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 없는 2015 (창세기 13장 14절 -18절) - 2015년 새해 첫 주일예배


 함께 예배드리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노트에도 썼고 칼럼에도 넣은 말인데, 구상 선생의 이 말이 계속 생각 납니다.
“내가 새로와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와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와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새롭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요. 그가 우리의 maker이기에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일도 그 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는 은혜 속에서 진정한 새날들을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며칠 동안 가장 많이 주고 받은 말이 이것일 겁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런데, 그 많이 받을 복은 누가 주나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새해 복 받아~ 라는 말 속에 새해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평화의 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라는 의미를 담습니다. 성경에도 복에 대한 이야기들이 참 많은데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에 대한 약속을 듣는 이가 바로 이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면서부터 복을 약속하십니다. 12장 2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는 너는 복이 될지라.” 그냥 네가 복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절 끝을 볼까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결론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복이 아니지요. 보통 기독교를 기복적이다 말하면 부정적 의미이지요. 그런데 사실, 기독교는 복을 비는 종교가 맞습니다. 우리가 방금 전에 찬양했듯이 복의 근원이 곧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아니시면 우리가 누리는 어떠한 행복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의 근원보다 복에 더 집착할 때 생기고, 또 그 복이란 것을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만 제한할 때 생겨 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이 마땅하다면 . 그 빌만한 복 중에 가장 좋은 복은 이 복입니다. 나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들all nations 이 복을 받는 것.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전통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흘러 내려갔습니다. 그를 통해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의 본질입니다. 몸이 건강한 것, 자녀들이 잘 되는 것도 복이지만 더 큰 복은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온 백성이 복을 받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 삶이 바로 주님의 삶에 동참하는 삶이고, 주님의 부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복자신 것은 그가 부유했기 때문도 아니고, 자녀들이 있어서도 아니지요. 그로 인해 세상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새해 계획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이 받을 복은 흘려 보내는 복이어서 생명을 일구는 요단강의 복입니까? 아니면 자기 혼자 차지하고 가두어서 곧 아무 생명도 담아내지 못하는 사해의 복입니까?


 오늘 설교의 제목은 “기복 없는 2015” 이라고 정하였습니다.  두 가지 의미를 담았습니다. 하나는 앞서 말한 나쁜 기복주의가 2015년도에는 우리 신앙 가운데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믿고 자기만 잘 살려는 마음, 공부 안하고 좋은 성적 받기를 바라는 마음, 사람을 소중해 여기지 않았는데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마음이 우리 속에서 사라지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그로 인해 온 세상이 복을 받는, 복덩이가 되는 복이었습니다.


