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시리즈 "예수와 만난 사람들" 3/3, 주여 보기 원합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 - 52절) - 2015년 3월 22일 영화와 함께 말씀 보기 (Black, 2005 인도)


             함께 예배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며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읽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여리고, 삭개오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려 와라. 지난 삶의 모든 문제들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내려 와라 나무 아래에서 주님은 삭개오를 만나 그의 삶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동네에서 사람을 만난시는데요, 그가 바로 디메오의 아들입니다.

               동안 예수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 주변에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바로 사람들, 예수가 필요했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은 시간에 그를 찾아가고,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를 보려고 나무 위로 기어 오르고 인파속에서 다윗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램이 있다면 함께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진짜 만나는 . 내가 그의 이름을 알고, 그가 누군지를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를 만나서 삶이 송두리째 변화되는 그런 경험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안에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거룩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대로는 아니되겠구나”. “건져내어 주실 , 구원자가 필요하구나라고 느끼고 그의 이름을 부를 주님은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불편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됩니다. 어려움과 한계가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주님이 필요한 상황은 주님을 만나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제대로 있으면 말입니다오늘 주께서 만나신 바디메오는 맹인이었지만 제대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장애를 죄의 결과로 여겼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날때부터 소경된 자가 누구 때문에 그런지를 묻지요. 주님은 사람의 죄도, 그리고 부모의 죄도 아니라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바디메오의 아픔은 육체의 장애 아니라 사회적인 질병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멀리서 소리쳤다고 말합니다. 삭개오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다가갈 없지 않았을까요?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낙인 때문에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2005년도에 만들어진 인도 영화  “블렉 바로 이런 사람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미셸은 날때부터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소녀였습니다. 부모조차도 그가 사람 아닌 어떤 것이라 여겼지요. 그와 샤하이 선생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입니다. (영상 1)
           어려움에도 미셸과 그의 부모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힘든 상황이지만 구원은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디메오 또한 그렇습니다. 선생님을 만날 있다면 나도 인간이 있다, 새로운 삶을 찾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희망이 그를 소리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단순히 예수께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일까요?  두눈 멀쩡하고 거지도 아닌 우리와는 상관 없이, 예수님이 어떤 시각장애인을 고쳐준 이야기여서, 주님의 자비심을 알게 되고 나도 그렇게 착하게 살아야 겠다하는 교훈을 주는 그런 이야기인가요? 요한복음 1 9 말씀입니다. 빛이 있었다. 빛이 세상을 비추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가는, 마가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다루고 있는 복음서 전체는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그리고 그를 통해 전달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가르침과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전에도 예수님은 천국의 삶의 방식.  섬기는 자가 자라는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데, 제자들은 말의 의미를 보지 못합니다. 오늘 이야기 바로 뒤에도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사람들은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보지 못합니다.     빛으로의 참된 , 새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있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어둠속에 살고 싶어 합니다. 미셸의 모습이 사실은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영상 2

   주님은 어둠을 넘어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바디메오의 이야기는, 맹인의 치유이야기를 넘어서, 과연 누가 맹인인가? 묻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보게 되어 예수를 따르고, 떴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저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바디메오는 예수가 필요했습니다.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소리쳤지요.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더욱 소리로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무리 속에서, 집단 속에서 그분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분을 만나 해결받아야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은 모든 기도의 시작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분이 왕이란 말이지요. 땅을 다스리고 있는 다른 왕이 아니라 당신이 나의 왕입니다 라는 고백은 목숨을 고백입니다. 그리고 절실함이 그에게 만남을 허락합니다.   겉옷을 벗고 달려갑니다. 거지에게 겉옷은 전부입니다. 그것 없으면 죽습니다. 하지만 목숨보다 귀한 것은 보게 되는 . 그리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저는 대화가 좋습니다. 주님이요, 이렇게 물어보시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보통, 깨끗케 것이다 혹은 죄사함을 받았다 라고 표현하십니다. 백부장의 하인이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실 때는 병명이 무엇인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환자를 고치실 때에 대체로 주님은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바디매오에게는 물어보십니다. 말을 듣고 싶으셨나 봅니다.         

선생님 내가 다시 있기 하여 주십시오

          진리를 앞에 두고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인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눈뜬 장님들 앞에서 주님은 말을 듣습니다. “내가 보기 원하나이다    주님은,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선포하십니다. 말을 합쳐 보면보는 것이 구원이 됩니다다시 보는 , 가운데로 나아오는 , 다시 인간이 되는 일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영화 속에서 샤하이 선생의 노력으로 미셸은 세상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영상 3

         보게되는 감격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 안에서 새로운 시야를 확보하길 소원합니다. 마치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보게 하시려고, 보고 구원 얻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샤하이 선생은 미셸을 위해 생을 전부 희생하지요. 영화의 끝장면 함께 봅시다.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선생님. 장면이 우리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를 보게 하려고 그토록 애태워하시는 선생님, 예수에 대해 설명해 것입니다. (영상 4)

          예수님은 우리를 보게 하시려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제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갑시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가 보게 되어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우리가 다시 보게 , 우리는 분을 따를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분을 보고 따르게 때에, 분은 영상에서 것보다 더욱 기쁘게 춤추실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