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처음” 이었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처음 미국에 온 날, 처음 출근한 날, 처음 엄마나 아빠가 된 날. 저도 처음 설교를 한 날을 기억합니다. 제가 자라온 모교회에서 강단에 섰던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첫 단추의 중요함을 이야기하는 속담도 있듯이 ‘처음’ 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신중함과 기대 그리고 큰 무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그것도 자기가 자라온 고향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본문이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이 아니었을까? 혹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 주님은 그날 이사야 61장을 읽으셨습니다. 주님의 첫 설교는 “성령의 임재 속에 이루어진 희년”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사람들의 반응을 좀 보았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4장 끝부분, 29절에는 ‘그들은 들고 일어나서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 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가서 거기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교자에게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듣기 좋은 설교가 아니라 진리를 설교해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을 갖습니다. 설교는 듣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론, 설교자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부담이 되고 따르기 힘든 설교가 진리의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로 인한 부담이고 갈등이라면, 말씀 앞에서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은 인용하시어,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성령의 임재 가운데,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희년이 선포되었습니다. 신약성서학자들은 오늘의 말씀이 예수님의 전체 사역을 규정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주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소식은 희년의 복음입니다. 희년은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레위기 25장 8절입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크게 불찌며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참 자유를 누리고, 빚도 모두 사라지고, 말 그대로 처음 그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기쁨의 해가 바로 희년입니다. 따라서 희년이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서 종의 몸값도, 땅의 사용권 가격도 달라졌다고 합니다. 우리의 경제관하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요.
가난 때문에 빚을 지고, 자기 땅을 남에게 넘긴 채 소작인으로 혹은 종살이로 살아가고 있던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요벨… 희년의 나팔소리였을 겁니다. 희년의 해 7월 10일,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 소리가 길게 울리면, 종은 자유인이 되고, 땅은 원주인에게 돌아갑니다. 그 자유하게 되는 기쁨을 이야기하시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이 너희 가운데 이루어 졌다.
희년은 언제나 기다림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실 한번도 희년의 선포가 온전히 이루어진 적은 없다고 합니다. 빚과 억압이 사라지고, 모든 계약과 굴레가 없어지는 이 희년은, 자연스럽게 온전한 구원 혹은 하늘 나라의 새로운 삶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땅에서 그런 구원은 언제나 기다림일 뿐인가요?
그런데 주님은 이 희년을 우리 안에 선포하십니다. 오늘 여기서 이루어 졌다… 곧 이루어 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여기에 이루어 졌다고 선포하십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러 온 사람들은, 성령의 내려 앉으심 가운데 이 선포를 공유합니다. 포로된 자가 해방되고, 눈 먼 사람들이 눈을 뜨고, 억눌린 사람들이 풀어지는, 온전한 자유의 날이 여기에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부으심으로 그리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주의 영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희년은 지금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선포하시기 전에 주님은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십니다. 3장 21절에 비둘기 같은 성령을 입으시고, 4장에 바로 유혹을 받으시지요.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나에게 절하라, 세상을 주마 그리고 초능력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라. 이 세가지 입니다.
주님의 시험은, 우리를 노예 상태로 만드는 대표적인 유혹을 말합니다. 먹는 것의 노예로 살고 있지 않으십니까?, 권력의 종으로 살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동경하며, 불필요한 욕심의 노예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예속의 삶 가운데 요벨의 나팔 소리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은 그 노예의 구속으로부터 자유 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말씀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
성령의 사람이 되어 자유와 기쁨의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자유와 기쁨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해방시키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선포된 희년을 누리며, 눈먼자들의 눈을 띄워 주고, 포로된 자들을 자유케하고, 복된 소식을 널리 전하는 성령의 메신저가 되어 살아가기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않고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없습니다. 성령과 동행할 때에 우리를 통해 희년의 기쁨이 성취될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고, 뒤쳐진 사람들을 기다려주고, 앞 못 보는 이의 눈이 되어 주고, 걷지 못하는 이들의 발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희년 그 자체였지요. 그 삶을 충실히 따라가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