 지난 주에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오늘 하기로 하였지요. 그렇게 처음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이 성령을 경험한 후,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선포됩니다. 그 위대한 다윗은 죽었지만, 예수님은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36절까지 계속되는 설교의 내용은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화려한 수사나 적절한 예화도 없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왜 일까요? 우선, 베드로는 자신이 경헌한 것을 이야기 합니다. 32,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의 증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봤다는 것입니다. 본 것, 실제로 경험한 것을 말할 때, 우리의 하나님 이야기는 힘을 갖게 됩니다. 지난 주에 처음 만나게 된 사람들과 식사를 했어요. 그러면서, 그들의 룸메이트를 어떻게 전도할 수 있을까 잠깐 이야기 했지요. 그런데, 교회 가자, 예수 믿어라 하고 말하기 전에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먼저 보는 일, 우리가 먼저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죽음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일. 그게 선행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동아리 회원 모집만 하는 거예요. TV 에서 한 여배우가 나와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자기는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화장품만 광고를 한다고. 그래야 거짓말 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화장품 하나에 대한 이야기도 그러한데, 우리의 영원을 결정짓는 신앙은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본 것, 우리가 경험한 것만을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말이 누군가에게 무게 있게 들리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베드로의 설교가 마치자,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전 이 말이 참좋습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곳에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늘날 아주 많은 설교들이 우리 귀와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에 그치고 있어요. 아 은혜 받았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하지만 말씀 앞에 정직한 공동체라 한다면 이런 말을 해야하지요. “그 말씀, 우리가 살기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베드로는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번째는 회개함으로 죄를 용서 받아라 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통해 우리가 해 나갈 진리실험입니다. “회개하면 새로운 삶을 약속하신다 그러니 죄를 회개하며 살아가보자요한 1서에 이렇게 말씀하시거든요. 누구든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주님은 믿을만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기회를 제공 받아 제대로 살아보는 것. 그게 가능한지를 보는 겁니다.
교회는 그렇게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공동체예요. 쉽지 않아요. 과녁을 빗나간 화살처럼, 우리는하나님의 뜻을 향해 살지 못합니다. 매일 매일 마음으로, 그리고 또 생각과 몸으로 죄를 짓습니다. 타락한 세대 가운데 의식 없이 살아가는 것만으로 죄 지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구제 불가능해 보이는 우리 가운데 온전한 삶, 새로운 삶을 약속하십니다. 깨끗하게 하리니 믿고 따라오라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을 믿기에 끝까지 해 보는 거예요. 예수 믿고 새 사람 되는 일. 그날, 그렇게 새로운 삶을 결단한 사람들이 3,000명이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실험은 그날에도 그리고 지금도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은 세례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보지요.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고요, 서로 사귀며 빵을 뗍니다. 여기까지는 ok. 그런데요, 그 다음 보세요.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대로 나누어 주었다. 우리 공동체가 진리 실험 공동체 이고, 성경대로 살아보는 것이 교회의 삶이라면, 이거 어떻게 하지요? 이 초대 교회의 급진적인 경제체제는, 사도행전 4장에 다시 한번 소개됩니다. 4 34절입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다가 사도들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그것들을 나누어 주었다. 이쯤 되면 아, 한목사가 조금 이상한 사람이구나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이단의 집단처럼 다 바치고 공동체 생활을 하자고 말하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여러분께 모든 소유를 바치라고 설교할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저 또한 그런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제게는 덜덜거리지만 두 대의 차가 있고요, 네 식구가 살기에 충분히 넓은 집이 있습니다. 아무리 착한 척 하려 해도 여전히 거리의 사람들과 제 삶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이 불편합니다. 이렇게 말해 버림으로 그 불편함이 해소될지 모르지만 또 말씀 앞에 앉으면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그렇지만 불편함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폐기 처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소중한 불편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도행전 2장이 쓰여지던 상황은 우리와 조금 다르지요. 이들은 당장 며칠 내로 주님의 재림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 세대가 끝나기 전에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 믿었기에 자신들의 소유를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지연된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일 먹을 양식과 자녀 교육을 위한 자산이 필요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번 설교 전에 말하듯이 우리 또한 종말론적 삶을 살고 있거든요. 다시 말하면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또 언제 이 삶이 단절될 지 모르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소유에 대해서 조금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 맞지요. 내 소유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도와야 하는 것, 함께 나누는 삶 가운데 누려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험해 보아야 합니다.

