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예배하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오늘은 평균대 위에 선 신앙, 네번째 시간으로, ‘성경’ 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말씀도 여러분이 편안하게
들으실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따뜻해지기 보다는 머리가 무거워지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생각’ 해야 하는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저는 참 신앙을 갖는 과정에서 이러한 ‘고민’의 시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균형 잡힌 신앙인이
될 수 있고, 그래야 교회 밖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신영복은
나침반이 북쪽을 가리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고 말합니다. 유한한 존재로서 절대자, 절대 진리를 마주하는 신앙의 행위는 어쩌면 나침반의 떨림과 같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굳건한 신앙도 좋지만, 흔들려 보아야 무엇이
결국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인지, 발 딛고 설 수 있는 바탕인지 알게 됩니다. 나침반의 진폭이 아무리 클지라도 진리를 중심에 두고 흔들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국 이 고민의 시기를 통하여
더 온전한 신앙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자 함께 흔들릴 준비가 되셨습니까?
오늘의 주제는 성경- 어떻게 볼 것인가? 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 더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이 쉽사리 결론 나지 않는 고민을 갖기 마련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두 부류의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 성경을
읽다가 자연스럽고 건전한 여러 질문들을 해 본 사람들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 인데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성경의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 때문에
이 소중한 책 전체를 폐기 처분하지 않고, 결국 성경을 신앙 생활의 중심에 다시 두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염두해 둔 다른 한 부류의 사람은 성경이 그냥 다 믿어지는 사람들, 성경에 대하여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러면 더 위험한 것인데, (이 설교를 통해 왜 그런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이 설교를 통해 성경 읽기에 어려움을 갖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얻어가길 바랍니다. 왜 누군가에게는 성경이 그리도 고민되는 책인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기회로 오늘 이 시간을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성경에 대한 공부를 좀 합시다. 성경은 언제 쓰여졌지요? 우리 가운데 성경이 하늘에서 내려온 번개로 인해 지직 하고 쓰여졌다고 믿는 사람들은 없지요? 성경은 오늘 말씀에서 함께 읽은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 속에서 인간들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습니다. 구약성서는 히브리어 – 이스라엘
말로 써졌고요, 신약 성서는 헬라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성경은
신약과 구약으로 나누어 집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오심이 둘의 구분 점이 됩니다. 구약은 대체로 기원전 18세기부터의 역사를 담고 있는데,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모아진 것은
기원전 2-3세기 경입니다. 신약 성서는 당연히 기원후에
쓰여지겠지요. 기원 후 40년부터 150년 사이에 쓰여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동의합니다. 바울
서신 중 일부가 가장 먼저 쓰여진 것 같고요, 복음서는 신앙 공동체 가운데 구전되다가 바울 서신보다
오히려 조금 늦게 기록됩니다. 요한복음은 2세기에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이 책들은 4세기 초반에 경전Canon으로 온전하게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됩니다. (카톨릭에는 우리보다 9권이 더 많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성경의 원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모든 성경은 기독 공동체의 필사본입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는 영어 성경이나
중국어 성경을 번역했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이나 새번역 성경은 모두 성서 원어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창세기나 요한복음은 사실 그 자체로 하나의 책(두루마리) 입니다. 처음부터 한권을 염두하고 쓰여진 책의 챕터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하나로 묶여진 성경은 2000년이 가까이 되는 집필기간과 수많은 기자들의 작업임에도 엄청난 통일성을
갖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의 장과 절은 언제 생겨났는지 아세요? 장은
휴고라는 성직자가 1250년에 라틴어의 용어 색인을 위해서 구분하기 시작해서, 13세기 켄터베리의 주교 스테판 랑톤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인정됩니다. 절은
그보다 200년 더 지나서 1551년, 인쇄 업자 로버트 스티븐에 의해 생겨난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경의 내용이 성스럽고 절대적인 것이지 성경책 자체가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신비한 물건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함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역사 속에서 구성되었고, 또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설명함으로 이것을 비신비화 시키는 이유는, 그 속의 내용이 참된 신비함, 참된 놀라움의 자리를 회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주, 기도하면 다 이루어지나요? 라는 질문에 이어 이번 주도 어려운 질문을 하나 드리지요. (지난 주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진다 였습니다) 성경은 한글자 한글자가 다 틀림이 없나요? 조금 어려운 말로 성서가 무오한가요? 성서 무오설의 근거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런 논리의 결과인데요, 하나님은 흠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so, 성경은 흠이 없다. 다른 근거는 성경 안에
그런 구절들 입니다.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베드로후서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성경의 한단어 한단어가
무오하다는 의미인지는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질문이 합당한
이유는, 우선 우리가
보는 성경이 모두
사본이고 번역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을
조금 흔들 것이라고
말씀드렸지요? 마태복음 21장
28절을 함께 볼까요?
