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평화, 누가복음 2장 8절 – 20절

함께 예배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날 뭐해? 크리스마스는 예수님 생일인데, 사람들은 예수님 없는 예수님 생일을 계획합니다. 어떤 문화가 되었고, 가장 상업적인 날이 크리스마스. 속에서 사람들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도 구원을 기다리지만, 하나님도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나에게 돌아와라 그러면 내가 너를 받아 주겠다. 그리고, 구원의 역사, 만남과 화해의 역사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땅에 인간 몸을 입고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니, 그냥 눈이 온다고 좋아하고, 사랑 고백을 기회만 찾고그럴 수는 없지요. 훨씬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분명 우리의 인생을 온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그림 하나 볼까요? 첫번째 크리스마스,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입니다. , 그림에서 틀린 것을 찾아보지요.  우선 사람들 백인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고 저렇게 앉아 있을 없습니다. 얼굴은 훨씬 부어 있을 것이고, 요셉 또한 저렇게 평화로운 없습니다. 부인이 애를 낳는데, 옆에서 저렇게 좋아하고만 있으면 머리카락 뜯깁니다 목자들얼마전에 사진 보여드린 있지요? 저렇게 잘생기지 않았습니다. 들에서 자고 먹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몸에서는 동물의 냄새가 나고, 피부는 바람을 많이 맞아 거칠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에 대한 감사함 때문에 아름답게 채색해 놓았지만, 저는 예수님 몸에서 이런 광채가 나지 않았을 같습니다. 그는 온전한 하나님이지만, 또한 온전히 인간이셨기에, 인간이 갖는 모든 경험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야만 그가 받은 시험, 그가 받은 고통,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삶이 진실한 것이 되고, 의미 있는 것이 됩니다.

오늘은 여기 그림이 등장하는, 목자들의 첫번째 크리스마스 경험담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2000년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태어난 어떤 신비한 출생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입니다. 나사렛은 아주 작은 도시입니다. 탈무드에는 이스라엘의 63 도시 이름이 나오는데, 나사렛 없습니다.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도 자신의 글에서 45개의 이스라엘 도시를 언급하는데, 나사렛은 없습니다. 위대한 성탄의 이야기는 거기, 나사렛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던 해에 호적조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본래 집에 가서 등록을 해야 했지요. 마리아의 남편이었던 요셉은 베들레헴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그리로 가서, 거기서 아기를 낳습니다. 이는 오래전에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작을지라도 너에게서 지도자가 나와, 이스라엘의 목자가 것이다’”
작은 마을 출신의 사람들이, 다른 작은 동네에서 출산을 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방이 없어서 아기는 구유에 눕혀 집니다. 그리고 첫번째 손님으로 목자들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요. 목자들은 밤에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납니다.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비추자 그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천사가 말을 하는데, 두려워하지 말아라.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겠다.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시리니, 그가 구세주이다. 너희는 갓난아기를 것인데, 이것이 바로 표징이다. 그런 다음에 갑자기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 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하늘의 영광, 땅에는 평화

이것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출생을 가장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아기의 탄생을 인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땅에는 평화가 임했습니다. 그런데, 노래가 진짜일까요?

땅에는 평화라는 선언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동갑내기 동네 친구가 없으신 분입니다. 헤롯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동방박사가 찾아오잖아요.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이 어디있냐고 묻는 겁니다. 헤롯이 왕인데... 그래서 새로운 왕을 죽이기 위해 헤롯은 베들레헴의 두살 이하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죽음의 이야기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지만, 아이를 금방 나은 장소는 그렇게 평화롭지 많은 않습니다. 감사하고 신비하지만, 내가 아이를 길러낼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엄마는 여전히 아프고, 아빠는 어쩔 모르는 것이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의 모습입니다.

목자들. 손님이 목자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습니다. 거룩하지 못하다고 일컫어지는 사람들이 첫번째 손님이었는데, 그들의 직업은 양을 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바로 목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지난한 삶은 이후로 많이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바로 신분 상승을 하였다거나 그런 없습니다.