대한민국 전 국민 소득의 1/6 이 상위 1%에게 속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불평등수치가 OECD 2위거든요. 1위가 어딘줄 아세요? 바로 미국입니다. 우리는 이 어긋난 두 사회에 삶을 바탕하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의 모습을 기뻐하실까? 과연 이 두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저는 우리 안에 나눔과 섬김의 삶이 더욱 커지길 바랍니다. 완전하지는 못해도, 이 말씀을 폐기처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은 놀라운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우리의 성공한 진리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하늘 나라의 모습을 엿보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그것 하라고 교회를 세우셨으니, 그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가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 때문에 호감 되기를 소원합니다

칼럼. 시력이 어떠세요?

주보를 넉넉하게 찍어서 전도용으로 사용합니다. 지난 주에, 몇 분들에게 전달하였더니, ‘글자가 너무 작아요’ 하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눈이 점점 안 좋아진다’고 하시지요. - 그래서 이번 주에는 주보 글밥을 조금 줄이고 글자 크기를 조금 키웠습니다. - 당연한 말이지만 시력이 좋은 것은 큰 복입니다. 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력이 좋지 않아도 잘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시야를 가진 사람들 말입니다. 영적인 시력이라고 해서 ‘미래를 보는 신통력’이나 ‘말하기도 전에 알아차리는 관심술’을 얘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눈으로 누군가의 상황을 알아차리는 능력. 그것이 바로 영적 시력입니다. 그 눈이 하나님 닮은 눈이기 때문입니다.

 잘 보는 사람들, 영적인 시야를 확보한 이들의 눈에는 모임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보입니다. 자기를 아프게 하는 사람 속에 감추어진 상처가 보이고, 날이 추워지면 거리에서 밤을 지낼 사람들의 어려움이 보입니다. 먼 이웃 나라의 소식일지라도 분명 아파하고 있을 사람들의 눈물이 보이기도 하지요. 이제 막 새로운 도시에 도착해서 모르는 것도, 필요한 것도 많기만 한 이웃의 걱정은 말할 것도 없고요.

 맑은 눈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너무 크게 보여서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러셨거든요. 타인의 아픔을 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또 우리가 소중히 관리하고 길러나가야 하는 보물입니다.

그런 눈 갖기를 기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이곳 메디슨에서 어린 아이를 둔 엄마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이 가까이 있으면 아이를 잠깐 맡겨두고 쉴 수 있을 텐데,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엄마들은 그럴 수 없는 형편이지요. 그래서 이번 주부터 매주 화요일 아침에 엄마와 아가들을 위한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Nursery에 아가들 풀어 놓고 차라도 한잔 하시라고요 ;;^^

 요즘 한국에는 시력 좋아지는 운동이 인기라네요. 눈 마사지나 눈 운동이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영적인 시야도 마찬가지로 운동과 훈련을 통해 좋아질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영적 눈이 매일 매일 조금 씩 더 좋아지기를 소원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시리즈 설교 “왜”] 2/3 왜 교회인가 - 진리실험 공동체 (사도행전 2장 1절 - 4절, 37절-47절) - 2014년 9 월 14일

