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설교 “왜”] 2/3 왜 교회인가 - 진리실험 공동체 (사도행전 2장 1절 - 4절, 37절-47절) - 2014년 9 월 14일

함께 예배드리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교회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왜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는 왜 예수님인가, 또는 왜 예수님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목마름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상의 어떤 근원적이고 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질문 말입니다. 그런 니고데모의 밤이 우리를 예수님께 이끌게 합니다. 그 문제가 예수님 앞에 놓아질 때, 그 분은 새로운 기회 그리고 영원한 생명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허락해 주십니다. 믿는 자들에게, 오직 은혜로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 참된 삶이 있다면 이제는 두 번째 질문을 물을 차례입니다. 그럼 왜 교회인가? 캔자스에서 미국 교회를 섬기던 시절입니다. 마을에 참 친절한 아저씨가 한 분 있었습니다. 이사 온 목사에게 계란도 가져다 주고 가끔은 교회 앞 잔디도 깎아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지는 않아요. 하루는 집 앞에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찾아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요. 제 영어가 짧고 표현이 서투르니까, 이것 저것 막 물어볼 수 있는 건 좋습니다.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나는 분명히 당신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친절을 본다. 그런데, 왜 예배에는 안 나오냐? 새로 온 목사 접니다 한테 무슨 문제가 있느냐? 그랬더니 한다는 대답이 이렇습니다. 그렇다. 나는 분명히 크리스찬이다. 그런데, 꼭 교회를 나가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오히려 사람들과의 관계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한다그 말을 하는 아저씨의 표정에서 무언가 교회로부터 큰 상처가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조목 조목 설명하고 그 분의 생각을 교정하려 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시군요 하고, 그래도 교회에 나와서 같이 예배하면 참 좋겠다 하고 헤어졌습니다. 제가 떠나올 때까지 그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분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꼭 교회까지 가야 하나, 그냥 성경 읽고 바르게 살면 되지. 게다가 이제는 한국인 중 19.4%, 말하자면 열명 중에 2명밖에 신뢰하지 않는 그 교회라는 집단에 꼭 속해야 하나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꼭 교회를 나가야 구원을 받는 거는 아니지 않느냐틀린 말이 아니지요. 한국에 처음 세워진 교회가 1887년도에 세워진 소래교회예요. 그럼 그 전에 태어나고 죽은 사람들은 다 구원받지 못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구원의 문제에 관련하여, 조금 신중히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조금씩 더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았다 라는 말 속에는 분명하게 내세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이렇게 편지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물론 우리는 죽어서 천국 갈 겁니다. 그런 차원의 구원을 믿음 가운데 확신하지요. 그러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이 참 크리스챤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만 있다면,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빨리 지금 죽지? 또 천국 가는 것으로의 구원만을 강조하면 이 땅의 문제와 아픔은 그냥 참아내야 하는 것, 개선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나쁜 신학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구원, 영원한 삶은 하늘나라에서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 Here and now 에서부터 누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삶을 실제적으로 살게 하는 공간,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들을 수 있고,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고, 그러한 삶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하루하루 더욱 완성하여 나가는 공간.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저는 이러한 교회의 삶을 진리 실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마하트마 간디 선생은 자신의 삶을 진리실험 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해 보는것그게 실험이잖아요. 그냥 읽고 보는 것 말고.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성경. 그것 대로 함께 살아 보는 것.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여러 실험을 통해, 삶을 통해 이루어 가는 것. 그 진리 실험이 바로 교회의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 더 붙여야 합니다. 이 진리실험은 언제나 공동 실험, 팀 프로젝트입니다. 왜 함께냐구요? 왜 그걸 혼자 하면 안되냐고요?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신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1. 교회를 통해 우리가 사랑을 연습하고요, (꼭 교회 뿐만 아니라 주께서 허락하신,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있는 모든 모임에서 그러합니다. 2. 그렇게 훈련된 사랑을 가지고 더 큰 사랑, 세상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함께 본문을 봅시다. 오늘 본문은 이 땅에 교회가 처음 생기는 장면을 이야기 해 줍니다. 2절 입니다. 홀연히,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이 위 하나씩 임하였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그러니까, 이미 수세기 동안 다른 나라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제자들이, 갈릴리 촌 사람들인데, 이들이 자기 나라의 말로, 그러니까 우리로 따지면 평택(제 고향입니다) 촌사람이 불어, 독어, 영어 이런 말로 유창하게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놀라워 했습니다. 오죽하면 술 취해서 저러는 거 아니야? 라고 물어볼 정도였겠습니까?

그러니까,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첫 놀라움은, 사람들이 자기 말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서로의 말이 자연스레 통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행해져야 하는 첫 번째 진리실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혼자서는 소통할 수 없지요. 소통의 기쁨, 내 마음이 전해지는 것, 말 통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우리는 소통의 위기 가운데 살아갑니다. 페이스북이나 카톡도 그리 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세상을 보면,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알아먹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듯 합니다교회는 서로의 이야기가 소통되기 위해 존재합니다. 특별히 서로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깊이 그리고 온전히 공유되기 위해 교회는 존재합니다.

이 오순절 방언의 기적을 구약의 대표적인 사건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인간들이 어느 날 하나님이 있는 곳에 닿기 위해 탑을 쌓거든요. 성경은 그 때 사람들의 언어가 하나였다고 말해줍니다. 그들에게 하늘에 이르고자 하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키시고 그들의 언어를 흩으십니다.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신데,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그 욕심 때문에, 그들의 언어는 혼란해 지고 사람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흩어진 언어들이, 여기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님의 일하심 가운데 교회의 탄생과 함께 서로 통하게됩니다.

교회가 시작될 때 성령님이 그 곳에서 강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에 나타난 기적은, 병이 고쳐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 이전에, 말이 통하는 역사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서로의 마음이 소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곧 사랑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보이게 되고, 그렇게 보고 듣게 되는 서로의 모습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여기까지 해야겠습니다. 다음 주에 사도행전 2장의 나머지 부분을 생각해 보지요.

예수님은 소통의 대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 스스로가 성령의 현존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사랑했기에 모두와 통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 분의 모범을 따르는 공동체 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경험들, 참된 삶을 향한 고민들이 깊이 소통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약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 안에 크게 들려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소통하는 연습,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나서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을 사랑합시다. 세상 속에 작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갈라진 곳에 화해의 다리가 되어 주고 결국엔 하나님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져 가는 이 세대를, 하나님과 그리고 그분의 진리와 소통하게 만듭시다. 그 꿈을 꿉니다. 왜 교회인가? 우리는 이곳에서 사랑과 진리가 소통되는 실험을 합니다. 함께 말입니다.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