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16일 주보 칼럼 - 공항에서 주운 생각

  사정이 있어 한국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주운 생각입니다.
국경의 심사대에는 언제나 약간의 긴장감이 존재합니다. 입국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한참을 공항에서 살았던, 영화 '터미널'의 톰행크스가 생각나기도 하고 미대사관 철창을 잡고 울부짖던 미스 사이공의 여주인공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런 상상이 좀 과한 건 알지만 여전히 마음은 조심스럽습니다. 심사가 지연되어 연결편을 놓치기라도 하면 다음 일정에 큰 차질이 오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금세 제 순서가 되었습니다. 심사관은 여권과 비자를 확인하며 몇가지 간단한 질문을 합니다.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 혼자 왔느냐? 이곳엔 무엇하러 왔느냐?

  수속이 잘 끝나고 약간의 긴장이 풀리자 지난주에 들었던 한 설교가 생각났습니다. '믿음'을 하나님 나라의 비자visa 로 비유하는, 전에도 종종 들어 본 말씀입니다.개신교 신앙은 철저하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의 요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입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사관은 (저는 미국을 하나님 나라로, 공항 근무원들을 하나님 나라의 심판관으로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말이지요 ㅎ) 비자가 진짜인지 아닌지 어떤 기계에 대어 보기도 하고, 몇 가지 질문도 했습니다. 비자가 죽은 것 (expired) 이거나 제 것이 아니었다면 문제가 생겼겠지요. 무기를 팔거나 마약을 유통하러 이곳에 왔다고 하면 당장 입국은 거부되었을 것입니다. 비자가 있어도 말이지요.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그 나라를 살기 위한 믿음은 '살아있는 나의 믿음' 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이끄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과 실천이 없이 우리는 그 나라를 누릴 수 없습니다.

제가 속해 있던 길 줄 옆에는 대기 시간이 거의 없는 짧은 줄이 있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한 통로 입니다. 제가 대한민국에 입국할 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심사를 받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믿음과 비자에 대한 이런 생각들이 부질없게 느껴졌습니다. 바울의 이 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 (빌립보서 3장 20절)

'믿음-비자' 의 비유는 사실 처음부터 문제가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하늘의 시민권자인 성도들에게 그 경계를 통과하는 비자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테니까요...

2015년 8월 9일 목회 칼럼 - 여행 마친 자들의 교훈

  집에서 교회를 가는 길에 커다란 공동묘지 (Forest Hills Cemetery)가 있습니다. 1857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150년도 넘은 오래된 장소 입니다. 미국에 와서 신기했던 것 중 하나가,  공동묘지가 사람 사는 곳에서 가까이에 위치해 있는 것인데, 이곳 역시 주택들 그리고 학교와 담장을 맞대고 있습니다.
 수요일에, 저녁 약속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기에 그곳에 차를 멈추었습니다. 무덤가를 걸으며 사색하였다는 옛 철학자들 흉내도 좀 내보고 싶었습니다 . 예상대로 조용히 산책하며 기도하기 참 좋은 장소였습니다.
 
오후의 비스듬한 햇살을 받은 공원은 참 평화로웠습니다. 길 건너의 바쁘고 아둥바둥하는 삶과는 다른 시간이 그곳에서 흐르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촘촘하게 이웃한 죽은 자의 돌들은 ‘우리네 사는 일’ 을 다시 한번 찬찬히 바라보게 해 주었습니다.  
  지혜자는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람을 다스려 그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자기가 죽을 날을 피하거나 연기시킬 수 있는 사람도 없다”(8장 8절)  그리고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9장 9절) 라고 말합니다.

 비석에 새겨져 있는 숫자들을 보니 저보다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랄프 에머슨의 노래처럼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은, 그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 많은 무리에 합류(join the majority)하기 전에 더 많이 사랑하고 더 행복하게 살아야겠습니다. 더 치열하게 선물로 주어진 삶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오늘 내게 허락하신 감격이고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날 저녁, 먼저 여행을 마친 선배들은 참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2015년 8월 23일 주보 칼럼 - 광복 70주년 기념 평화통일 남북 공동기도문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에서 위태로운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폭력과 전쟁의 말들보다는 평화와 생명의 기도가 우리 신앙 공동체 안에서 울려나길 소원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한국 기독교교회 협의회와 조선 그리스도연맹이 함께 작성한 ‘광복 70주년 기념 평화통일 남북 공동기도문’을 함께 나눕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모진 박해를 견뎌낸 이날, 우리 민족은 해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슴으로 부른 그 노래들은 남과 북, ‘평양과 서울’ 어디에서나 눈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오늘 그날의 함성이 심장에 메아리치는데, 지금 우리는 일제 강점기 못지않은 증오심을 품고, 적대적인 분단 상태로 살아왔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위로의 하나님,
올해로 분단 세월이 70년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간 유다인들은 예언의 말씀대로 자유롭게 자기 조국으로 귀향했는데, 우리는 곧 오리라는 통일의 소망조차 품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식민지 시대에도 임의로 오갔던 육로도, 철도도, 뱃길도 지금은 모두 막혀있습니다. 벌레와 짐승, 풀씨와 나무 열매도 남과 북에 갇힌 채, 부자유한 채 지낼 뿐입니다. 주님 우리가 다시 그 날의 해방을 가슴에 품게 하옵소서. 삼천리금수강산 온 누리에서 통일의 합창을 준비하게 하옵소서.
 
