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예배하는 일이 기쁨입니다. 오늘은 평균대 위에 선 신앙, 다섯번째 시간으로 전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전통은 ‘어떤 집단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 관습, 행동 양식 등’을 말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전통이라 할 때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거나 중요하게 언급되지는 않지만, 신앙 공동체 가운데 오래도록 지켜져 내려온 일이나 생각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라 혹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전통이기 보다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르침을 지키려고 우리가 행동양식을 만들어 내고 지키지요. 기도의 전통으로 한국교회에는 아름다운 새벽 기도의 전통이 있습니다. 금주나 흡연 또한 성경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독주를 금하고,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받은 아름답고 바람직한 전통입니다. 또 이보다 더 눈에 띄지 않는 전통들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깨끗한 옷을 입거나 바르게 앉는 전통. 먼저 기도로 예배를 준비하는 전통. 우리 교회에서는 성경 봉독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해오던 것’ 속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익숙한 것이 주는 유익입니다. 그런데, 때론 해 오던 것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또 고쳐야 하나 고민해 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온고와 지신 사이에서 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옛것을 익히고 - 다시 말해 전통을 존중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배워 간다는 동양의 가르침입니다. 이 “온고이지신”은 공자의 위정편에 나오는 말로 이렇게 함으로 스승이 될 수 있다 (가이위사의) 는 뜻입니다. 전통의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살아갈 새로운 방식들을 알아간다는 말은, 세대간의 첨예한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가르침을 줍니다. 저는, 예수님 그 분이 옛 것의 아름다움은 지키시면서도 항상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셨던, 온전한 균형의 존재였다고 믿습니다.
오래도록 지켜온 신앙의 전통에 대한 성찰은, 진지하게 신앙인의 삶을 살려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과정입니다. 하라니까, 해 왔으니까 계속 하다보면, 잘 할수도 없고, 해 봐야 별 의미도 없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왜 새벽기도를 생각해 보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는 한국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도 새벽에 기도하셨고, 하루를 기도로 열 때, 우리의 일상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새벽기도를 하면 밤에 다른 일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새벽기도의 이유와 유익을 알지 못한 채, 그저 해 오던 대로, 남들 하니까 하면서 전통을 따라가다 보면 가장 먼저, 힘이 듭니다. 신앙 생활이 무척 수고스럽게 느껴지지요. 거기서 그치면 괜찮습니다. 그러다보면 또 의미를 찾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주 종종, 의미를 상실한 전통이 쉽게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전통을 지키고 거기서 의미를 얻으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일이지만, 따라하는 행위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새벽기도 안 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의미를 상실한 전통이 자기를 의롭게 여기게 하는 도구가 되고, 관계를 해치는 칼날이 됩니다.
전통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때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악습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지혜롭고 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악한 구습을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관습이 있었거든요. 성전에서 제사에 쓰이는 동물들을 판매하는 것이 그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은 여행자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생겨난 일이었습니다. 먼 길을 여행하여 성전에 도착하는 순례자들을 위해서 성전 주변에서 동물을 팔기 시작하였는데, 그 일이 결국 성전에 속한 지도자들의 배를 부르게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 장사가 ‘전통’ 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었습니다. 주께서 그 일에 대하여 화를 내셨습니다.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 연못가에 38년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전통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전통이 먼저인지 생명을 살리는 일이 먼저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구습이 아니라 생명을 택하세요.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만 여겨서 성경을 피해가야할 법망 정도로 생각하던 사람들의 오래된 생각을 파괴하셨습니다. 때론 매우 과격한 방법으로 그리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고, 그들의 발을 씻기기도 하셨습니다. 진리 앞에서 의미를 상실한 전통들은 무너졌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예수님의 정신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무어라 부르냐면 개신교인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protestant - 저항자들입니다. 1500년동안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되풀이 되던 악습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성직자들의 힘이 계속하여 커지고, 성전 짖는 일에 돈을 마련하려고 성경에도 없는 가르침들이 강요되었습니다. 전통이 너무나 강조되어서 생명은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어 가는데, 교회의 십자가는 더욱 더 높아져만 갔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은 그 일을 참지 못했지요. 그들은 저항protest 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청년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은 좋은 것, 오래된 것을 좋은 것이라 아니하시고, 진리를 좋은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전통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미움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에는 의미있는 말씀이 남겨져 있습니다.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그것들을 완성하려 한다’
예수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저항정신,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는 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옛것을 폐하지 않고 완성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옛것을 파한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지혜롭게 악한 구습과 아름다운 전통을 구분하고 율법과 선지자의 뜻이 완성될 수 있도록 옛 가르침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전통을 지키는 방식으로 우리는 오늘 성찬을 나누고자 합니다. 참 오래된 전통입니다. 그런데, 이 전통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20대 중반까지 저는 성찬을 매우 형식적인 행위라 생각해 왔습니다. 차라리 성찬보다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토론을 하는 일이 더 의미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2003년도의 어떤 한 성찬의 경험을 통해 전통이 갖는 힘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소중히 간직된 전통이 그 깊은 의미를 드러내자, 그 놀라운 은혜에 압도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존 웨슬레는 성찬을 가장 대표적인 은혜의 수단으로 여깁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번 둘러 봅시다. 죽어 있는 전통, 아니면 나쁜 전통들은 걷어내 버립시다.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하고, 특별히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이 기준이 되어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소금과 빛으로 살게 하는 전통,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전통.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율법이 완성되는 전통은 끝까지, 소중히 지켜나갑시다. 여러분 모두를 그 아름다운 전통의 의례, 거룩한 식탁으로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