함께 예배드리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교회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왜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는 왜 예수님인가, 또는 왜 예수님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목마름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상의 어떤 근원적이고 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질문 말입니다. 그런 니고데모의 밤이 우리를 예수님께 이끌게 합니다. 그 문제가 예수님 앞에 놓아질 때, 그 분은 새로운 기회 그리고 영원한 생명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허락해 주십니다. 믿는 자들에게, 오직 은혜로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 참된 삶이 있다면 이제는 두 번째 질문을 물을 차례입니다. 그럼 왜 교회인가? 캔자스에서 미국 교회를 섬기던 시절입니다. 마을에 참 친절한 아저씨가 한 분 있었습니다. 이사 온 목사에게 계란도 가져다 주고 가끔은 교회 앞 잔디도 깎아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지는 않아요. 하루는 집 앞에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찾아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요. 제 영어가 짧고 표현이 서투르니까, 이것 저것 막 물어볼 수 있는 건 좋습니다.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나는 분명히 당신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친절을 본다. 그런데, 왜 예배에는 안 나오냐? 새로 온 목사 접니다 한테 무슨 문제가 있느냐? 그랬더니 한다는 대답이 이렇습니다. 그렇다. 나는 분명히 크리스찬이다. 그런데, 꼭 교회를 나가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오히려 사람들과의 관계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한다그 말을 하는 아저씨의 표정에서 무언가 교회로부터 큰 상처가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조목 조목 설명하고 그 분의 생각을 교정하려 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시군요 하고, 그래도 교회에 나와서 같이 예배하면 참 좋겠다 하고 헤어졌습니다. 제가 떠나올 때까지 그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분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꼭 교회까지 가야 하나, 그냥 성경 읽고 바르게 살면 되지. 게다가 이제는 한국인 중 19.4%, 말하자면 열명 중에 2명밖에 신뢰하지 않는 그 교회라는 집단에 꼭 속해야 하나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꼭 교회를 나가야 구원을 받는 거는 아니지 않느냐틀린 말이 아니지요. 한국에 처음 세워진 교회가 1887년도에 세워진 소래교회예요. 그럼 그 전에 태어나고 죽은 사람들은 다 구원받지 못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구원의 문제에 관련하여, 조금 신중히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조금씩 더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았다 라는 말 속에는 분명하게 내세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이렇게 편지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물론 우리는 죽어서 천국 갈 겁니다. 그런 차원의 구원을 믿음 가운데 확신하지요. 그러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이 참 크리스챤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만 있다면,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빨리 지금 죽지? 또 천국 가는 것으로의 구원만을 강조하면 이 땅의 문제와 아픔은 그냥 참아내야 하는 것, 개선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나쁜 신학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구원, 영원한 삶은 하늘나라에서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 Here and now 에서부터 누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삶을 실제적으로 살게 하는 공간,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들을 수 있고,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고, 그러한 삶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하루하루 더욱 완성하여 나가는 공간.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저는 이러한 교회의 삶을 진리 실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마하트마 간디 선생은 자신의 삶을 진리실험 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해 보는것그게 실험이잖아요. 그냥 읽고 보는 것 말고.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성경. 그것 대로 함께 살아 보는 것.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여러 실험을 통해, 삶을 통해 이루어 가는 것. 그 진리 실험이 바로 교회의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 더 붙여야 합니다. 이 진리실험은 언제나 공동 실험, 팀 프로젝트입니다. 왜 함께냐구요? 왜 그걸 혼자 하면 안되냐고요?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신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1. 교회를 통해 우리가 사랑을 연습하고요, (꼭 교회 뿐만 아니라 주께서 허락하신,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있는 모든 모임에서 그러합니다. 2. 그렇게 훈련된 사랑을 가지고 더 큰 사랑, 세상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함께 본문을 봅시다. 오늘 본문은 이 땅에 교회가 처음 생기는 장면을 이야기 해 줍니다. 2절 입니다. 홀연히,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이 위 하나씩 임하였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그러니까, 이미 수세기 동안 다른 나라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제자들이, 갈릴리 촌 사람들인데, 이들이 자기 나라의 말로, 그러니까 우리로 따지면 평택(제 고향입니다) 촌사람이 불어, 독어, 영어 이런 말로 유창하게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놀라워 했습니다. 오죽하면 술 취해서 저러는 거 아니야? 라고 물어볼 정도였겠습니까?