 두번째 의미는 높고 낮음이 없는 사람, 기복 없는 삶에 대한 바램입니다. 새해 첫 날 예배에도 말씀드렸는데요, 올 한해 살 동안 우리는 많은 일들을 겪을 것입니다. 사건에 대해서라면 기복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상태, 마음의 평화에 대해서라면 큰 기복이 없기를 바랍니다. 좋은 일만 있을 거라는 생각 다들 안하시지요?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서 큰 시련을 맞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말은 그저 순진한 바램에 불과합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부적 쓰는 법을 모릅니다. 평탄하기만한 삶에 대한 기원보다는 어떤 일 속에서도 믿음에 뿌리 박은 용기와 지혜를 바라는 것이 더 현명한 기원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보지요. 복을 받으리라는 수없는 약속을 듣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이민자의 신세가 되어서 왕에게는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서 사래 대신에 하갈을 첩으로 두어 자신의 대를 이어 가려는 인간적인 노력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인생은 주님 안에서 성공한 인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믿음 때문이었는데, 그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 왔을 때, 성경은 그가 한 첫 행위로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장 7절입니다. 그리고 베델 동쪽으로 이동했을 때도 예배를 드렸고(8절)  그 후로도 성경은 아브람이 줄곧 제단 쌓는 일에 열중 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13장 4절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3장 18절 말씀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거기에서도 그는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이 말이 참 좋습니다. 거기에서도…
 아브람이 (17장에 아브라함이 되니까) 가나안에 있다가 기근이 들어서 이집트로 내려 갑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그 때에 아내의 미모 때문에 이집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 것을 두려워하여서 그녀를 누이라고 속이지요. 사실, 아브람과 사래는 이복남매 지간입니다. 아브라함은 똑 같은 잘못을 두 번이나 하고 있지요// 바로가 그 여인을 데리고 가고 대신 아브람에게는 양떼와 소떼 암나귀와 수 나귀, 남녀 종과 낙타까지 줍니다. 12장 16절 입니다.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절대 권력 앞에서, 한 자연인이 살아 남기 위해 가족의 연을 포기해야 하는 안타까운 장면을 읽게 됩니다. 당신을 내 누이라고 말하자는 아브람의 요구에 사라는 대꾸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혼인의 성실성을 파괴시키는 윤리적 위기 앞에서 아브람은 하나님을 향한 최선을 선택하였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의 고향을 떠나 가나안에서 가뭄의 위기를 만난 것도 모두 하나님의 명령과 언약 속에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하지 못했고, 우리는 이 장면에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람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완전하지 못한 믿음 또한 선한 것으로 사용하여 주십니다. 주님은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심으로 아브라함의 아내가 바로의 아내가 되는 것을 막으십니다. 이 일을 겪은 바로가 아브람에게 나아오지요. 왜 나를 속였느냐, 다시 사라를 데리고 나가라… 그 덕에 아브람은 거기서 얻은 재산을 모두 가지고 자기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온 그곳에서도 역시 13장 4절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아브람이 제단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납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의 연속입니다. 바로 모아진 재산 때문에 조카 롯의 목자들과 아브람의 목자들이 다툼이 난 것이지요.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자기 양떼를 먹일 수 있는 물과 초원은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이 일로 살인과 폭력이 난무 한다고 하지요. 그 때 아브라함이 롯을 불러서 말합니다. 그리고 ‘혈육 간에는 다투면 안 된다’는 대전제 아래, 둘 사이의 갈등을 피하는 길은 서로 독립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우선 선택권을 줍니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참 멋지지요.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지만 말 그대로 양보의 미덕을 보입니다. 12장의 그 안타까운 사건에서 비겁해 보이던 아브람의 모습. 그리고 13장의 지혜롭고 아름다운 아브람의 모습 사이에는, 처음 제단을 쌓은 곳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 처음 와서, 자기를 이 곳으로 보내고, 수많은 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예배하였던 곳에서 다시 한번 예배 드렸던 장면이 있습니다. 참된 예배가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믿습니다. 그 제단 앞에서 아브라함은 지금 이 재산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깔끔하게 양보할 수 있었겠지요.
 그 말을 들은 롯은 여기 저기 둘러 봅니다.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하여 마침 주님의 동산같아 보였고, 이집트 땅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그는 주저없이 그곳을 택합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식의 미담을 기대하는 우리에게 롯의 선택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하지만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택한 것이 결국 화였다. 그 곳은 소돔 땅, 불로 망하게 되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요르단 동쪽의 좋은 땅은 모두 롯에게 넘겨주고 아브람은 지금의 남아 있는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 때 아브람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람을 위로하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참된 위로란 이런 것입니다. 아브람이라고 왜 억울한 마음, 서운한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람은 그 화를 제단에서 풀었습니다. 기복이 없는 삶은 이렇게 가능합니다. 억울함을 하나님 앞에 쏟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 것. 기쁨도 하나님 앞으로 돌려 참된 겸손을 유지하는 것. 낮아 진 마음을 올려 주시고 높아진 마음을 낮게 하시기에 우리 영혼의 기복은 없습니다.

