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예배함이 큰 기쁨입니다. 오늘은 평균대 위에 선 신앙 마지막 설교 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 그리고 교회에서 참 많이도 쓰이는 말, ‘구원’ 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성경에 구원이라고 번역된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는 페레타(탈출 시키다) 혹은 여호수아나 호세아라는 말이 구원의 뜻을 같습니다. 신약 성서에는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된 ‘소테리아’ 가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여러분에게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의 말로 구원을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사실, ‘구원’ 이라는 말은 교회에서만 사용되는 특수한 용어 같기도 합니다. 교회 밖에서 쓰이는 경우를 저는 하나만 알고 있습니다. 바로 ‘구원투수’ 입니다. 구원투수는 선발의 힘이 떨어졌을 때 등판합니다. 지금의 상태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구원은 그럴 때 필요합니다.
구원에 대한 성서의 이미지는 ‘건져냄’ 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는 인생을 건져내는 것. 김광석의 노래, ‘일어나’의 가사처럼 부초처럼 강물 위를 흐르는 것 같은 인생이 고요한 호수가에서 물과 함께 썩기 전에 건져내는 일이 바로 구원입니다. 물에서 건져냄의 히브리 말은 모우세 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물에서 건져진 아이였고, 그를 통해 하나님은 애굽으로부터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을 건져내셨습니다. 물에 떠내려가는 바구니. 누군가 건져주지 않으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구원의 절실함은 우리의 자기 인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렇게 구원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고달파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 폭풍우를 지나가다 옆에 길을 걷던 친구가 번개에 맞아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이란 이렇게 가볍고 무상한 것임을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사제가 되기로 서원을 합니다. 광부의 아들로 법률가가 되는 공부를 했던 이 사람은 자기 삶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무상한 인생에서 건져지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죽음과 삶의 무상함을 이기고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진리를 누리기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경건한 삶을 추구하던 그에게 종교적 시련이 찾아 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는 중입니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기에 옳지 않은 것과는 어울릴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보니 영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수도원에 있었던 그가 우리보다 더 타락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걱정을 할 만큼 자신의 죄를 사죄하기 위해 금식을 하기도 했고, 주임 신부가 귀찮아 할 정도로 고해 성사를 반복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없다고 여겨 졌습니다. 그의 고민은 이런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인정되려면 죄를 처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반면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면 자기는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수많은 밤을 고민하던 마틴 루터에게 로마서의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엄청난 희망으로 말입니다. 그는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장 16,17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의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랑의 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하는 근거가 됩니다. 로마서 말씀을 통해 전해진,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으로 보여진 하나님의 의란 우리를 심판하시려는 의가 아니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 입니다. 그 은혜의 칭의 없이, 우리는 의로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분의 주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 주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찾아와 불러 주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분.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그 어느 것보다도 큽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 은혜를 믿는 것. 구원의 손길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죽어서 하나님 나라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곳으로부터 시작하는 하나님과의 동행. 그것이 바로 구원의 건전한 이해입니다. 구원의 기쁨은 죽는 순간까지 유보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곳으로부터 천국의 삶, 하나님의 다스림은 시작됩니다.
그러기에 루터를 중심으로 모든 개신교인들은 이야기 합니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는 정말 소중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말이 항상 충분한 진리를 담아낼 수는 없는 법인가 봅니다. 이 말은 행위가 그 자체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겸손의 표현인데, 마치 행위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자주 오해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맞지요) 맘 착해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맞는데요…) 뜻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맘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 입니다. 맘 착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아서 맘 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롭게 여겨짐 - 칭의는 사실, 구원의 한 축일 뿐입니다. 다른 한 축을 우리는 성화 – 거룩해 짐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칭의 혹은 의인화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면 성화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성화의 과정이 무시된 구원은 우리의 믿음을 값싼 것으로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존 웨슬리 목사님은 칭의를 구원의 현관porch 라고 비유합니다. 현관을 지났으면 성화의 은총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그 분의 다스림이 온전해 져야 합니다. 건져졌으면 건져내진 사람 답게 살아야 한다.
야고보는 칭의를 강조하다가 성화의 중요함을 잃은 사람들, 균형을 잃은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약 2:17)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다. 그런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바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입니다. 바로 위의 절입니다. “만일 형제가 필요한 것이 있는데,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으면…” 몇 주 전에 성경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모든 성경의 말씀은 예수님의 삶을 기준으로 이해 되는 것이 안전하다고 말씀드렸지요. 예수님도 같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헐벗고 굶주린 자를 돌보지 않는 것은 나를 돌보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돌보지 않으면 관계가 없지요. 구원이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작은 자들, 헐벗은 자들을 돌보지 않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소원한 것입니다 구원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건져주시는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 은혜로운 사랑을 믿기만 할 뿐입니다. 그리고 의롭게 여겨져서 구원의 현관에 들어섰다면 매일 매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께 우리 삶을 맞긴 채 구원의 길, 하나님과 더욱 깊어지는 관계의 여정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가운데 작고 약한 이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