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예배
드리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복음서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예수님의 삶을 증언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마가의 복음은 예수의 세례 이야기로부터 복음을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마가에게는 세례가 예수님의 탄생 만큼이나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례란, 그 자체로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1517년에 종교개혁이 일어 납니다. 당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개혁하고자 목숨을 건 시도들이 생겨나지요.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여러 신학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어떤 것이 성례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당시 교회는 혼인, 안수등을 포함한 일곱가지 일을 성례 Sacrament 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가들은 성서의 내용을 검토해 볼 때 그 중 단 두가지만 성례로서의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했지요. 종교 개혁 속에서 살아남은 성스러운 의식 두가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세례와 성찬입니다.
세례란 무엇입니까? 감리교회의 장정에 따르면 세례는 “죄의 용서와 새로운 삶의 징표” 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정의 앞에 “지속적” 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습니다. 세례 받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신앙생활 중에 가끔은 세례를 또 받고 싶은 때도 있었습니다. 나도 모를 때 받은 그거 말고, 진짜로 내 몸과 마음을 다해, 주님 앞에서 새로운 탄생을 경험해 보고도 싶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가르침은 세례가 인간의 기분과 기억 혹은 세례자의 훌륭함에 영향 받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이미 제가 받은 세례는 온전하고 특별하며 충분합니다. 세례에 관해서 교회사 이야기를 좀 더 해 볼까요? AD 313에 기독교가 공인이 됩니다. 오랜 박해가 끝이 나지요. 그런데, 이 기쁜 소식과 함께 교회 안에는 골치 아픈 문제가 등극합니다. 바로 박해 당할 때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에 관한 처리 문제 입니다. 박해가 끝났으니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을 다시 받아들이자는 의견이 주류였지만, 그 중에 성직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논쟁꺼리가 되었습니다. 박해시에 교회를 배반한 성직자들이 행하는 성례가 과연 유효한가? 이것이 교회사 속에서 유명한 도나투스 논쟁의 핵심 쟁점입니다. 도나투스파의 사람들은 그들의 성례가 유효하지 않기에 그들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유구한 역사는 도나투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이러한 결론은 “성례의 권위가 집례자의 인격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인간을 통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구한테 세례 받으셨는지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군대에서 2분만에 세례를 받으셨나요? 괜찮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그 세례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받은 세례는 모두가 특별하고 아름답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데, 집례자의 권위로 세례를 하는 것이라면 요한이 이 세례를 집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기꺼이 머리를 숙이사 세례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누가, 언제 세례를 주었는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세례받은 사람임을 기억하고, 그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먼 길을 돌아 왔는데, 본문을 살펴 봅시다.
마가는 그 때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있었다고 전한다. 사실, 새롭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인류의 소원이지요. 세상이 많은 종교들은 우리는 몸을 씻음으로 마음도 깨끗하게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을 통한 예식은 거의 모든 종교에 있습니다. 깨끗해지기 원하는 것은 인류의 공통된 바램인 듯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세례는 보다 크고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저 물을 끼얹는 것으로 완전해 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물 가운데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이 세례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존재를 얻습니다. 이 세례의 물은 어머니의 양수가 되기도 하고,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은 시절 흑암 가운데 있었던 태초의 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다시 태어납니다. 거듭나야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말입니다.
그 새로운 창조의 시간에 세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다” 라는 말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매일 겪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세례는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안에 계속됩니다. 새로운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열려진 하늘 아래에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님과 동행하며 살아갑니다. 또,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사랑의 말을 들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죄를 씻는 것만으로 우리의 삶은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뼈속까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었다 살아나야 합니다.
죄 없으셨던 예수님은 친히 세례를 받으심으로 새로운 삶, 공적인 삶을 시작하셨는데, 그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세례를 받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요. 세례의 경험이 매일 같이 있는 것이라면 꼭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많은 신학자들은 세례의 역할을 결혼식에 비유합니다. 사랑하는데 꼭 결혼해야 하나요? 결혼식이 갖는 의미가 몇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일이지요. 우리도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하고 그 감격을 누립니다. 또, 결혼을 통해 사람들에게 남녀의 하나됨을 알리는 것처럼 세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공표합니다. 이웃의 축복과 도움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결혼식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됩니다. 이제 결혼한 사람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우리에게 자연스레 생겨납니다.
결혼식은 단지 하루의 이벤트가 아닙니다. 세례 또한 그러합니다. 세례 받은 자로 살아가는 일. 열려진 하늘 아래서 성령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사랑 고백을 듣고 사는 일. 주님이 몸소 보여주신 세례의 기쁨입니다.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세례 받은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존재들입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가까운 시간에 세례 받으시는 일을 권해 드립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