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선한 결과를 내는 믿음의 일은 아브라함에게 제단을 통해 가능했습니다. 올 한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새롭게 됨으로 새로운 세상을 삽시다. 때론 곤란을 당하고 때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것으로 영혼의 기복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흔들리되 넘어지지 않는 삶. 하나님과의 관계 지속적인 믿음 생활로만 가능합니다. 그 분이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실 것입니다.

1월 4일 주보 칼럼 -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옛사람을 버리고...

아마존닷컴에서 옷걸이 한 세트를 주문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상자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아무리 작은 물건이어도 택배를 뜯는 일은 기쁜 일입니다.그런데, 상자 안에 주문한 물건 대신 여행용 코펠세트가 들어 있었습니다. 박스의 주소와 이름을 확인해보니 저에게 온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존에 연락해 보니 다른 물건이 배송되었다며 바로 환불을 해 주더라고요.
그리고는 유혹이 시작되었습니다. 코펠을 돌려보내는데 필요한 정보를 이메일로 받았는데, 언제까지 보내라는 말도 없고 꼭 보내야 한다는 말도 없는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렇게 잘못 온 물건은 그냥 사용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 상자를 다시 열어 찬찬히 살펴 보았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창3:6) 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캠핑을 많이 좋아합니다.
지난 11월에는 시카고에서 컨퍼런스가 있어 하루 호텔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확인해보니 호텔이 원래 가격보다 60여불을 더 charge 했더라고요. 호텔에 연락을 했고 환불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주 정도 후에 신용카드로 환불된 것을 확인하였지요. 그런데 어제 호텔로부터 같은 금액의 check이 집으로 도착했습니다. 몇 번의 통화 과정에서 제 case 가 두번 처리되어 다시 또 check 이 날라온 듯 합니다. 짐작컨데, 이런 check은 그냥 입금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pay to 에 분명하게 적혀 있는 제 이름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흔들려서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지 못하고 서랍에 넣어 두었습니다.
오늘 아침 기도 중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물건을 탐하면서 새해 복을 빌었던 자신이 부끄러워 졌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첵은 폐기하고 물건은 돌려 보냈습니다. 새해 초부터 이런 (말도 안되는) 유혹에 흔들리는 자신을 보며, 올 한해 정신 차리고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기도 중에 깨우쳐 주시는 성령님이 아니었으면 부끄러운 목사가 될 뻔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내가 새로와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구상의 時 ‘새해’ 中)

주일 설교 "9:1" - 누가복음 17장 11절 - 19절 (2014년 12월 28일)

