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오늘부터 여섯 주에 걸쳐서 평균대 위에 선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유한한 인간으로 인생의 신비와 하나님에 대해 모두 알 수는 없는 일이거든요. 결국 진리를 찾는 여정을 평생 해 나가야 할 텐데, 그 길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인생, 구원, 기도, 성경, 전통 그리고 전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쉽게 빠질 수 있는 양 극단의 문제점을 생각해 보고, 균형잡힌 중심을 함께 찾아가 보고자 합니다. 오직 지혜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바랄 뿐입니다.
오늘 첫 번째 설교는 ‘인생’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아니면 모든 것이 우리 선택의 결과인가요?
신앙인들은, 특히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분의 전능함 때문에, 모든 것이 그분의 결정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도 그런 신앙을 뒷받침하고 있는 듯 합니다.
시 103: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삼상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갈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이 밖에도 여러가지인데요, 이런 말씀을 보면 인생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해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평균대에 올라서기 전에 먼저 염두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깊은 믿음의 사람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고,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창조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알려진 (계시된) 하나님이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경험 속에서 전통과 우리의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우리는 (완전히는 아닐 지언정) 하나님을 알아 갈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결정해 놓으셨을까요? 자연스러운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왜 주셨을까요? 우리가 지킬지 못 지킬지 다 아는데, 규칙은 왜 주셨을까? 세상 끝날에 우리를 심판하신다는데, 구원의 가능성이 다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왜 심판을 하시는 걸까요? 좀 억울해도 어쩔 수 없나요?
성경 한 구절을 봅시다. 스바냐. 3:17 :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의지’ 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저 프로그램대로 행하는 꼭두각시들이라면 하나님은 우리로 인하여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나님이 뜻하셨다면 우리의 돌아옴으로 하나님은 진짜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의지를 가진 주체 사이에서, 온전한 인격 사이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주시는 생명, 시간 그리고 사랑의 가능성 없이는 결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구원이 ‘신인 협력의 결과다’ 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과 위험성이 다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 안에서, 선택이 가능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오른 평균대의 한쪽 낭떨어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말은 믿음 좋게 들리지만, 사실은 운명론적 삶의 방식이고, 인생을 비주체적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 이라는 단어가 유명해 진 것은 한 장관의 고백 때문이지요. .배가 뒤집히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미 결정되어져 있는 하나님의 뜻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건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어른들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한반도가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누군가의 지배를 받다가, 또 결국에는 허리가 잘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인가요? 아닙니다. 남의 나라를 자기들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힘 있는 나라의 욕망 때문입니다. 그 일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가 무언가를 배울 수는 있었겠지만, 하나님께서 그 일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엔 이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뜻을 알기 힘든 일들 - 신생아의 죽음이나 천재 지변과 같은 - 이 있습니다. 이런 일 앞에서 ‘하나님의 뜻’ 이라는 말은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복잡다단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오른 평균대의 다른 한쪽 끝은 ‘하나님의 뜻’ 같은 건 없다 라는 불신앙입니다. 깊은 신앙의 사람들은 앞서 살펴본 성경 구절에서처럼 자기들 삶의 현장에서 인도하시고 이끄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합니다. 선택의 자유는 주어졌지만, 옳은 선택을 하도록 인도하시고 유혹하시고 기다려 주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그 날부터, 우리도 여러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일을 통하여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지, 그건 여러분들이 알아서 결정하십시오. 하지만, 오늘 저녁을 나만 배불리 먹을지 아니면 외로운 친구와 나그네와 함께 먹을지는 하나님과 함께 결정하십시오. 우리 안에 그 분의 뜻을 아는 지혜가 커진다면 우리는 보다 많이 사랑하고 보다 큰 선의 열매를 맺는 방향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매일 매일, 그분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성실한 제자로 살다보면, 인생의 어느 한 순간에 바울처럼, 이 모든 것이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