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며 듣는 설교 - 도시락을 둘러 싼 사람들 (요한복음 6장 8절 – 13절 ) - 2015년 7월 26일

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오늘은 조금 새롭게 설교를 들어 봅시다. 주보의 뒷장이 백지입니다. 인쇄가 잘 못 된 것이 아니고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을 그려 봅시다. 자유롭게 떠오르는대로 그림을 그리시면 됩니다. 설교 중간에 옆 사람과 그린 것을 나누는 시간을 잠깐 가져 보지요. 이런 경험을 통해 말씀을 보다 깊이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소위 오병이어라고 하는 이야기는 거의 모든 크리스챤이 아는 이야기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기적으로 여겨지는, 이야기의 숫자들에 너무 마음을 많이 빼앗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거나 작은 도시락이 뻥튀기 됐다는 기적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 6 2절은 표적을 보고 따르는 사람들무리라고 합니다. 그들은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기적을 통해 정작 알려 주시고 말씀하시고자 하는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그것에 관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저 무리입니다. 바다를 만드신 분의 아들이 바다 위를 못 걷겠습니까? 매일 햇빛과 비로, 땅과 공기로 먹을 것을 길러 내시어 온 인류를 먹이시는 분이, 오천 명쯤 한번에 못 먹이시겠습니까? 오늘의 말씀은 세상에 이런 일이 2000년 전 이스라엘 버전이 아닙니다.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하며 나아가 봅시다.

성인 남자만 오천명. 그러니까 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다 들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은 바다 (호수)를 등지고 서셨을 것입니다. 해풍을 타고 생각보다 멀리 이야기는 퍼져 나갔습니다. 소음이 많은 우리네 환경은 마이크를 필요로 하지만, 그 때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숨죽여서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그날 이야기하시고, 더러는 고쳐 주시기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났다고 전해 줍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이 여기셨다고 합니다.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이 수없이 모여 있습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자들은 유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먹을 것도 매일 매일 걱정해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할지 물어 보십니다. 빌립이 말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데나리온이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라고 하면 대충 계산해서 천만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만 명으로 쳐서 천원 짜리 식사만 먹여도 말입니다. 다른 복음서의 어투를 읽어보면, 사실은 짜증이 섞여 있는 반문입니다. 어디가서 사 먹입니까? 다른 제자는, 마을로 보내서 각자 해결하게 하는 게 어떠냐고 합니다. 지금 있는 곳은 호수 건너편 광야 인데 말입니다.

평화롭기만 했던 해변의 설교는 여기서 커다란 갈등을 만납니다. 대립의 축은 합리적이고 계산 정확한 제자들과, 양을 잃은 무리 같이 배가 고픈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대립각 안쪽으로 한 아이가 끼어 듭니다. 도시락 하나를 들고 말입니다.
   
    자 그림이 어느 정도 완성 되셨습니까? 그림을 완성하시는 동안 오늘 본문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리지요. 파커 팔머라는 퀘이커 출신의 작가가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에 그는 시카고에서 덴버에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고 합니다. 활주로에 올라간 비행기에서 기장이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승객 여러분 나쁜 소식과 아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나쁜 소식은 덴버에 기상이 좋지 않아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고, 아주 나쁜 소식은 기내에 어떤 음식과 음료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비행기에서 식사를 제공하던 시기의 이야기라고 하네요) 사람들은 하나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혜로운 승무원 하나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하지요. 바구니 하나를 돌릴테니, 여기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음식을 모아달라는 것입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먹어야 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보다 배가 고픈 사람도 있을 테니 자비롭게 음식을 모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바구니가 한바퀴 돌면 다시 바구니를 앞에서부터 뒤로 보내서 모두가 먹고 싶은 것을 꺼내 먹도록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주머니와 가방을 열어 음식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는 땅콩을 어떤 이는 치즈와 초콜릿을, 좋은 와인도 등장했고, 뜯지 않은 샐러드 박스도 모아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나누어 먹으며 지루하게 기다리는 시간을 나눔과 웃음의 시간으로 채울 있었습니다. 근심과 요구, 불만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사랑으로 변한 것이지요. 덴버에 도착한 파커팔머는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승무원에게 말했습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들에서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은 이야기요그러자 승무원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알고 있어요. 이야기가 제게 이런 제안을 떠오르게 걸요?’ 나눔과 사랑을 생각하는 사람의 힘은 공동체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사람의 지혜와 용기이면 충분합니다.