평화의 하나님,
하늘과 땅이 한결같듯 70년 동안 이 땅을 둘러싼 강대국들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압박합니다. 종종 평화의 중재자 노릇을 기대했지만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신의 이익을 우선할 뿐입니다. 최근 미국과 일본 간 군사동맹은 점점 강화되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 동맹의식이 공고해 집니다. 군비 경쟁을 일삼고, 군사 협력을 추진하면서 다시 위기를 부채질합니다. 이 민족이 스스로 살 길은 서로 교류하고 왕래하며, 함께 화해와 협력을 높이는 일인데 미련한 우리는 담을 더욱 견고히 쌓고 있습니다. 주님, 이제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게 하옵소서.
 
자비의 하나님,
70년을 기다려온 지금,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의 온전한 평화를 소망합니다. 70년 동안 반복되어 온 갈등과 대결의 역사를 속히 끝내기를 소원합니다. 한 피를 나눈 형제자매, 흰 옷 입은 우리 민족이 동아시아와 세계 속에서 아름다운 일치와 평화로운 통일을 통해 높은 자존감을 회복하기를 기대합니다. 화해의 소문이 동해와 서해 사방으로 물결치고, 평화의 소식이 백두산을 넘어 유라시아로 제주도를 건너 태평양으로 큰 바람 되어 퍼져나가기를 꿈꿉니다. 주님, 우리의 소원을 꼭 이루어주옵소서.

하나 되게 하시는 주님,
남과 북의 교회가 한 마음으로 통일을 염원하며 기도하는 이 시간, 주님 우리를 평화의 사도로 삼으소서. 두려움을 이기고 화해의 전달자가 된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나와 우리 모두가 “화목하게 하는 직분”(고후 5:18)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죽음에서 승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5년 8월 30일 주보 칼럼 - 정명正名

교회에 간판을 달았습니다. 예배 공간을 공유하는 Trinity 교회 간판 아래에 작게 ‘메디슨 한인 연합 감리교회’ 라고 우리 이름을 붙여 달았습니다. 이제껏 주일마다 교회 앞에 세우는 간판을 두었는데, 이제는 누가 언제 보아도 여기가 ‘메디슨 감리교회’ 라는 걸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건물 앞에 달린 이름표를 보고 있으니 뿌듯한 마음 한편으로 ‘정명正名’ 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공자에게 물었다지요. 권력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러자 ‘이름을 바로 잡겠다’고 대답했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모난 술잔은 모난 술잔답게… (논어의 ‘자로’편)
커다란 건물 앞에 ‘교회’라고 써 붙였습니다. 영어로도 쓰고 한글로도 써 놓았으니 누구든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교회 사람들’ 임을 알 것입니다.
누군가에게서 이름에 걸맞은 삶을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실망합니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지요. 바르게 다스려야 할 ‘정치인’들이 자기 배만 불리려고 할 때, 거룩한 일을 맡은 '성직자’들이 세속적인 이익에 붙들려 있을 때, 가르치고 길러내는 일에 관심이 없는 ‘선생님’이나, 노인 같은 ‘청년’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교회ecclesia의 본말뜻은 ‘부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 a called out congregation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도록 (마태복음 22장) 불러 모아진 사람들. 생명과 평화를 누리고 전하며 사는 사람들(롬 8:6).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이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관심은 사랑하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 평화를 확장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 살지 못하면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릴 것입니다. 교회다운 교회. 그 거룩한 이름에 걸맞은 공동체의 삶을 꿈꿔 봅니다.
주여, 우리를 ‘교회’ 되게 하소서...
오늘은 우리 교회가 예배를 시작한지 딱 1년 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며… (데살로니가전서 1장 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