그러니까,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첫 놀라움은, 사람들이 자기 말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서로의 말이 자연스레 통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행해져야 하는 첫 번째 진리실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혼자서는 소통할 수 없지요. 소통의 기쁨, 내 마음이 전해지는 것, 말 통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우리는 소통의 위기 가운데 살아갑니다. 페이스북이나 카톡도 그리 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세상을 보면,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알아먹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듯 합니다교회는 서로의 이야기가 소통되기 위해 존재합니다. 특별히 서로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깊이 그리고 온전히 공유되기 위해 교회는 존재합니다.

이 오순절 방언의 기적을 구약의 대표적인 사건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인간들이 어느 날 하나님이 있는 곳에 닿기 위해 탑을 쌓거든요. 성경은 그 때 사람들의 언어가 하나였다고 말해줍니다. 그들에게 하늘에 이르고자 하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키시고 그들의 언어를 흩으십니다.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신데,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그 욕심 때문에, 그들의 언어는 혼란해 지고 사람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흩어진 언어들이, 여기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님의 일하심 가운데 교회의 탄생과 함께 서로 통하게됩니다.

교회가 시작될 때 성령님이 그 곳에서 강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에 나타난 기적은, 병이 고쳐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 이전에, 말이 통하는 역사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서로의 마음이 소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곧 사랑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보이게 되고, 그렇게 보고 듣게 되는 서로의 모습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여기까지 해야겠습니다. 다음 주에 사도행전 2장의 나머지 부분을 생각해 보지요.

예수님은 소통의 대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 스스로가 성령의 현존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사랑했기에 모두와 통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 분의 모범을 따르는 공동체 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경험들, 참된 삶을 향한 고민들이 깊이 소통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약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 안에 크게 들려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소통하는 연습,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나서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을 사랑합시다. 세상 속에 작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갈라진 곳에 화해의 다리가 되어 주고 결국엔 하나님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져 가는 이 세대를, 하나님과 그리고 그분의 진리와 소통하게 만듭시다. 그 꿈을 꿉니다. 왜 교회인가? 우리는 이곳에서 사랑과 진리가 소통되는 실험을 합니다. 함께 말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9월 7일 주일 예배 - 교회, 사랑의 공동체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한명준 목사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복된 제단에 귀한 말씀을 들려주시길 기대합니다. 특별히 새롭게 시작하는 메디슨 한인 연합 감리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로 아름답게 세워져 가길 기대합니다. 멀리서 기도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 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과연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을 분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본의 성인,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네 가지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은 자연을 통해 나타납니다. 여기 오니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네요. 하나님이 하신 일, 그분의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은 인류 역사를 통해 증거됩니다. 우리 가운데 하시는 일들. 국가, 사회 등 거창한 일로부터 한 개인의 역사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역사를 통해 자신의 뜻을 펼쳐보이십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다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 일 구석 구석마다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슴을 고백하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은 양심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일찍이 맹자 선생님도 양지양능이라하여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과 배우지 않아도 행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 하셨지요. 