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예수님과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예수님으로부터 험한 말을 듣고도,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려 놓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더 낮아져야 했던 사람. 그 온전한 낮아짐이 예수님을 웃음짓게 하였습니다. 지난 한 주간, 자존심 버리고 사셨습니까? 생명을 위해 개가 되어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살아 오셨는지요?
오늘 예수님은 또 한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식사를 하십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식사하시는 내용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거룩한 삶의 실천이라 생각했다면, 예수님은 식사하는 일, 함께 이야기 나누며 밥 먹는 일을 자신 사역의 일부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와 함께하는 그 식탁에서 진리가 전해 졌고,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선물로 받았고, 또 회개와 용서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배반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다시 고백하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것도 디베리야 바닷가의 아침 식사 자리였구요, 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값 비싼 향유를 부은 곳도, 사람들이 식사하자고 예수님을 초대한 자리였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것도 밥 먹을 때였고, 잘 아시는 나사로의 누이들, 마리아 마르다의 이야기 또한 먹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주로 하신 일은 밥 먹는 일,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육의 배를 채우며 영의 양식 또한 공급해 주신 일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의 공동체인 교회도 말하자면, 밥 먹는 곳입니다. 사실, 예배의기원인 성만찬이 그러합니다.
기독공동체에서 식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교회가 서로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공간이어야 한다라는 말과 함께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식구라는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함께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사랑해야 함께 먹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 함께 식사하셨다는 것은 정말 가족과 같이 사람들을 대하셨다는 말입니다. 음식에 관한 정결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유대인들(코셔)에게 밥 먹는 일은 그들의 정체성 곧 자신의 신앙과 밀접한 관계의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사람들을 구분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그의 삭탁에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식구가 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그의 식탁에 초대된 사람은 삭개오 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리고에서 시작됩니다. 19장 1절 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고 계셨다”. 거기에 한 사람이 있지요. 이름 삭개오. 직업 세리장 특이사항 부자이고 키가 작음. 그리고 예수님을 보려고 하는 중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마지막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설명은 천천히 하고 우선 말씀의 내용만 계속 살펴 보지요.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자 삭개오는 뽕나무 또는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갑니다. 예상대로 예수님은 그곳을 지나가시게 되었고, 그가 삭개오를 쳐다 보시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속히 내려오라, 오늘 너희 집에 가서 묵어야 하겠다. 삭개오는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모셔 집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이 수군대지요.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 들어간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신 집에서 삭개오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지난 날에 누군가에게 강제로 빼앗은 것은 네 배로 돌려 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 집에 구원과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이천년 넘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들려졌던 키작은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조금 천천히 다시 한번 말씀을 들여다 볼까요? 오늘 말씀은 여리고에서 펼쳐 집니다. 지금은 팔레스타인 거주지가 된 여리고는 예루살렘의 동북쪽에 있는 도시인데요, 고고학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에 하나이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성경에도 여리고에 대한 언급이 몇 번 나오는데, 다음 주에 살펴 볼 바디메오의 고향도 여리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에 무너뜨렸던 성도 바로 여리고이지요. 여리고는 요단강을 지나면 바로 만나게 되는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곳에 사는 삭개오의 직업은 세리장이었습니다. 세리장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이곳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세리 중에서도 우두머리이지요. 세리는 말하자면, 일제 식민시대의 “나카무라” 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고, 세리가 하는 일은 자기 민족들의 돈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상납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세금 제도는 도급제였습니다. 이 말은 일정한 세율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상납하는 얼마의 돈. 그 할당량만 채우면 나머지는 세리들이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제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엔 세리라는 말에 항상 죄인이라는 말이 붙어 다닙니다. 그 와중에 성경은 삭개오를 부자라고 묘사합니다. 그의 부는 더러운 돈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삭개오의 키가 작다는 것은 그 마음의 옹졸함.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누구 키 이야기 잘 안하거든요… 성경은.
