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대 위에 선 신앙 6. 전도 전투적 배타주의와 무책임한 배려 사이에서 (마태복음 28장 18절 - 20절) - 2015년 7월 12일

  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균형 잡힌 신앙을 위한 훈련 -  평균대 위에 선 신앙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은 전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전도에 대하여 크리스챤이 고백해야할 첫번째 말은우리는 모든 민족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부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순종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130년 전, 이 땅에 살던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사람들은 바로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온 생을 던져 이국 땅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누리고 있는 신앙은 바로 그들의 헌신으로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좋으신 예수님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이 공동체 또한 전도의 결과물입니다. 작년 9, 첫 예배 때 네명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 현실적으로 예배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분들이 두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고, 오랜만에 다시 신앙을 회복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누군가 그들을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전도라는 말은 도를 전한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누군가의 인생길을 바꾸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라는 말은 사실 매우 부담스럽고 엄청난 부탁입니다. 전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한국에서 제가 공부한 신학교에는 졸업 전에 전도학이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전도 실습을 해야 패스할 수 있습니다. 조를 짜서 시장에 나갔지요. 하지만 이미 매학기 전도학 실습을 나오는 신학생들을 만나오신 시장 주민들은 우리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일은 그 분들의 장사를 도와 드리고 그저 앉아 있다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맨손으로 찾아가기가 뭐해서 요쿠르트를 준비해 갔지요. 그 때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전도 용품은 중요하지 않다. 요쿠르트로 누군가의 영혼을 살 생각을 하지 말아라.’
  
  이런 광고 기억하십니까? “순간의 선택 10년을 좌우합니다전자제품이나 자동차의 선택은 10년 간답니다. 야구팀은 한번 잘못 고르면 평생 갑니다. 그런데, 종교는 이 세상에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죽음을 넘어서 영혼에 관한 일이 바로 신앙과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요구르트 하나로 누군가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겠지요.  전도는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폭발적 전도의 성과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이 전도 때문에 오히려 욕을 먹기도 합니다. 교회 밖 사람들은 우리를 때론 공격적이라고 말합니다. 배타적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안에 전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 영혼을 살리는 일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바심만을 가지고, 열정만을 가지고는 쉽게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것만 같습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의 위상이 많이 떨어져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번 주간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인 2014 7 10일에 노컷뉴스에 기사가 하나 떴습니다. 인도의 성지인 부다가야 마호보디 사원에서 찬양을 하고 통성 기도를 하는 청년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게 전도인가요? 이렇게 해서 한 영혼이라도 우리의 신앙에 관심을 갖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혹시 모르겠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용기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요. 하지만 그 용기가 얼마나 많은 선교의 기회를 닫았는지 모릅니다. 이런 모습과, 이들의 행위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교회들 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는지 모릅니다.
   신학교 시절의 일입니다.  진짜 피곤해서 지하철에 탔는데, 노방전도를 하시는 분이 열차에 오르셨습니다. 저는 그 분들의 열정을 존경합니다. 복음으로 초대하고 금방 다른 칸으로 가시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거친 목소리로 계속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시끄러워 하고 불편해 했는데, 더 큰 문제는 그 분이 전하시는 말씀의 내용이었습니다. 예수 천당 보다는 불신 지옥을 훨씬 더 강조하셨습니다. 성경의 구절로 사람들을 협박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이솝이 지은 동화를 알고 계시지요. 바람과 햇볕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시합을 합니다. 세게 부는 바람은 누구의 옷도 벗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앞에서는 더 굳게 옷을 여밀 뿐입니다. 따뜻한 사랑만이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힘이 없으셔서 바람을 불게하지 않으십니까?

  전도는 매우 중요하고 또 어려운 일이라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래서 전도는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땅끝까지 제자의 삶을 보여 주는 일은 성령을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전도자의 모습에는 언제나 성령이 드러나야 합니다. 기쁨과 평화, 온유와 선함 같은 성령의 열매 없이, 우리는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수 없습니다.

  종말에 대한 조급증을 가지고 전투적인 방힉으로 전도행위에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쉬운 잘못은 상대를 대상화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이 누군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나를 통해 니가 교회를 가는 것 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름과 삶의 상황, 그가 처한 어려움을 묻기도 전에 불신지옥을 먼저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슨 병이 있는지, 왜 울고 있는지를 먼저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만병통치약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아픔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약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사라고 하면 짜증만 납니다.

   이렇게 배타적이고 기계적인 - 혹은 전투적인 -  전도방식이 하나의 낭떠러지라고 하면, 또 하나의 낭떠러지는 배려라고 이름붙여진 무책임함, 혹은 사랑하지 않음입니다.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에서 배려는 항상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 사는 기쁨이 너무나 좋은 사람들은 예수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머니속에 송곳처럼 어떻게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전체 교회의 신도는 감소세를 보인지가 십년이 넘었고, 특별히 젊은 세대 가운데 평판도 그리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복음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한 예수님은 당신의 삶도 구원할 것입니다.
  왜 전도 하나요? 몇 명을  전도하면 천국 가고, 거기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그런 건 없습니다. 천국이 무슨 다단계 회사가 아니기 때문이 그렇습니다. 왜 전도 해야 합니까? 전도의 유일한 이유는,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땅끝까지 가서 예수의 제자를 삼으라고 하는 명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 명령의 또 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리는 이 복음의 기쁨, 구원 받은 자로서 누리는 질적으로 다른 삶의 만족감이 바로 당신에게도 경험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나의 예수님을 그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습니다. 돈이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해 주고 싶지만 그런 것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을 주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복음을 전합니다.

전도는 복음에 대한 확신, 그리고 당신에 대한 사랑. 이 두 가지의 결합입니다. 이 두 가지가 마음 깊이 자리하고 있을 때 우리는 몰상식하게, 전투적으로 누군가를 전도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배려한다는 핑계로 전도를 게을리 하는 잘못을 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도를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그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거나...둘 중의 하나 이거나 둘 다 이거나 할 확률이 높습니다


지혜롭고 열정적인 전도자가 되어, 예수님의 부탁을 최선을 다해 들어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