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오늘을 어린이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 그리고 교회의 미래인 그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게 지혜를 모으며 함께 기도하는 일이 오늘, 어린이 주일에 하기 좋은 일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 말에 비추어 보면 안타깝게도 우리는 한살 한살 먹을 때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에, ‘우리의 신앙은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가’ 한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린이라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하긴 하지만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고 욕심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아이들을 길러 보니 더 잘 알겠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그들은 어쩌면 그저 죄 지을 능력이 없을 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과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 하십니다. 이는, 어린 아이들의 ‘절대적인 의존’ 을 이야기 하신 듯 합니다. 부모를 깊게 믿는 그 마음 말입니다. 제 아들 도진이는 아무리 높은 곳에 있어서 아빠가 손을 벌리면 뛰어 내립니다. 수영장에서도 그렇고, 식탁 위에서도 그러합니다. 며칠 전에 동물원에 갔는데, 사자를 보고 무서워 합니다. ‘아빠가 지켜줄께!’ 라는 말에 ‘맞아’ 하며 편안한 미소를 보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책임져 준다는 마음. 그 의심 없는 마음은 분명 아이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십니까?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위험해 보여도 그리로 믿고 몸을 던지십니까? 맹수의 울음소리 앞에서, 아니 그 보다 더 무서운 세상의 위협과 위험들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편안함을 느끼십니까?
지난 주에,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끌려간 베드로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당신들이 판단하시오! 라고 말하는 베드로에게서 어린아이의 모습을 봅니다. 진리를 향해 몸을 던질 때, 하늘 아버지가 지켜 주실 것이라는 온전한 확신, 이겨낸 의심이 그를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게 합니다. 설사 죽더라도 살려내시어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베드로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도행전은 거듭 나서 어린아이처럼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전해 줍니다. 사도행전 뿐 아니라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아이들’ 이야기 입니다.
오늘은 이스라엘을 넘어 세계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중하게 사용되었던 한 교회의 모습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바로 수리아 안디옥에 세워진 한 교회 입니다. 사도행전 11장은 이 곳에서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기독교인이라 불리웠다고 기록합니다.
사도행전의 전반부, 그러니까 12장까지 예수 운동의 본거지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럴 것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참 제자가 된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박해를 이겨내며 복음을 지키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 땅을 넘어서 온 세계, 땅끝 까지 복음이 전해지는데 쓰임 받은 교회는, 예루살렘가 아닌 바로 이 안디옥에 있는 교회 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초기 기독교의 산실이라면, 안디옥교회는 이민자들이 세운 작은 교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규모나 정통성에 있어서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변방의 안디옥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욕심을 조금 부려 보자면 저는 이민자와 유학생들로 이루어진 우리 교회가 안디옥 교회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를 사용하셔서 세계 가운데 복된 소식을 펼치실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처음으로 소개되는 부분은 사도행전 11장 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때문에 흩어진 성도들이 안디옥이라는 곳에서 신앙 공동체를 세웠다는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집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그곳에 파송하는데, 그가 다소에 있던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갑니다. 지금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는 뜨거운 경험을 하였지만 주를 위해 아직 일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가 원래 몸 담고 있는 유대교 공동체는 변절자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이 그를 구해주었긴 하지만, 여전히 그의 회심과 변화를 신뢰하지 못합니다. 신뢰한다고 해도 선뜻 교회 공동체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사울)은 자기들을 핍박하던 자요, 스데반 집사의 순교에 간접적으로 동참했던 자이기 때문입니다.
때론 예수님을 만난 뜨거운 경험이 우리를 어렵게도 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만사형통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달라진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가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어색하고 어렵게 할 때가 있습니다. 세례 받은 날 차 사고를 겪은 성도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좀 억울 할 수 있지만 그럴 때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그 인내와 연단의 시간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일지 모릅니다. 모든 상황이 변한다고 한들, 내가 변하지 않으면 그 변화가 의미 없는 것이기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그분의 계획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내와 연단의 시간 속에 주님은 우리가 바나바와 같은 인물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바나바 - 위로의 아들 이라는 이름 뜻을 가진 이 존재는 교회에서 꼭 필요합니다. 바나바가 많을 수록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을 초대하고 받아들여 주는 사람,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사람. 이 바나바를 통해 바울은 참 그리스도인 그리고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갑니다. 오늘 설교의 부제는 ‘진짜 교회’ 입니다. 바나바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뜨거운 바울을 어디로 데려갈 지 참 곤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 때문에 자신의 권위가 타격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라면’ 바울의 변화와, 그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진짜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변화를 경험한 누군가가 설 자리를 마련해 주는 공동체, 자신의 선입견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내려 놓을 줄 아는 공동체. 그것이 바로 진짜 교회입니다. 진짜 교회의 모습을 좀 더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13장은 이 교회의 리더쉽을 열거합니다. 1절입니다.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당시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 요즈음 말로 안디옥교회를 이끌어가던 지도자들의 명단으로 총 다섯 명의 이름이 나타나 있습니다.