그 삭개오가 예수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누가복음 19장이면 거의 예수님 사역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사람들은 이 마을을 지나가실 예수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 분을 만나고 나병을 고친 사람들, 생명을 돌려 받은 사람들, 그가 하신 생명과 같은 말씀들… 어쩌면 그 중에 한 마디가 삭개오의 마음을 사로 잡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 말입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 중에 세리도 있다더라” 바로 레위 마태 말입니다. 누가복음 5장 27절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부르시고 그가 기쁨으로 차린 잔치에 참여하시지요. 삭개오는 그날에 있었던 일을 들었을지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그 잔치를 비아냥대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자신이 온 것은, 마치 아픈 사람들을 위해 의원이 있듯이 이들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삭개오가 들었다면 그 ‘죄인의 친구’ 에 대한 이상한 그리움이 생겨 났을 지 모릅니다. 더구나 바로 전 장(13절) 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마른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울며 회개하는 세리가 의롭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나도 그분을 만나면…’ 삭개오는, 어쩌면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친구를 보고 싶어 뽕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나무에 오르는 것은 아이들이나 할 일인데… 삭개오, 그가 세상으로부터 이리도 멀어지기 전, 어린 시절에는 그 나무에 많이도 올라갔을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자카이오스라는 단어에서 오는데, 그 뜻은 “순결한, 깨끗한” 입니다. 삭개오의 부모님은 그가 그런 사람이 되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지요. 사람들이 비웃었을지 모릅니다. 아니 욕이라도 했다가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몰라 그저 삭개오를 향해 경멸의 눈빛만을 보냈을지도요. 혹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향해, 화있을진저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여… 하고 화를 낼지 모른다고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삭개오의 관심을 오직 예수님 한분 입니다. 자신의 삶이 이대로는 아니 되겠기에, 나무로 올라갑니다.
“삭개오, 속히 내려 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묵어야 하겠다.” 뽕나무 위로 올라 갔을 때, 그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예수님입니다. 키작은 세리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 깨끗한 자야…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서 내려와라. 내가 너희 집에 묵어야 하겠다… 분명히 크고 화려했을 삭개오의 집, 그 외로웠던 식탁으로 주님은 그를 초대하십니다.
삭개오는 허겁지겁 내려와서 그를 집으로 모십니다. 그리고 8절에서 10절은 삭개오네 집, 그 식탁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이야기 해 줍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 중 절반을 할애해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 바로 전장에서 예수님은 한 관리와 대화를 하십니다. 18절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영생을 위해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너의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어라 하십니다. 그는 심히 근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당신 재산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사랑의 실천을 약속합니다. 신명기법상 부당한 이익에는 5분의 1의 배상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는 양을 훔쳐 팔았을 경우 적용하는 4배의 법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내가 살아왔던 지난 날의 삶이, 도둑질이었고 옳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참된 구원, 예수님, 그 복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식탁에서 주님은 말씀하시지요. 9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 누가 주님께 선택받은 자입니까? 세례 요한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 없이 외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참된 돌이킴을 경험한 자. 돌아섬을 경험한 사람.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오직 한 길, 주님을 만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나만 더 생각해 볼까요? 그렇게 주님 만나는 기쁨 충만한 이야기 속에서 누가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놓치지 않습니다. 감격의 만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7절은 그들이 수군거렸다고 전해 줍니다 (그림) 이 그림은 지거 쾨더라는 신부가 그린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제 이 긴 설교 보다 이 그림 하나가 그날의 긴장감을 잘 표현하는 듯 합니다. 그 중에도 “주님의 감은 눈”이 보이십니까? 수군대는 사람들, 놀라는 사람들.. 개역개정 성경에는 뭇 사람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 판테스는 모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새번역은 사람들이 모두 수군거렸다라고 말합니다. 그 수군거림에 눈 감으신 예수님은 삭개오와 함께 그 집에 유하십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 특히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도 아니고, 삭개오도 아니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하나일 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딴지를 걸고 있는 사람들 말이지요. 아니, 저렇게 나쁜 놈과 함께 하시다니, 실망입니다. 주님 하고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주님이 하시지 않는 심판을 왜 우리가 하고 있는 걸까요? 겉으로는 아니지만, 마음 속으로 얼마나 많은 판단을 하고 있는지요. 누가 교회 다닌다고 하면, 반가워하기 보다는 “당신이?” 하고 생각하지 않으시니까? 아니면 적어도 저 사람 보다는 내가 구원 받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 말에 대해 주님은 눈을 감으십니다.
삭개오 집 밖에 있던 사람들. 그들은 예수의 행진을 맨 앞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된 그 세리장에 대한 용서의 마음을 주님과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구원의 소식을 불평하는 사람이 되고야 맙니다.
그날 밤 삭개오는 그 식탁에서 참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도 기쁘셨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으시면, 그 양 값보다 더 큰 돈을 들여서 잔치를 하시는 분이 그분이십니다. 드라크마 하나를 잃어 버리시면 등경을 들고 빗자루를 들고 어떻게든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하시는 분이 바로 그분 이십니다. 탕자를 기다리시며 하루 종일 먼 언덕을 바라보시는 분. 바로 그 분 이십니다. 이 기쁨의 만남이 우리의 삶 가운데도, 우리의 식탁 가운데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려오라, 이리로 내려오라… 한주간 이 음성을 듣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시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