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이 된 사람들 (사도행전 1장 6절 - 11절)

 (자매교회인 보스톤 비젼 교회 선교부 헌신예배에서 나눈 설교)

주님 안에서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위스콘신주 메디슨에서 개척교회 사역을 하고 있는 한명훈 이라고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몇장을 더 넘기면 베드로가 고넬료라고 하는 경건한 로마 군인과 또 그 무리를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연결해 주심으로, 성령에게 이끌리어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대면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베드로도 아니고, 여기가 가이사랴도 아니지만, 그가 처음으로 고넬료의 집 문을 열고,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했던 말이 참 좋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4절 말씀입니다..

내가 깊이 깨달은 바가 있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신다.

이 시간 하나님 마음 배우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영적 시야와 깨달음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앉았습니다. 교회란 모름지기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아주는 곳이어야 할텐데, 말씀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로 마주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서로의 외모와 조건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영혼들의 교제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잠깐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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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정도 전에, 이스라엘을 가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라고 하지만, 사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 중 최고^^는 승천교회라는 곳입니다. 성서학자들도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어디서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거기에는 주님이 승천하셨다는 지점이 있습니다. 교회가 지어져 있는데, 두가지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제가 이렇게 까칠한 건,사실 교회라고 지어 놓고 들어갈 때 돈을 받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이해가 가지 않던 첫번째는, 천장이 막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올라가시지요? 유리로라도 해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두번째가 더 이상한데, 예수님이 떠나셨다는 자리에 발자국 모양으로 패인 돌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거기서 올라가셨답니다. 아무리 영혼의 무게가 무거워도, 바위가 파였을리 없지요.
 매우 희박한 가능성 또한 무시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저는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실 때 억지로 가시지 않으셨다고, 점프 하지 않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가 승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니, 발자국이 파일 리 없습니다. 원래 바위에서 점프를 뛴다고 바위가 파지지도 않지만요.

그렇게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신비하게, 부활하신 지 40일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성령을 약속하시고요.  그는 마치 시간에 쫓기듯 아쉬워하며, 억지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아직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박해도 있고, 예수님의 사역을 왜곡하는 이단과의 진리 싸움도 남아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 없이 무엇을 해야할 지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개척교회 목사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처음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어려움이 많으세요’ 입니다. 무척 측은하게 저를 바라보시지요. 염려해 주시는 말씀이 고맙긴 하지만, 때로는 제가 너무 괜찮으면 안된 것 같은, 뭐 그런 느낌도 좀 받습니다.  10년 전에 이 교회가 개척될 때도 그랬을 것입니다. 작은 교회, 개척교회에 출석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단한 결정을 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깊은 사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괜찮은데 말이지요.

 그런데, 이들의 상황은 교회 개척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겁니다. 불과 한달 반 전에 자신들의 선생님을 사형시킨 권력이 여전히 건재합니다. 자신들을 지원해주는 교단이나 협력교회도 없습니다. 아니, 그들이 전하려는 예수의 복음은 세상을 혼란스럽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떠나시며 세상으로 보내시는 일에 조금의 주저함이나 아쉬움이 없으셨고, 그들도 기쁨의 예배속에 자신들이 떠나왔던 도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무엇을 할지 몰랐던 것도 같습니다. 9절에 보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려지시고, 구름이 가리워 이제는 볼 수 없게 됩니다. 놀라운 광경 속에서, 누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시선으로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져 있겠지요. 그리고 약간은 멍한 상태였겠지요.