제일 먼저 '바나바'입니다. 그는 본래 유대인 레위지파 출신으로 구브로의 유력자였습니다. 오순절 성령을 경험했던 그 다락방 주인의 형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의 이름은 '위로의 아들' 혹은 '격려의 아들' 입니다. 바나바가 그만큼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삶을 살았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교회 지도자로서의 덕목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행여 자기 동료를 죽인 자라고 할지라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용서의 사람입니다.
그 다음으론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입니다. 니게르는 ‘검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 그 영어 단어와 어원이 갖습니다. 다른 소개가 아니라, 시므온의 인종 - 피부색에 대한 언급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두번째로 소개되고 있는 리더쉽은 유대 공동체의 주류와는 다른 인종, 흑인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입니다. 구레네란 아프리카 북쪽 지중해 연안, 즉 지금의 리비아에 그리스 사람들이 세운 도시였습니다.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여전히 베드로에게 문제가 되던 시기입니다. 루기오란 그 도시 출신이란 것 외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무명 인사였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안디옥교회의 지도자 반열에 올라 있었습니다.
네 번째 인사는 헤롯의 젖동생으로 알려진 마나엔입니다. 젖동생은 함께 자란 사람 혹은 죽마고우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헤롯의 친구라면, 당시 최고 집권층 출신임이 분명하지만 유대인들로서는 민족의 원수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울입니다. 그는 정통 바리새파 출신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면 주님으로부터 위선자로 질타 당하던 무리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주님을 부정하고 주님 믿는 자들을 박해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격으로 따진다면 교회의 지도자는커녕 교인이 될 자격조차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안디옥의 지도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다섯명이 바로 안디옥 교회의 특성이요, 자랑이었습니다. 신약성서, 특히 바울의 편지들 속에는 아주 많은 초대 교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의 지도자들이 누구였다고 상세히 밝히는 교회는 많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의 리더들이였다고 말해 줍니다. 이들의 면면은, 이 교회가 이미 각양각색의 사람을 구별 없이 품고 있는 참된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처럼 성직을 담당하는 정통 레위인이 있는가 하면, 흑인 시므온이 있었습니다. 전혀 무명의 이방인 루기오도, 유대인이 비웃고 미워하던 집권계층의 마나엔도, 그리고 주님의 대적자였던 바리새인 사울도 있었습니다. 그들 각자는 결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는 이질적이고도 배타적인 배경과 경력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그들은 국적, 신분, 지역, 계층, 인종, 사상을 초월하여 한 지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런 곳입니다. 본래부터 이런 곳이고, 또 이런 곳이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를 꿈꿉니다. 이런 진짜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교회를 하나님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소위 말해 ‘하나님적’ 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전혀 다른 우리와 함께 하시고 어울리신 분이십니다. 완전하고 거룩하신 주께서, 그와는 전혀 다른 존재인 우리들과, 사랑 하나 때문에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분을 닮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 딸 수진이가 며칠 전에 저를 급하게 부릅니다. ‘아빠 발목에 혹이 생겼어!’ 하길래 보았더니 복숭아 뼈입니다. 귀여워서 좀 놀려줄까 하다가 썩 심각해 보이기에 ‘그건 사람들 다 원래 있는 거야 아빠도 있잖아’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제 복숭아뼈를 보여주면서요. 안도의 표정을 하고 있는 수진이에게 물었습니다. ‘왜 아빠랑 수진이는 이게 똑같이 있을까?’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빠랑 딸이잖아!’
아빠와 딸은 닮아야 합니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늘의 아버지는 경계없이, 차별 없이 모두와 어울리신 분이고, 모두를 인정해 주신 분이고 그들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딸과 아들인 우리가 그 분의 그 모습을 닮기 원합니다. 옥토가 왜 옥토인줄 아십니까? 옥토는 자기와 다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냄새가 나고 깨~끗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 다양한 것들이 섞이는 가운데 옥토가 만들어 집니다. 사막은 모래 한가지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기와 같거나 닮지 않은 것은 모두 몰아냅니다. 그리고 그곳엔, 아무런 생명도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옥토와 같기를… 그래서 우리 안에 생명과 열매가 계속하여 자라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고자 결심 할 때, 주께서는 이 작은 이민자 공동체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구원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