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 설교 - 광야의 나비떼 (열왕기상 19장 1절-4절, 11절-13절)

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미국의 중서부에 사는 우리들에게 벌판 또는 광야는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차를 타고 오래도록 달릴 때면, 여기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종종 하게 되지요. 오늘은 그 광야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어떤 장소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조금 하신 분이라면 엘리야에 대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경에 엘리야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열왕기상 17장인데,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만 하는 아합 왕에게 담대하게 나아가서 ‘이 땅에 비는커녕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경고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아합을 피해서 까마귀들이 물어다 주는 빵과 고기로 목숨을 유지고요, 사르밧이라는 동네에서는 한 가난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내기도 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열왕기하 1장에서는 엘리야를 쫓던 군사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불에 맞아 전멸하고, 2장에는 결국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죽지 않은 채 하늘로 들려 올라갑니다.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냐면,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구약을 대표해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그리고 그를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웅 중 영웅으로 만드는 사건은 바로 이 갈멜산의 이야기입니다.
3년의 가뭄 끝에 아합을 만나거든요. 그 때에, 엘리야는, 누가 진짜 하나님이신지 당신들이 섬기는 바알이 진짜 인지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신지 겨루어 보자고 합니다. 사실, 그 땅엔 여호와의 선지자가 최소 100명 살고 있었습니다. 18장을 보면, 바알의 아랫사람이었던 하시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처형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100명을 살려주고, 숨겨 놓거든요.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엘리야 만큼 담대하게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가 제안한 대결은 제물 위에 불을 내리게 하는 시합이었습니다. 850 1 (19) 또는 450 1 (22) 의 대결입니다. 먼저 바알과 이세벨의 선지자들이 제단 위에 불을 내리는 시도를 합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춤을 추고, 기도를 하고 결국 (28) 자기 몸을 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요. 엘리야는 그들을 비웃습니다. 그들이 결국 포기하자 엘리야는 그곳에 다시 제단을 쌓습니다. 엘리야의 당당함, 하지만 또한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떨림과 흥분. 느껴지십니까? 우리야 이 이야기의 결과를 알지만, 엘리야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성실하심만을 믿고 있습니다. 그는 단 위에 각뜬 소를 올려 놓고 네 양동이 가득한 물을 붓지요. 그렇게 세번, 열 두 양동이의 물을 붓자 제단은 흥건히 졌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37주님 응답하시옵소서 응답하소서. 이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이 주 하나님이시며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주님이심을 알게 하소서.
주님의 불은 제단과 나뭇단과 돌들과 흙을 태우고 제단을 둘러 싼 도랑의 물을 모두 말려 버립니다. 위대한 승리. 이 갈멜산의 승리는 지금도 수많은 이들에게 인용되고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열왕기 기자가 전하는 엘리야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만으로도 참 가슴 뛰는 이야기이지만, 19장으로부터 시작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화려한 승리의 끝에서 보게되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 엘리야의 이야기 말입니다. 위인전 좋아하세요? 저는별로 입니다. 왜냐하면 한 인물을 찬양하기만 하는 위인전을 읽다보면, 그 사람과 저와의 괴리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 이 사람은 참 훌륭한데, 나랑은 다르구나하고 책을 덥습니다. 열왕기상18장에서 독서를 마친다면 엘리야도 그들 중 하나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 1절부터 아주 다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지금, 자신의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합의 부인,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그를 뒤쫓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3절 입니다. (새번역)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서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합니다. 당당했던 엘리야, 그런데 지금 그는 자기 목숨을 지키기에 급급한, 너무나 평범하고 어쩌면 유약해 보이는 한 남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광야로 갑니다. 위대한 승리를 거두지만, 이내 그는 광야로 향합니다.
어쩌면 그 당당하고 능력 많았던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광야로 도망가는 모습이 어색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광야를 경험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해 광야에서 비참한 도망자 신세로 쫓겨 다녀야 했고, 아브라함이 가족들의 품을 떠나 향했던 곳도 역시 가나안 남쪽 네게브 사막이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살았고, 그 후 출애굽 40년을 또 광야에서 지내게 됩니다. 어디 구약의 인물들만 그렇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에 의하면 바울은 다메섹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3년동안 광야생활을 해야 했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 요한은 틀림없이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도 광야를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동안 사단에게 시험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앤드류 루스는 ‘하나님의 광야’라는 책에서 광야가 갖는 두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이야기하는데, 그 첫 번째 설명은 ‘광야가 치열한 싸움의 장소. 육체적 고통과 죽음의 공포, 고독과 그리움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죽음을 기다리고 이곳은 원래 죽을 수 밖에 없는 땅입니다. 10절에서는 엘리야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껏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열심히 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전혀 회개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이고, 이제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까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절망의 순간, 죽음의 목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19 5절과 6절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때에 한 천사가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서 그를 깨웠다. 엘리야가 깨어보니, 그의 머리 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낸 과자와 물 한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잠이 들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바로 광야가 갖는 두 번째 의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는 장소입니다.
엔드류 루스는 광야의 두 번째 의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광야는 고요와 정적의 장소이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인간 실존의 심연에서 하나님을 독대하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광야는 죽음의 땅인 동시에 진정한 생명의 땅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 광야에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만나 주시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큰 바람과 지진과 불이 지나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세미한 음성으로, 구운 떡과 물을 준비하신 것과 같이 부드러운 방식으로 엘리야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물으시지요.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정작 죽어가는 엘리야를 살린 것은 바람도 불도 지진도 아닌 작고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깊은 만남이 나비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합니다. 나비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로 나비는 예언자라는 뜻입니다. 광야의 나비란, 광야의 예언자들이라는 말이고, 우리말 나비가 갖는 그 자유로움과 평화스러움이 예언자의 그것과 닮았기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칼 라너는 예언자란 초자연적인 하나님 경험을 역사속에서 객체화하고 구체적으로 해석하는 존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 하나님과 원활하게 의사소통하는 자들. 그리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나비들 입니다.

우린 모두 광야를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우리 자신이 매우 자신있고, 믿음으로 똘똘 뭉친 사람처럼 보이지요. 850 1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당당한 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때론 하루만 자고 나면 한없이 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 불안함이 광야처럼 우리를 삼키려하지 않는지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 바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참으로 곤고하고 피곤한 우리의 인생이 광야와 닮지 않았습니까? 우리 모두는 각자의 광야를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질병이, 경제적 어려움이, 상실과 소멸의 두려움이, 현대의 무한 경쟁 사회가 주는 압박과 스트레스가, 그리고 인간 존재가 갖는 근원적 공허함과 외로움이 우리를 로뎀나무 아래에 지쳐 쓰러지게 합니다. 게다가 세상을 둘러보면 그 고통과 두려움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지쳐있는 엘리야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지친 그를 다시 나비 되게 합니다. 세미한 음성,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서 나비는 다시 날개짓 할 힘을 얻습니다.

이제, 엘리야의 회복을 통해 척박한 땅, 희망이 없는 땅 그래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눈물의 땅에서 나비떼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의 나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이 마음껏 날개짓 하며 역사를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그 부르심은 이 곳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광야 한 가운데서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진리만을 사는 나비를 주님은 부르고 계십니다.  
이사야서 기자는 광야에 대해 이런 환상을 기술합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피고 향기가 나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라.

나비가 되어 자유하게 날아 다니길 소원합니다.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