우리가 이 땅에 있기 전부터 부어진 은총. 바로 그것이 선행하는 양심입니다. 그 선한 일을 하려는 마음을 통해, 그 마음을 들여다 봄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를 말해야 하는데, 이건 위의 세 가지와 구별됩니다. 자연, 역사 그리고 양심을 통해 알게 되는 하나님의 뜻은 오해되고 곡해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서, 교회를 세상과 더욱 멀어지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적지 않게 알고 있지요. 때론 알 수 없는 자연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언지 몰라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양심... 얼마나 쉽게 타락하게 됩니까? 그래서 자연 역사 양심만을 보아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온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말씀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어볼까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세상과 우리를 향하신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의 법으로 살아갈 때에 갈등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던 삶이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두 가지로 이야기해 줍니다.
첫째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자격을 정하시고 그 기준을 넘는 자들을 품으신 것이 아닙니다. 금을 지우고 내려오셔서, 발아래에 계셔서 발을 닦아 주심으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가장 더러운 것을 품어 주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고 교회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상처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없는 사람이 없지요. 그걸 덮어주고 싸매주고 그러라고 주님께서 여기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런 교회가 되길, 그런 공동체가 되길, 그런 사람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둘째, 어떻게 사랑하는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먼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가까운 곳으로부터 시작하신 사랑입니다. 제자들, 당신께 나아온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이 여기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이지요. 사랑은 옆의 사람들, 여기 찾아 나아 온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섬기고 사랑하고 품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늘 사랑할 만한 사람만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목회하면서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제일 힘든 일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새벽마다 기도 주님 제게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멀리 있는 사람 사랑하는 건 쉽지요.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 바르게 사랑하는 일 참 힘들고 어렵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셔야, 그 분의 사랑으로 사랑하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한국은 오늘이 추석입니다. 오늘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교통체증일 것입니다. 하지만, 막혀도 즐거운 게 고향가는 길입니다. 멀어도 즐겁습니다. 고향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하늘고향 가는 길입니다. 막혀도 멀어도 즐겁습니다. 우리 인생은 기실 사랑하며 가는 복된 여행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또 다른 편지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바라기는 이 교회가 하나님 뜻을 분별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먼저 말씀에서 알게 된 하나님의 뜻 -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예수님처럼 사랑하라는 복되고 귀한 사명을 감당합시다. 그래서 그 말씀을 기준으로 자연도, 역사도, 양심도 모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렇게 우리에게 사랑을 말하면서 꼭 성령님의 일하심을 함께 증거합니다. 오늘 13장이 끝나고 이어지는 14장은 성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일서에도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이후에 그의 성령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완성이 바로 이 사랑인데, 그것은 성령님과 함께 함으로만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내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능력. 그 사랑으로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그런 사랑의 소식이 계속해서 전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리즈 설교 “왜”] 1/3 왜 예수님인가 – 니고데모의 밤 (요한복음 3장 1절 – 15절) - 2014년 8월 31일