이제 그림이 완성되었으면 옆 사람에게, 자기 작품의 감상 포인트를 설명해 주시지요. 그림 속에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그림 속에 도시락을 둘러 싼 사람들의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신다면 어디쯤 여러분을 놓으시겠습니까? 당신은 그림 속에 어디에 있습니까? 어쩌면 보리떡을 먹는 행복한 사람들 중 하나일지 모르겠습니다. 맛있게, 배부르게 식사 중 이시군요. 주의 곁에서 배불리 먹는 일은 행복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일이 되어 음식이 소화되고 배설되면 다시 배가 고파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그들은 자기 배를 부르게 해 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홀로 몸을 숨기십니다. 배부른 것이 인생의 목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먹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들의 잔치는 금새 끝나고 말 것입니다.

혹시 제자들 중에 여러분이 서 계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또 따릅니다.사람들을 무리지어 앉게 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고, 음식을 나누어 주는 수고도 기꺼이 감당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마음을 온전히 공유하지는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기적의 온전한 동역자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기에, 그날 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예수님의 이름도 부르지 못한 채 떨고 있었나 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들의 배 위에 오르신 후에야 그들이 겪은 풍랑은 잠잠해 졌습니다. 예수님과 한배에 오르지 않는 한, 그와 한 마음을 품지 않는 한, 아무리 예수님 주변에 가까이 있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삶은 불안할 뿐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전해주는 마가복음 7 52절은 풍랑 속에서 떨고 있는 제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함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리라라고 전해 줍니다. 군중이 우리의 영원한 양식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다면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그 경계선에 있습니다.

바램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도시락 주인에게 우리을 일치 시켰으면 합니다. 작은 손으로 작은 도시락을 들고 있는 작은 아이 말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개. 닥친 문제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자원입니다. 하지만 그 도시락이 주님의 손에 들리워 집니다. 주님은 수많은 이들을 먹이기 위하여,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하게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영원히 지속되는 하늘의 만나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 도시락이 필요하십니다.
소년은 믿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도시락이 예수님 손에 들리면 무언가 좋고 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모두를 먹이시겠다는 예수님의 비전에 소년은 기꺼이 그 마음을 알아 자기 소유를 던졌습니다. “예수님 제가 이 도시락 혼자 먹고, 건강하게 자라나서 큰 일을 하게 되면 그 때 배고픈 사람들을 많이 도와줄께요. 지금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이것, 제가 먹어야겠어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지금 이것을 필요로 하시니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소년의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도시락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지고 있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일을 위하여 여러분으로부터 무엇을 요구하고 계십니까? 배고픈 무리들, 계산에 밝은 제자들의 틈에서 주님께서 내심 바라며 바라보시는 여러분의 도시락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께 그것을 던져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루 저녁 끼니를 때우는 일보다 훨씬 더 크고 보람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실, 예수님의 마음을 읽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기 원합니다. 도시락 주변 사람들의 정확한 계산이 아니라, 마음을 함께 하는 소년의 믿음을 통해 주께서 생명을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양식 되심이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평균대 위에 선 신앙 2. 구원, 의롭게 됨 과 거룩해 짐 사이에서 (로마서 1장 16절 - 17절, 빌립보서 2장 12절) - 2015년 7월 19일

함께 예배함이 기쁨입니다. 오늘은 평균대 위에 신앙 마지막 설교 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 그리고 교회에서 많이도 쓰이는 , ‘구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성경에 구원이라고 번역된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는 페레타(탈출 시키다) 혹은 여호수아나 호세아라는 말이 구원의 뜻을 같습니다.  신약 성서에는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된 소테리아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여러분에게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의 말로 구원을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사실, ‘구원이라는 말은 교회에서만 사용되는 특수한 용어 같기도 합니다. 교회 밖에서 쓰이는 경우를 저는 하나만 알고 있습니다. 바로 구원투수입니다. 구원투수는 선발의 힘이 떨어졌을 등판합니다. 지금의 상태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구원은 그럴 필요합니다.