하늘에는 영광이라는 말은 어떤가요? 아기의 탄생이 하늘에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예전에 나얼이라는 가수가 시상식에서 일등을 하고 수상 소감을 하는 장면을 기억이 있습니다. 단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한마디만 하고 내려가더라고요. 멋졌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우리가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갓난 애기가 지금 무슨 착한 일을 있겠습니까? 태어나자마자 벌써 일을 하나 이루어서 세상에 하나님을 알렸나요?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목자들은 지금 그저 놀라운 광경을 보며 두렵고 신기한 마음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분명 천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그가 우리 안에 함께 한다는 자체가 없이 높은 곳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전해줍니다. 아직 무얼 하지 않았지만나중에 예수님이 사람들을 많이 고치시거든요.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일이 있기 전에, 천사들은 그저 그가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말해 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멀어질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다리가 되어 주시려고, 화해자가 되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다시 우리를 하나님과 사귀게 하시려고 그는 인간의 몸으로 우리안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사귈 있게, 하나님과 연합할 있게 되었다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귀기 시작하실 영광을 받으십니다.
빌립보서 2 7 말씀에 의하면, 날은 하나님께서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날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 우리 생각으로는 엄청난 손해입니다. 고통이 없고, 부족함이 없는 신이, 지금은 엄마의 없이는 없는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모든 천사들이 의심없이 노래할만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높은 하늘에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와의 사귐이 없이는, 우리와의 사랑이 없이는 영광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 14절은 말은 조금 세련되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이 육신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본다

가끔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당신의 이름을 빛내며 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요, 사실 우리의 세상적 성공으로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나와 다시 사귀기 시작할 ,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사람들이 , 그리고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믿고 사랑할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멋진 음악이나 화려한 설교로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 안에 계심으로, 인정 받으심으로 그리고 사랑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십시오. 말은, 예수님과 사귀며 살자는 말입니다. 사귀는 , 사랑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20절에 목자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영광을 돌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말씀 앞에 마리아는, 처녀로서 임신하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주께 드려 일을 감당합니다. 그리고는 말하지요 유명한 마리아 찬가입니다. 영혼이 주를 찬양하고 주님을 좋아합니다 노래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사람들이 일을 하여서 영광을 돌렸나요? 임신한 청소년, 거지같이 사는 목자들. 그런데, 이들은 우리 안에 오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김밥을 팔아서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살아 있는가에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늘의 영광을 누리며 , 그들은 평화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저는 평화라는 말이 좋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다!’ 라는 말이 선포되었습니다. 말이 지금도 울려 퍼지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초대교회가 세워졌던 터키에는 어제 축구장의 폭탄테러로 38명이 죽었답니다. 시리아에서는 여전히 전쟁의 소리가 그치지 않고, 어디 다른 것도 없이 우리 나라만 봐도 난리가 아닙니다.
여전히 마리아처럼 임신한 청소년들은 자기의 이야기를 누구와 나눌 새도 없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습니다. 여전히 누군가의 재산을 늘려주느라 밤새 들에서 일을 사람들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라 여겨지며 무시를 당하는 세상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으로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지는 못할 망정, 시대의 헤롯처럼 자기 살려고 많은 이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동방에서 박사를 그랬던 것처럼 아주 곳으로부터 희망의 불빛을 찾아 새로운 땅에 도착하지만, 거기에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추방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시대를 사람들이 무어라 불렀는지 아십니까? 평화의 제국. Pax Romana 라고 했습니다. 누가봐도 평화롭지 않은 식민지 시대였지만, 힘있는 자들은 자기들만 부른 거짓 평화를 누리며 평화의 로마제국이라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그런 있는 자들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평화입니다. 평화는 아주 작은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마치 갓난아기처럼, 평화는 서로의 정성스러움으로 돌보아지고, 성장해 갑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힘쎈 성인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군사들처럼 당당하게 우리 삶으로 찾아오셔서, 평화를 누리려면 이것 저것 이렇게 저렇게 하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건 가짜 평화입니다. 주님은 수줍게, 조심스레 아기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함께 평화를 일구어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은, 헤롯 앞에서는 결코 무릎 꿇지 않았지만, 아기 예수 앞에서는 꿇어 경배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들 속에 평화는 시작됩니다. 목자들의 삶은 그대로일지 모릅니다. 목자들에게 양을 맡긴 지주들의 횡포나 사회적 인식 그리고 한밤의 무서운 칼바람도요. 하지만, 20절입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모든 일이 자기들에게 알려주신 그대로임을 알고, 돌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찬미하였다. 노래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이미, 거기엔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사명을 받아들이고 평화를 살았습니다.

세상이 어떠해도 우리는 평화를 누리를 사람들입니다.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세상이 없는 평화이다. 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누림과 함께 평화를 전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평화의 바람이 절실한 요즘 때입니다. 아주 작은 믿음의 틈으로 주님의 평화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리는 무엇보다 선물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영광, 그리고 영광속에 누구도 빼앗을 없는 평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