  함께 예배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오늘은 2014 마지막 주일 예배 입니다. 지난 360여일, 52주간을 살아 오시느라 쓰셨습니다. 살아 있다는 . 한해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만,  이곳에서 지금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스럽고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없습니다.
  해를 보내는 마지막 주일, 함께 읽은 하나님 말씀은 누가복음의 고침 받은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누가복음의 후반부는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을의 안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그의 제자들과 지나고 계십니다. 그리고 곳에서 나병에 걸린 열명의 사람들을 만나시지요. 오늘의 본문은 크게 이야기. 나병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시는 이야기, 그리고 중에 명만 돌아온 것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이렇게 두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해를 보내며 치유와 감사의 이야기를 함께 읽는 것은, 지난 시간 동안 우리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늘의 만지심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파할 때마다 아픔에 동참하여 주셨고, 시간의 신비와 보내신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달래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각자의 치료된 상처를 품고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치료된 상처는 은혜의 도구입니다. 상처를 통해 겸손을 배우고, 은혜를 고백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있고, 앞날의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있습니다. 치료된 상처를 만져 봄으로 말입니다. 반면,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 아픔은 종종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칼이 되고 모서리가 됩니다.
   생명과 평화의 사람이 되는 것은 치유의 경험을 가진 사람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만지심, 그분의 고치심을 경험한 사람이 세상에서 생명과 평화를 누리며 전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눈먼 거지 바디메오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주님의 고치심을 경험한 바디메오는 길에서 예수를 따라 나셨습니다. 우리를 고쳐주신 경험들을 기억하며 본문을 살펴 봅시다.
   성경은 그들이 지역의 경계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 줍니다. 사람들은, 특히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그런 고을의 경계에는 살지 않았습니다. 성이 있고, 그곳에서 자기를 지켜줄 있는 여러 장치들 속에 살지 경계에는 살지 않았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은 바로 그들이 버려진 사람들, outcast 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한편으로는 천형병에 걸렸다고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이들이 측은하긴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모두 이렇게 경계선을 살아가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이곳 미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경계인입니다. 나이에 대해서는 어때요? 저는 20대와 40대의 경계에 있습니다. 지금은 조금 불안하지만 때가 되면 많은 것이 안정되어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지요.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때가 되도 다른 불안과 전이를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 세대, 이웃 그리고 모든 삶의 여건이 사실은 잠정적인 것이고, 우리는 사이-경계의 사람들이라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의 측면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되 땅을 살아가는, 땅의 사람이되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가지 세상의 경계인입니다. 언제나 영원한 것을 그리워하는 근본적인 향수를 가지고 있지요.
   교회는 그런 경계인들의 모여든 공동체 입니다. 성경의 나병 환자들도 10명이 함께 모여 살았습니다. 여기엔 몸이 건강했다면 함께 하지 않았을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이 섞여 있었거든요. 이들의 아픔이 서로의 차이를 무시하게 하였고, 이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ㅅ로 위로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경계를 사는 사람이다 라는 공동의 정체성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되어 있는 것입니다. 경계의 삶은 어쩌면, 서로 다른 우리를 함께 여행하게 하고, 근원적인 고향 -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고 내일을 희망하게 하는 다른 모양의 축복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병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문둥병은 전염병입니다.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사람들이 곁에 그들은 나는 부정합니다. 라는 말을 반복해서 자기가 천형병에 걸린 사람임을 말해 주어야 했습니다. 가족에게도 가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그들이 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 높여 주님을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십니다.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각성이 없는 병이기에 병이 발견되었을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님 앞에서 너무 늦은 병은 없었습니다. 때론 우리 삶의 문제도 자각 증상 없이 어느 틈에 우리 삶을 제압헤 버리지만, 주님 앞에 너무 늦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디오에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오늘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주님 만나기에도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죄를 인식하였다면 소리 질러 외쳐야 합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아픈 사람들의 목소리를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유대 법으로 병을 깨끗하다 판정하는 사람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에게 자기 몸을 보인다는 것은 그들이 육체적 병으로부터 치유된다는 것과 함께 사외적인 소외와 추방으로부터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보고싶은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러 고향 땅으로 돌아갈 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던 모두의 몸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아시는 것처럼, 성경은 그들 한명만 돌아와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말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아홉 명은 어디에 있는지 물어 보십니다.
나머지 아홉명은 어디 있을까요? 어쩌면 예수님을 잊고 건강한 몸으로 떠나갔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말씀대로 지금 열심히 제사장에가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게 한시라도 빨리 인정받아야 제대로된 삶을 영위할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무엇이 먼저인지 그들과 달리 생각했습니다. 제사장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자기를 낫게 분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족을 만나는 것도, 지난했던 지난 날을 훌훌 털어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가 병을 치유했다면, 먼저 그를 다시 만나 그를 아는 . 그가 일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동안 어떤 치유와 어떤 만지심을 경험하였습니까? 어떤 은혜의 선물들이 하늘로부터 허락되었습니까? 그것을 누리고, 증언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쳐주신 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며 사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누가 일을 가능하게 하였는지 돌아와 기억하는 , 감사를 드리는 ,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일을 하신 분께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있을 것입니다. 그의 선물보다는 그가 우선입니다.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9:1 싸움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일이 없도록, 우리가 이 어려운 확률을 뚫고 그 분께 먼저 달려 갑시다. 고쳐주신 분을 먼저 생각하는 . 한해를 마무리하는, 우리 삶의 방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