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설교 “왜”] 1/3 왜 예수님인가 – 니고데모의 밤 (요한복음 3장 1절 – 15절) - 2014년 8월 31일

미국나이로 세 살 반이 된 큰 딸 수진이는 요즘 궁금한 것이 무척 많습니다. 잘 대답해 주어야 아이가 똑똑해 진다는 걸 알고 있지만 쉼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모두 대답하기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대답하기 힘든 질문은 ‘왜 그래?’ 입니다. ‘저건 뭐야?’하는 질문엔 단답형으로 답할 수 있지만, 아빠 이건 왜 그래? 하고 물어오면, 그건 말이야... 하면서 이런 저런 말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수진이는 어른들은 물어보지 않을 만한 것 혹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왜’냐고 묻는 일에 선수입니다. 예를 들면 아빠 엄마는 왜 여자야? 이런 식입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런 질문이 계속 되다 보니 제게도 한가지 대처 방법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지”하고 같은 대답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이게 신기한 게, 거의 모든 질문에 답이 된답니다. ㅎ 엄마는 왜 여자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지. 하늘은 왜 파래?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는걸? what a nice answer 인지요~
그런데, 그렇게 몇 번을 넘겼더니 이 녀석이 아빠의 불성실(?)한 답변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한 질문을 더합니다. "왜 그럴까" 묻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지?" 하고 답하면, '그럼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 하는 겁니다.
딸이라면, 아들이라면 아버지 마음을 알아야 하지요. 왜 우리를 이곳 메디슨에 살게 하시는지, 왜 파란 하늘로 우리 마음을 달래주시는지, 왜 생명 주셨는지... 아버지 뜻을 알아야 좋은 자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깊은 뜻을 다 알진 못하여도, 나를 향한 그 분의 뜻 알아, 최선을 다해 그 뜻대로 살아드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새 교회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워졌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수진이의 질문처럼, 왜 세우셨는지... 그 뜻을 알고 그 물음에 답변하는 일은 우리에게 남겨진 몫입니다. 그래서 첫 예배부터 3주 동안 '' 라는 시리즈 설교를 준비합니다. 1. 왜 예수님인가? 2. (꼭 예수님이어야 한다면) 왜 교회인가? 3. (교회가 필요하다면) 왜 이 교회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려 합니다. 그 첫번째 질문, 왜 예수님인가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니고데모의 밤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신기한 기적들을 펼쳐 보이실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의 기득권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예수께서 자신들의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고, 그를 잡아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 때, 그들 무리 중 한 사람, 이스라엘 최고의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이었던 한 사람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의 율법이 언제부터 사람 말을 듣기도 전에 그를 심판하고 죄인 취급해 왔습니까?" 요한복음 7 51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편에서 이야기 한 것이지요. 모든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죄인 취급할 때, 이 사람은 예수님의 편에서 변론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왜 이런 말을 하게 된 걸까요? 그 사람은 예수라는 이 젊은 선생을 만나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시간은 한밤중이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놀라운 이적을 보이시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다고 하여도 그 분은 아직 나사렛 출신의 목수 아들일 뿐입니다. 그에 비해 니고데모는 다른 신분의 사람이지요. 요한은 그를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많은 성서학자들이 그가 유대인들의 최고 자치 의결기구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전 장인 2 23절에는 유월절에 예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 없이 니고데모와의 만남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유월절 즈음 벌어진 이야기겠지요.
그러니까, 어느 봄날 밤. 아직은 차가운 밤 공기가 평화의 도시 - 예루살렘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 시간에 한 명의 건장한 남자가 어딘가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싶어서였을까요? 아니면 밤새 자기를 사로 잡고 있는 고민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지금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었을까요? 그의 발걸음에는 어떤 긴장감과 기대감이 섞여 있는 듯 합니다. 으레 지도자라 하는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좋은 옷을 입고 있었겠지요. 으레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성경에 대해, 율법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겠지요.
그런 니고데모.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사람 "니고데모"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밤길을 헤치고 바쁘게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그가 찾아간 사람은, 좋은 옷을 입지도 않았고, 좋기는커녕 머리 대고 편히 누워 잘 집 한 채 가지지 않은 사람. 그리고 저 시골 나사렛 출신의 청년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그 분을 처음 만난 순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그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첫 마디입니다. 랍비여. 선생님이시여. 이제껏 그 호칭은 주로 니고데모 자신이 사람들에게 받아오던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진심에서 그 말을 했는지, 아니면 니고데모가 가지고 있던 권력의 힘에 덕을 보려고 그 말을 입에 달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자신을 랍비라고 불러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랍비가 예수님을 향해 랍비여 하고 말합니다.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높으신 양반이 한밤 중에 찾아와 랍비라는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했으면, 예수님께서는 그 혜안을 칭찬하시고, 그가 원하는 깊은 가르침을 내려 주실만도 합니다.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그 봄날 밤을 달려온 니고데모는 아직 한마디 예수님께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막 자신의 처소에 도착한 니고데모의 눈 속에서 참된 삶,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을 보신 듯 합니다. 그리고 이 두 남자의 대화는 계속 됩니다. 참 아름다운 니고데모의 밤입니다.