먼저 킹제임스 번역입니다.
28 But what think
ye? A certain man had two sons; and he came to the first, and said, Son, go
work today in my vineyard. He answered and said, I will not: but afterward he
repented, and went. And he came to the second, and said likewise. And he
answered and said, I go, sir: and went not. (한글 개역 성경도 이 내용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개역개정 성경을 볼까요?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분명하게, 두 번역의 내용이 다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어떤가요? 마태복음 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줄것이라고 말하지만, 누가복음 11장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글자 그대로 무오하다고
말할 때 과연 어떤 성경이 무오한 것일까요? 마태복음 21장의
말씀은 말이 아니라, 순종의 행위가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첫째가 갔는지 둘째가 갔는지
그게 그리 중요한가요?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기도로 얻어지는 궁극적 선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니까요.
사랑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너무 사랑해서 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편지는 번역되어야
했고, 필사되어야 했습니다. 그 편지를 받아 보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띄어쓰기, 맞춤법, 번역의 세련됨 따위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맞습니까? 문자를 넘어, 그리고 시대와 문화에 따른 표현을 넘어 편지 보낸 이의 마음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성경의 권위는 그 문자 하나 하나가 신비한 힘을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이 틀림없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의 표현으로서 그 내용이 온전한 진리임을 말합니다. 문자 하나 하나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얼핏 신앙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종종 자기 신념을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AJ 콥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스콰이어지의 칼럼리스트인데, 재미있는 실험을 합니다. 성경의 모든 명령을 지키면서 1년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AJ Cobbs, TED 강연 영상) 이 사람이 쓴 책은 성경대로
살아본 1년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는 1년의 삶을 통해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21세기 미국에서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립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는
어짜피 다 지키지 못할 것 좋은 구절들을 pick 해서 살자.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우리 삶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니라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성경을 취사적으로 읽고 지켜야 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참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벼운 마음으로 취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듣기 좋은 말, 내 마음에 맞는 말만 선택할 것이고, 결국
성경은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문자에 빠지지 않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감동 속에서 ‘버리고 싶은 성경 구절’이 왜 쓰여졌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결국 하나님이 하시고 싶어 하시는
말씀은, 그 분의 뜻은 무엇인지를 겸손히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은 왜 중요합니까? 크리스챤들에게 성경이 중요한 이유는 그 책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인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캠핑도 좋아하고 다른 종교의 이야기 속에서
진리와 사랑을 발견하는 일도 좋아합니다. 잠자는 아이의 얼굴 속에서도 창조주의 솜씨와 섭리를 발견하며
감탄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아닌 그 어디에서도 저는 예수님의 이야기,
날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참된 구원자, 그분의 이야기를 읽을 수 없습니다. 날 위해 목숨을 바치신 구세주 예수의 이야기는 성경에 적혀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서 해석의 기준은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이름은 성경교인이 아니라 기독교인, 그리스도인, 예수쟁이입니다. 성경에 때론 너무 잔인해 보이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읽다보면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맡게 됩니다. 진멸하고
말살하라. 호흡이 있는 것들은 하나도 남겨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때론
여호수아의 말씀이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의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안에서 구약의 전쟁이야기들이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절대적 사랑의 정신 안에서 평화의 존재들로 부름받은 우리에게 이 말씀이 전해지는
이유를 겸손하게 구해야 합니다. 섣불리 문자를 취해 하나님의 말씀을 폭력의 근거로 삼아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 로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쓰여진 시대의 문화와 정서를 반영하며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번역상의 이슈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기독교 공동체속에서 운동력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해 왔습니다. 그 문자에 어떤 마술적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진리를 가르치기에
우리는 ‘나의 사랑하는 책’ 이라고 이 책을 부릅니다. 이 천년의 시간동안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왔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보내진 위대한
멘토 바울의 편지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성경은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일에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론 이해하기 힘든 말을 만나고, 내 삶과 관련
없어 보이는 말을 읽는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지혜를 구하다 보면, 그렇게 성령의 도우심 속에 이 거룩한 책을 대하다 보면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