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es “주의 기도 위험한 그리고 위대한” 1/3 하늘 뜻에 관한 온고와 지신 (마태복음 6장 5절 – 9절) 2014년 10월 12일

 함께 예배 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주일학교를 다녀보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예배 시간 중에 가장 좋은 시간이 언제이셨습니까? 저에게는 주의 기도 시간이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축도자가 없는 경우 주의 기도로 예배를 마치는 전통이 있기에, 주기도문을 한다는 것은 예배가 끝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을 빨리 외면 욀 수록 예배는 일초라도 빨리 마치게 되기에 ^^ 얼마나 빨리 외워댔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주기도문의 의미를 모르고 지내다가 신학교 시절, 채플 시간에 이 기도를 듣게 되었지요. 우루과이의 한 성당에 적혀져 있는 주의 기도와 관련된 글 또는 기도라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마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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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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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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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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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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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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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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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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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 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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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서 구하소서"라 하지 마라.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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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이 기도를 보면서 그 오랜 가르침을 새롭게보게 되었습니다. , 나는 이런 기도를 그 동안 반복해 온 것이로구나하고 깨달았지요. 기도하기 좋은 가을입니다. 이제 앞으로 삼 주 동안 주의 기도를 함께 읽으며 생각을 나누고자 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의 기도를 살펴보고, 또 기도 속에 주님과의 사귐이 더 깊어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수요일 속 모임에서 이야기했듯이 말씀 읽기와 기도하기는 개인의 경건 생활의 필수적 요소인데, 성경 읽기가 그러하듯, 기도하기 또한 올바르게 그리고 신중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질문은 참 중요한데, 여기, 그 대답이 있습니다. 아주 위험하고 또한 위대한 대답 말입니다.

오늘 본문과 평행이 되는 누가복음 11장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를 하고 오시니까,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기에 평소에도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당시의 우대인들이 하루에 세번씩 ‘18개의 축복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기도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다시 묻고 있습니다. ‘주님 어떻게 기도하는지 알려주세요.’ 주님의 기도는 달라 보였습니다. 어쩌면 주님은 기도를 마치신 후에 더 평화로와 보이셨고, 더 힘차 보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선생님처럼 기도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들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의 기도 첫 단어는 ‘아버지’ 입니다. 성경의 언어 또한 파테르로 시작합니다. 영어 성경과 마찬가지로요. “our father”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은 아람어 아바인데, 그것은 오히려 daddy 와 가까운, 매우 친근한 언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도는 그 이름을 부르는 일이 제일 먼저 입니다.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을 부르며 시작하는데, 그 호칭이 야훼 도 아니고, 또 다른 어떤 화려한 수사도 아닌 아빠 혹은 아버지 입니다. 토마스 왓슨이라는 신학자는 세 가지로 아버지의 의미를 표현합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 우리를 택하신 분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살피시는 분. 그런데, 사실, 아빠라는 말이 주는 느낌을 아는 우리들에게 이런 정의는 큰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빠하면 그 사랑과 친밀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모두 다르기에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사랑 많으신 아빠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부르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시고요. 그런데 그 아빠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땅에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아빠와는 다른 분입니다. 전도서 5 2절의 말씀이 하늘에 계시다는 뜻을 조금 자세히 알려 줍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전도서 5 2)
그러니까, 여기 주기도문의 첫 문장 속 두 단어, “하늘” “아빠”. 속에 그분의 위대한 신비가 드러납니다. 하늘에 계신 아빠. 그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입니다. 하늘에 계시기에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이전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주로 이런 존재였습니다. 언제나 두렵고, 그래서 그 앞에서 목숨을 건지고자 재물로 제사를 드리고, 떨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부르라고 가르치시냐면, 아빠하게 하십니다. 갓난 아이를 안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아빠의 모습, 혹은 집 떠나 아들을 기다리며 매일 같이 집 앞에 나와 있는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가 바로 예수님이 알려주신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에 하늘에 계시다라는 말은 또 하나의 가르침을 줍니다. 당시의 어떤 바리새인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장소, 즉 시온과 그의 성전에 묶여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 인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를 그리심 곧 세겜 남방에 있는 산이라고 생각했구요.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은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가 곧 선지자임을 깨달은 남편 많았던 그 여인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 대답하십니까? 이산이 옳다 저산이 옳다 할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맞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얽매여 계신 분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디든 계신 분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늘.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어디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이 없는 곳은 없지요. 말 그대로 무소부재 부재한 곳이 없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늘은 무경계합니다.
