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예배드릴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아직 좀 이르긴 하지만 종종 봄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입니다. 작년 이맘 때쯤 수진이와 나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 때 살던
집 앞에 작은 잔디 밭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에 보니 노란 꽃이 피었지요. 수진이를 불러다 창 밖을 보여주며 꽃이 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누가 밤에 가져다 놨어?’ 이렇게 묻습니다. 그 말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몇 해 동안 더 봄마다 그
이야기를 생각할 듯 합니다. 어른들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봄꽃이 그 아이에게는 누가 갖다 준 선물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선물입니다.
이 좋은 봄날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도도 한국과비슷하니까, 예수님이 마지막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날도 꽃피던 봄이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그 분 가시는 길 가엔 노란 꽃들이 피어 있었겠지요. 이 화창한 봄날. 여전히 계속되는 창조의 시간 속에서 그는 죽음의
길에 오르십니다. 참으로 위대한 대비이고 신비로운 역설입니다. 이제
이번 주를 끝으로 사순절 – 렌트 시즌이 끝나지요. 렌트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동참하는 절기입니다. 렌트라는 라틴어의 뜻이 무엇인 줄 아세요? Spring 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길을 통해 진정한 생명의
봄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대비되는 요소들이 참 많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봄(생명) 과 십자가(죽음)가 그렇고요, 환호하는군중들과 묵묵히 자기 길을 가시는 예수님 자신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상징적인 역설은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 “종려나무”와 “나귀” 입니다. 주님은 지금 자신의
마지막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6절 이후에 보면, 예수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지요. “그가 명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겠는가, 누구든지 그를 보게 되면 자신들에게 알려 주시오” 이미 예수를 죽이려하는
자들이 많았고 그러기에 그 곳에 가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리고 그 분 자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길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그 길가에 예수님의 입성을 기뻐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고 전해 줍니다. 그들은 자기 겉옷을 벗어 예수님의 앞길에 깔았습니다. 사람들이 외투를
여러 벌 가지고 살던 시절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일전에 행하신 명령, ‘겉옷을 벗어 주라’ 는 모든 것을 다 내어 주라는 전적인 사랑의
명령입니다. 그런 소중한 옷을 바닥에 깔았습니다. 그가 자기들을
구원해 줄 Super Hero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이 일로부터 유래되어 교회는 부활절 전주일, 바로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사사기 4장에 따르면 종려나무는
다스리는 자의 정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시편 110편을
외우는데, 그 말은 왕의 입관 때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사실, 이들이 예수님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이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 18절은 분명하게 말하는데,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을 행하심을
들었다” 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 영웅이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란 것이 자기의
죄로부터 영생을 얻게 하는 궁극적이고 영원한 차원의 구원이 아니라, 자기들이 지금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줄 것이라는 바램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것은 정치적 해방일 수 있고,
물질적인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들을 좀 더 “잘
살게” 해 줄 것이 그들의 기대였습니다. 그들의 꿈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주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가 아니라 자신의 기대에 눈이 먼 사람들이 한 가지 못 본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귀입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그 나귀를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나귀 본 적 있으십니까? 조금은 우스꽝 스러운 모습이다. 몸통은 작아서 키가 큰 사람이 타면 다리가 끌릴 정도이지만, 머리 크기는 말과 비슷합니다. 털의 색깔도, 얼굴의 모습도 세련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 당시,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나귀와는 다른 말, 그것도 하얀 말 위에 올랐습니다. 로마의 권인들과 지배자들은 말을 탔습니다. 말을 탄 그들은 다른 이들을 내려다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큰 사람도 말 위에 앉은 사람을 보려면 눈을 치켜 뜨고 올려다 보아야 합니다. 나귀를 탄 이는 여전히 사람들의 눈 높이에 있지만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눈 마주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방식,
그가 걸터 앉아 있는 겸손의 상징 – 나귀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방식으로, 로마의 방식으로 자기들이 올려다 보아야만
하는 어떤 존재가 자기들을 구해 주기만을 바랬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예수님을 통해 충족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큰 기대는 큰 실망과 분노를 불러 왔고, 5일 만에, 예수가 예루살렘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소리칩니다. “저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사실, 그가 나귀를 타리라는 것은 이미 500년 전에 스가랴를 통해 예언되었던 일입니다. 스가랴 9장에는 (9절과 10절) “구원을 베푸는 왕은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탔다. 그가 병거와 말을
끊어 화평을 전할 것이다. 그 화평이 온 세상에 미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탔습니다.
세상은 온통 백마를 탄 영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모두가 그 영웅의 힘으로 백마에 오르려 합니다. 다들 자신을 올려도 보기를, 그리고 자기는 누군가 내려다 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택한 동물은 백마가 아닌 나귀였습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우직하게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결단과 영혼의 힘이 있습니다. 그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의 나귀는 권력이 아니라 사랑이, 기적이 아니라
희생이, 전쟁이 아니라 죽어짐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약해
보이고 초라하지만 십자가가 그러하듯 나귀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왕이십니다. 그러기에 종려나무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외쳤던 이들의말은 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참된 왕이신
이유는, 주님을 통해 우리의 욕심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주님이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주인이시고, 그 분이 왕이십니다.
오늘, 거룩한 한 주 - 고난의 한주를 시작하는 이 시간에 주께서는 우리를 나귀의 등잔등으로 초대하십니다.
화려하게, 지배하는 그 동물 말고, 초라하고 낮아도 우직하게 진리를 쫓는 그 동물을 함께
타고 가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종려나무 냄새 가득한 그 길 위에서,
나귀의 등에 함께 오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