미국나이로 세 살 반이 된 큰 딸 수진이는 요즘 궁금한 것이 무척 많습니다. 잘 대답해 주어야 아이가 똑똑해 진다는 걸 알고 있지만 쉼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모두 대답하기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대답하기 힘든 질문은 ‘왜 그래?’ 입니다. ‘저건 뭐야?’하는 질문엔 단답형으로 답할 수 있지만, 아빠 이건 왜 그래? 하고 물어오면, 그건 말이야... 하면서 이런 저런 말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수진이는 어른들은 물어보지 않을 만한 것 혹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왜’냐고 묻는 일에 선수입니다. 예를 들면 아빠 엄마는 왜 여자야? 이런 식입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런 질문이 계속 되다 보니 제게도 한가지 대처 방법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지”하고 같은 대답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이게 신기한 게, 거의 모든 질문에 답이 된답니다. ㅎ 엄마는 왜 여자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지. 하늘은 왜 파래?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는걸? what a nice answer 인지요~
그런데, 그렇게 몇 번을 넘겼더니 이 녀석이 아빠의 불성실(?)한 답변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한 질문을 더합니다. "왜 그럴까" 묻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지?" 하고 답하면, '그럼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 하는 겁니다.
딸이라면, 아들이라면 아버지 마음을 알아야 하지요. 왜 우리를 이곳 메디슨에 살게 하시는지, 왜 파란 하늘로 우리 마음을 달래주시는지, 왜 생명 주셨는지... 아버지 뜻을 알아야 좋은 자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깊은 뜻을 다 알진 못하여도, 나를 향한 그 분의 뜻 알아, 최선을 다해 그 뜻대로 살아드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새 교회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워졌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수진이의 질문처럼, 왜 세우셨는지... 그 뜻을 알고 그 물음에 답변하는 일은 우리에게 남겨진 몫입니다. 그래서 첫 예배부터 3주 동안 '' 라는 시리즈 설교를 준비합니다. 1. 왜 예수님인가? 2. (꼭 예수님이어야 한다면) 왜 교회인가? 3. (교회가 필요하다면) 왜 이 교회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려 합니다. 그 첫번째 질문, 왜 예수님인가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니고데모의 밤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신기한 기적들을 펼쳐 보이실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의 기득권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예수께서 자신들의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고, 그를 잡아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 때, 그들 무리 중 한 사람, 이스라엘 최고의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이었던 한 사람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의 율법이 언제부터 사람 말을 듣기도 전에 그를 심판하고 죄인 취급해 왔습니까?" 요한복음 7 51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편에서 이야기 한 것이지요. 모든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죄인 취급할 때, 이 사람은 예수님의 편에서 변론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왜 이런 말을 하게 된 걸까요? 그 사람은 예수라는 이 젊은 선생을 만나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시간은 한밤중이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놀라운 이적을 보이시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다고 하여도 그 분은 아직 나사렛 출신의 목수 아들일 뿐입니다. 그에 비해 니고데모는 다른 신분의 사람이지요. 요한은 그를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많은 성서학자들이 그가 유대인들의 최고 자치 의결기구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전 장인 2 23절에는 유월절에 예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 없이 니고데모와의 만남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유월절 즈음 벌어진 이야기겠지요.
그러니까, 어느 봄날 밤. 아직은 차가운 밤 공기가 평화의 도시 - 예루살렘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 시간에 한 명의 건장한 남자가 어딘가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싶어서였을까요? 아니면 밤새 자기를 사로 잡고 있는 고민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지금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었을까요? 그의 발걸음에는 어떤 긴장감과 기대감이 섞여 있는 듯 합니다. 으레 지도자라 하는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좋은 옷을 입고 있었겠지요. 으레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성경에 대해, 율법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겠지요.
그런 니고데모.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사람 "니고데모"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밤길을 헤치고 바쁘게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그가 찾아간 사람은, 좋은 옷을 입지도 않았고, 좋기는커녕 머리 대고 편히 누워 잘 집 한 채 가지지 않은 사람. 그리고 저 시골 나사렛 출신의 청년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그 분을 처음 만난 순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그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첫 마디입니다. 랍비여. 선생님이시여. 이제껏 그 호칭은 주로 니고데모 자신이 사람들에게 받아오던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진심에서 그 말을 했는지, 아니면 니고데모가 가지고 있던 권력의 힘에 덕을 보려고 그 말을 입에 달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자신을 랍비라고 불러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랍비가 예수님을 향해 랍비여 하고 말합니다.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높으신 양반이 한밤 중에 찾아와 랍비라는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했으면, 예수님께서는 그 혜안을 칭찬하시고, 그가 원하는 깊은 가르침을 내려 주실만도 합니다.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그 봄날 밤을 달려온 니고데모는 아직 한마디 예수님께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막 자신의 처소에 도착한 니고데모의 눈 속에서 참된 삶,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을 보신 듯 합니다. 그리고 이 두 남자의 대화는 계속 됩니다. 참 아름다운 니고데모의 밤입니다.