요즘 메디슨의 하늘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는데, 그 표현이 참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런데, 참 다행스러운 것은 그 예쁜 하늘을 독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도 이 하늘이 자기만의 하늘이라고 우기지 못하고, 그 하늘을 한평 이라도 독점적으로 소유하지 못합니다. 내 하늘이 니 하늘이고 니 하늘이 우리 하늘입니다. 그 하늘을 누림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6 9절 바로 위, 6 6절에는 기도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쓰인 표현이 이렇습니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네 아버지가 (6) 단수입니다. 그런데, 주의 기도는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사귐을 갖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없습니다. 모두는 각자의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골방에서 만나야 하는 그 분 말입니다. 그런데, 또한 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 아버지 마음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듯 이 사람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특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가 우리 아버지이시니 우리는 자매이고 형제임이 분명합니다. 교회에서 자매님 형제님이란 말을 쓰는 것도 그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신 예수님은, 이어서 여섯 가지 기도를 드리십니다. 첫 세 개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입니다. 아버지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뜻이 이 곳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다음 세 개는 우리에 관한 것입니다. 하루치의 양식을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악과 시험을 이기게 하소서.
오늘은 이들 중 첫 번째 기도까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부른 후에, 그 첫 기원은 바로 아버지 이름의 거룩해지심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먼저이지요. 아주 많은 경우 우리의 기도는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려고 눈믈 감자마자, 하나님 뭐가 필요하고, 뭐가 필요합니다하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아버지 되신 그 분께 우리의 필요를 말하는 것. 당연한 것이지요. 그런데, 항상 그런 기도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모두 그런 것이라면, ‘하나님과의 사귐은 깊어지기 힘들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말씀과 찬양 가운데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면, 우리는 먼저 그의 이름을 높여 드리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의 중심이 나에서 하나님으로 옮겨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기도 생활에서 이게 매우 중요한데,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깊이 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그 분의 이름을 높여 올리게 됩니다. 수많은 영성가들이 공통적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면 자연스레 우리가 기도처로 가지고 온 짐들은 가벼워지기 마련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내 안에서 높이 올려지고 찬양받게 되면, 나의 문제는 아주 사소한 것 이지요. 하나님의 존귀 앞에서 나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게 됩니다. 이게 바로 기도의 맛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이름이 높여 지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거룩해 지는 것. 그것이 먼저입니다.
헬라어 문법으로 이 말은 수동태 명령입니다. 우리 말이 그렇듯이 명령의 형태는 강력한 기원을 나타내는데,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신적인 수동태라고 하여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으로 거룩하신 분이지만, 이 기도 속에는, 우리의 다짐과 고백도 담겨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그 딸과 아들로 인해 영광 받으시기를 주저하지 않는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매 주일, 이 기도를 드리는 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 사회와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온전히 거룩하게 여겨지는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한 목사님은 이 기도를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내 안에 거룩하게 여겨지는가, 아버지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북한 땅에서, 할렘가에서 또 폭력과 전쟁이 있는 바로 그 땅에서 지금 거룩하게 여겨지고 있는가?
하나님 딸과 아들들의 공동체, 바로 이 교회로 인해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는가? 아니면수치를 겪고 계신가?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 뜻이 그가 지으신 이 세상 구석 구석에서 구현되고 있는가? 주의 기도, 그 첫 기원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기를 바라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망령된 우상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소서. 하는 바램이고 다짐입니다.  
주의 기도를 따라하는 우리를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다시 거룩해 지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부터 시작되는 일 주일간의 예배입니다. 마태복음 5 16절에 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렇게 살아갑시다.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