그 때, 성경은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말하였다고 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여, 하늘만 쳐다보고 뭐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는 일은 정말이지 즐거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좋다고해서 계속 하늘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기도가운데, 그리고 찬양가운데 우리는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평안함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만남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이 질문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이 말은 들은 이 중에 세명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어떤 산에 올라갔던 일을 기억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주께서 하루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시잖아요. 그곳에서 그 분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시고,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아와 함께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하지요. 주님 제가 이곳에다가 집을 지을 터이니 여기서 같이 삽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말에 대답도 안하시고 다음 날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왜냐하면 산 아래에는 귀신에게 잡혀 있어 경기를 하고, 자기 몸을 상하게 만드는 아들과 그 아들을 고쳐줄 수 없어서 울고 있는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부 헌신예배이지요.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주의 손과 발 된 여러분들을 깊은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바램과 기대가 있다면, 선교부원은 아니더라도 주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선교부가 하는 일,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 예수의 진리되심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 세상 가운데 증인이 되라 하시는 말씀은 제자들 중에 선교파트에 헌신한 사람들에게만 주신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선교사이고, 선교부입니다. 교회의 사명이 가르침을 펴는 일. 복된 소식을 전하는 일. 바로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 언제쯤 주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렵니까? 6절 말씀이지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이제 확실한 믿음을 가졌으니, 주께서 곧 이 땅의 아픔과 비극을 종결시키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날이 언제입니까? 그러자 주님은 말씀하시지요. “니들이 알 바가 아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세상의 종말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의 장수들이 전쟁에서 이길 때 마다 부하 중 하나에게 메멘토 모리 - 당신도 죽을 것을 기억하라. 라고 말하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것이 우주적인 종말이건, 아니면 내 개인의 소우주적 종말이건, 머지 않아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아버지의 소관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기독교적 종말론이지요. 언제 지구가 멸망할 지 그런 거에 신경쓰지 말고, 지금을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사랑하고 행복하고 또 싸운 것이 있으면 지체하지 말고 가서 화해하면서 살아라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의 질문을 교정하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언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주께서 언제 하시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 성령을 받으면,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될 것이야.”

하나님이 정하신 날에, 이 땅을 온전히 회복시키시겠지만, 너희들의 몫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증인이 되는 일이야. 그것도 나의 증인, 예수님의 증인 말입니다.   
주님은 증인이 필요하십니다. 하나님 손이 짧아서요? 그가 자신의 진리되심을 증명할길 업이 억울하셔서요?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증인이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4장에, 이 제자들이 법정에 섭니다. 그리고, 예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요한과 베드로가 말하지요.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는 이런 증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아니,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이런 증인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증인 이라는 말은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요즘 한국 뉴스를 보면 증인들이 참 많이 나오지요. 우리는 증인들의 진술을 통해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와 땅끝이라는 부분에 집중해 왔습니다. 복음이 확대되는 모습 말이지요. 내가 서 있는 이 곳으로부터 세상 끝까지 확대되는 복음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세상 끝에 가서 무엇을 할지… 우리에게 걸고 계신 주님의 기대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측 증언들이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해 질 것이다. 맘몬의 유혹이지요. 성적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으면 행복해 질 것이다. 또는 너만 높아져라. 큰 권력을 갖고 떵떵거리며 살아라. 하나님은 너를 갑으로 부르셨다… 그러니 누려라…

  증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의 삶과 죽으심과 부활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주장들에 대하여, 틀렸습니다. 하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보여주는 일입니다. 황제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로마의 평화가 맞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진리와 생명은 힘과 지배의 백마를 탄 군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겸손하고 온유한 나귀를 탄 예수님에게서 온다. 내가 그것을 보았고, 알았으며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가족들을 모두 모아, 저 섬에 들어가서 너희들의 왕국을 건설하여라 하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증인이 되라 하십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하십니다.

비열한 도시입니다. 가장 위대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래서 호산나 호산나 하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했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목격해야 했던 그 땅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곳을 떠나라 말씀하시는 대신 거기서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예루살렘은 어디십니까?  그들의 지리적, 민족적 배경이 되는 “유대” 그곳에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개척교회 목사로서,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려고 다가서면, 한발 물러납니다.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니까, 그 사람들이 나를 필요하게 여기게끔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학생들에게 가구를 얻어서 나누어 주는 일을 시작했지요.

(가구사역)

세상 사람들은 한푼이라도 더 받을라고 합니다. 하지만, 증인이 된다는 것은 나누어 주고 사랑해 줄 때, 돈을 더 받을 때보다 기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또한 주님은 사마리아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시라아의 이주정책이 필쳐진 이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순수하지 못하다’ 여겼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 끝까지 가라고 하시지요. 어디에서든 증인의 삶을 살라 하십니다.  

(강 모습)

보여드리는 사진은 루디아 기념교회의 모습입니다. 유럽땅에 처음 세워진 교회로, 자주색 옷감을 팔았던 루디아를 생각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이 교회 앞에 시냇물에 이런 모양이 있습니다.

비전 교회나 우리나 아마도 물고기를 많이 살게 하는 호수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민교회, 유학생들의 교회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흘러 왔다가 흘러 갑니다. 그래서 목회가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래서 진짜 교회가 되기는 더 쉬운 듯 합니다.

여기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고 증인이 된 사람들이 세상 끝까지 자연스럽게 흘러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증인이 되어 줄래? 그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세상 끝의 증인을 만들어 가는, 좋은 교회가 되기를 계속하여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