우린 모두 니고데모의 밤을 경험합니다. 잠 못드는 밤. 누군가 내 마음의 텅 빈 공간을 채워줄 그 랍비- 선생님이 필요한 그 밤 말입니다. 겉에서 보기엔 모두들 괜찮은 삶을 사는 듯 합니다. 그럭저럭 탄탄한 삶의 기반이 있고요, 꿈도 있고요. 또 성경에 대해서도 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 모두는 풀리지 않는 궁극적인 삶의 문제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건강의 문제나 경제적인 염려처럼 이름 붙일 수 있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그저 그 어떤 어려움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보다 깊은 아픔과 아위움이 있습니다. , 어떻게 하면 진짜 참되게 사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 깊은 의미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항상 간직합니다. 모두가 공유하는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 또한 우리의 문제 중에 문제입니다.  

이곳 메디슨이 참 아름답습니다. 온지 두달 되었는데요, 가장 좋은 건 어느 날 저녁이면 벌써부터 가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 아름답지요.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다 보면 참 마음이 좋다가, 갑자기 마음이 허 해지는 것을 느껴요. 아이들도 너무 사랑스럽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도 때론 공허함이 찾아 듭니다. 이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란 세상보다 더 크게 지어졌거든요. 그러기에 세상 것으로는 영혼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니고데모의 밤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밤이 찾아 옵니다. 그리고 그 깊은 밤에 예수님은 우리를 홀로 만나주십니다. 영혼의 아픔이 커질 때,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을 독대할 만한 시간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조금 더 들어 보지요.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니고데모는 알아 듣지 못합니다. 어떻게 엄마 배 속으로 다 큰 어른이 다시 들어갑니까? 하고 반문하지요. 그러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몸이 새로 태어나는 것 말고, 물과 성령으로 즉 우리의 죄를 씻고,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9절에 보면 니고데모는 못 알아 듣습니다. 예수님은 급기야 니고데모를 향해서 12절에 땅의 것을 말하여도 네가 믿지 못하는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냐고 나무라시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예수님의 책망 속에서 사랑의 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선택하시어 거듭남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14절의 말씀, 바로 놋뱀의 비유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로부터 나와 가나안을 향하던 중 그들에게 마실 물과 먹을 것이 부족하여 급기야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됩니다. 출애굽의 시작부터 광야의 시절 동안 내내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때를 따라 만나와 매추라기로 먹이셨으며 보호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또 그 사랑을 잊고 원망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백성들을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백성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어 달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놋 뱀을 '바라보는 자' 들은 죽음을 면하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혹시나 이 이야기가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기는 한데, 처음 듣는 이야기다라고 생각되는 분이 있으시다면, 민수기 21장을 찾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는 분명 이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을 모세의 놋뱀에 비유하심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복음을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신세라는 것이지요.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언제나 죄의 문제가 있어서 놋뱀이 없이는, 하나님의 도우심.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이는 우리 삶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인가?” 예수 없이는 니고데모의 밤을 헤쳐나올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없이는 우리 삶의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고요, 예수 없이는 거듭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창조 때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죄로 인해 죽음을 직면하고 있는 우리의 존재가 치유되지도 변화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려고 놋뱀처럼 들려질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목말라 있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 자신의 생명과 부활에 연관된 이 진리를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다른 것 아닌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놋뱀처럼 높게 들려질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깨닫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그 아름다운 구절 요한복음 3 16절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나 사랑하였다. 그래서 독생자까지도 주셨으니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를 믿는 자들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가 왜 필요하냐구요? 그 분만이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것을, 사람이 좀 더 착해지고 선하게 되는 것, 곧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의 발전과 동일시 합니다. 또 교회 생활을 하면서 술이나 담배 같은 좋지 못한 습관 몇 가지 고치면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조금 착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철저히 변화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바로 이 철저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생각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 존재가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없었던 니고데모의 밤이 고민과 불면의 연속이었다면 예수님을 무릎 앞에 두고 그와 대화하는 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의 밤입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볼까요? 요한은 니고데모의 반응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21절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로 그냥 끝이 납니다. 카톨릭에서는 니고데모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 놓고 있지요. 니고데모는 사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날 밤. 니고데모의 밤에 그가 어떤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지 않습니다. 뚝 하고 끊겨버린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 합니다. 니고데모는 어떻게 말했을까? 그럼 당신은 어떻게 말하려는가

새벽 공기를 맞으며 니고데모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 듣고 다시 각자의 삶터로 돌아갑니다. 우리 앞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생을 허락하고자 모세의 놋뱀처럼 올려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것인 것, 아니면 여전히 근심과 괴로움 속에 다시 그 지난한 삶을 계속할 것인지. 그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니고데모의 밤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