우린 모두 니고데모의 밤을 경험합니다. 잠 못드는 밤. 누군가 내 마음의 텅 빈 공간을 채워줄 그 랍비- 선생님이 필요한 그 밤 말입니다. 겉에서 보기엔 모두들 괜찮은 삶을 사는 듯 합니다. 그럭저럭 탄탄한 삶의 기반이 있고요, 꿈도 있고요. 또 성경에 대해서도 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 모두는 풀리지 않는 궁극적인 삶의 문제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건강의 문제나 경제적인 염려처럼 이름 붙일 수 있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그저 그 어떤 어려움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보다 깊은 아픔과 아위움이 있습니다. , 어떻게 하면 진짜 참되게 사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 깊은 의미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항상 간직합니다. 모두가 공유하는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 또한 우리의 문제 중에 문제입니다.  

이곳 메디슨이 참 아름답습니다. 온지 두달 되었는데요, 가장 좋은 건 어느 날 저녁이면 벌써부터 가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 아름답지요.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다 보면 참 마음이 좋다가, 갑자기 마음이 허 해지는 것을 느껴요. 아이들도 너무 사랑스럽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도 때론 공허함이 찾아 듭니다. 이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란 세상보다 더 크게 지어졌거든요. 그러기에 세상 것으로는 영혼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니고데모의 밤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밤이 찾아 옵니다. 그리고 그 깊은 밤에 예수님은 우리를 홀로 만나주십니다. 영혼의 아픔이 커질 때,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을 독대할 만한 시간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조금 더 들어 보지요.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니고데모는 알아 듣지 못합니다. 어떻게 엄마 배 속으로 다 큰 어른이 다시 들어갑니까? 하고 반문하지요. 그러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몸이 새로 태어나는 것 말고, 물과 성령으로 즉 우리의 죄를 씻고,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9절에 보면 니고데모는 못 알아 듣습니다. 예수님은 급기야 니고데모를 향해서 12절에 땅의 것을 말하여도 네가 믿지 못하는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냐고 나무라시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예수님의 책망 속에서 사랑의 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선택하시어 거듭남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14절의 말씀, 바로 놋뱀의 비유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로부터 나와 가나안을 향하던 중 그들에게 마실 물과 먹을 것이 부족하여 급기야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됩니다. 출애굽의 시작부터 광야의 시절 동안 내내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때를 따라 만나와 매추라기로 먹이셨으며 보호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또 그 사랑을 잊고 원망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백성들을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백성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어 달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놋 뱀을 '바라보는 자' 들은 죽음을 면하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혹시나 이 이야기가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기는 한데, 처음 듣는 이야기다라고 생각되는 분이 있으시다면, 민수기 21장을 찾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는 분명 이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을 모세의 놋뱀에 비유하심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복음을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신세라는 것이지요.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언제나 죄의 문제가 있어서 놋뱀이 없이는, 하나님의 도우심.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이는 우리 삶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인가?” 예수 없이는 니고데모의 밤을 헤쳐나올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없이는 우리 삶의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고요, 예수 없이는 거듭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창조 때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죄로 인해 죽음을 직면하고 있는 우리의 존재가 치유되지도 변화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려고 놋뱀처럼 들려질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목말라 있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 자신의 생명과 부활에 연관된 이 진리를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다른 것 아닌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놋뱀처럼 높게 들려질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깨닫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그 아름다운 구절 요한복음 3 16절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나 사랑하였다. 그래서 독생자까지도 주셨으니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를 믿는 자들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가 왜 필요하냐구요? 그 분만이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것을, 사람이 좀 더 착해지고 선하게 되는 것, 곧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의 발전과 동일시 합니다. 또 교회 생활을 하면서 술이나 담배 같은 좋지 못한 습관 몇 가지 고치면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조금 착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철저히 변화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바로 이 철저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생각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 존재가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없었던 니고데모의 밤이 고민과 불면의 연속이었다면 예수님을 무릎 앞에 두고 그와 대화하는 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의 밤입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볼까요? 요한은 니고데모의 반응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21절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로 그냥 끝이 납니다. 카톨릭에서는 니고데모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 놓고 있지요. 니고데모는 사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날 밤. 니고데모의 밤에 그가 어떤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지 않습니다. 뚝 하고 끊겨버린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 합니다. 니고데모는 어떻게 말했을까? 그럼 당신은 어떻게 말하려는가

새벽 공기를 맞으며 니고데모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 듣고 다시 각자의 삶터로 돌아갑니다. 우리 앞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생을 허락하고자 모세의 놋뱀처럼 올려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것인 것, 아니면 여전히 근심과 괴로움 속에 다시 그 지난한 삶을 계속할 것인지. 그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니고데모의 밤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