구원에 대한 성서의 이미지는 건져냄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는 인생을 건져내는 . 김광석의 노래, ‘일어나 가사처럼 부초처럼 강물 위를 흐르는 같은 인생이 고요한 호수가에서 물과 함께 썩기 전에 건져내는 일이 바로 구원입니다. 물에서 건져냄의 히브리 말은 모우세 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물에서 건져진 아이였고, 그를 통해 하나님은 애굽으로부터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을 건져내셨습니다. 물에 떠내려가는 바구니. 누군가 건져주지 않으면 스스로 구원할 없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구원의 절실함은 우리의 자기 인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렇게 구원에 대해 자신이 있는 일이 없음에 고달파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 폭풍우를 지나가다 옆에 길을 걷던 친구가 번개에 맞아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이란 이렇게 가볍고 무상한 것임을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사제가 되기로 서원을 합니다. 광부의 아들로 법률가가 되는 공부를 했던 사람은 자기 삶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흘러가는 같은, 무상한 인생에서 건져지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죽음과 삶의 무상함을 이기고 영원한 , 변하지 않는 진리를 누리기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경건한 삶을 추구하던 그에게 종교적 시련이 찾아 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는 중입니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기에 옳지 않은 것과는 어울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보니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수도원에 있었던 그가 우리보다 타락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걱정을 만큼 자신의 죄를 사죄하기 위해 금식을 하기도 했고, 주임 신부가 귀찮아 정도로 고해 성사를 반복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없다고 여겨 졌습니다. 그의 고민은 이런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인정되려면 죄를 처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반면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면 자기는 구원을 받을 없게 됩니다. 수많은 밤을 고민하던 마틴 루터에게 로마서의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엄청난 희망으로 말입니다. 그는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 16,17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의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랑의 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하는 근거가 됩니다. 로마서 말씀을 통해 전해진,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으로 보여진 하나님의 의란 우리를 심판하시려는 의가 아니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입니다. 은혜의 칭의 없이, 우리는 의로울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분의 주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 주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찾아와 불러 주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어느 것보다도 큽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역할은 은혜를 믿는 . 구원의 손길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죽어서 하나님 나라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곳으로부터 시작하는 하나님과의 동행. 그것이 바로 구원의 건전한 이해입니다. 구원의 기쁨은 죽는 순간까지 유보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곳으로부터 천국의 , 하나님의 다스림은 시작됩니다.

그러기에 루터를 중심으로 모든 개신교인들은 이야기 합니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는 정말 소중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말이 항상 충분한 진리를 담아낼 수는 없는 법인가 봅니다. 말은 행위가 자체로 우리를 구원할 없다는 겸손의 표현인데, 마치 행위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자주 오해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맞지요) 착해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맞는데요…) 뜻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 입니다. 착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아서 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롭게 여겨짐 - 칭의는 사실, 구원의 축일 뿐입니다. 다른 축을 우리는 성화 거룩해 짐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칭의 혹은 의인화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면 성화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 말할 있습니다.

성화의 과정이 무시된 구원은 우리의 믿음을 값싼 것으로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 목사님은 칭의를 구원의 현관porch 라고 비유합니다. 현관을 지났으면 성화의 은총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분의 다스림이 온전해 져야 합니다. 건져졌으면 건져내진 사람 답게 살아야 한다.

야고보는 칭의를 강조하다가 성화의 중요함을 잃은 사람들, 균형을 잃은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 2:17)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다. 그런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바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입니다. 바로 위의 절입니다. “만일 형제가 필요한 것이 있는데,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으면…” 전에 성경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모든 성경의 말씀은 예수님의 삶을 기준으로 이해 되는 것이 안전하다고 말씀드렸지요. 예수님도 같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헐벗고 굶주린 자를 돌보지 않는 것은 나를 돌보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돌보지 않으면 관계가 없지요. 구원이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작은 자들, 헐벗은 자들을 돌보지 않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소원한 것입니다 구원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건져주시는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은혜로운 사랑을 믿기만 뿐입니다. 그리고 의롭게 여겨져서 구원의 현관에 들어섰다면 매일 매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께 우리 삶을 맞긴 구원의 , 하나님과 더욱 깊어지는 관계의 여정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가운데 작고 약한 이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