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한 바가지 사이에 두고 (작업의 정석) - 요한복음 4장 3절 - 19절



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오늘 함께 보는 말씀은 교회를 어느 정도 다닌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다시 봅시다.^^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라는 땅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등장인물은 유대인이신 예수님, 그리고 한 여인. 만남의 배경은 사마리아의 한 우물가, 그리고 시간은 낮 열두시입니다.  이 세가지가 다 굉장히 문제적이고 도전적인 설정입니다.

첫번째로 장소가 문제입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에 있다는 것. 사마리아는 갈릴리와 유대의 중간 지역인데, 유대인은 사마리아인들과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앗시리아의 정복시기, 많은 사람들이 잡혀 가고 이주 정책을 핀 지역 입니다. 그러니까, ‘순수하지 못한 동네’ 라는 인식이 유대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예배도 따로 드립니다.

. 두번째로 열두시에 우물가에 누군가 있다는 것. 우물의 깊이는 150m 정도로 낮에 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그것보다  우물가는 만남의 장소이다. 사회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곳이며 우물가로 오가는 동안 남편 이야기 하고 아이들 이야기하면서 행복을 얻는 곳입니다.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를, 야곱은 라헬을, 모세는 르우엘의 딸을 우물가에서 만납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등장인물을 봅시다.예수님이 그녀에게 말을 거십니다. “물 좀 주시오”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겁니다. 그리고 범상치 않은 대화가 오고 갑니다. 먼저, 여자의 반응은 무척이나 까칠합니다. 물을 달라고 하니까, 달라는 물은 안 주고 9절입니다 “선생님은 유대인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거절입니다. 애둘러 말했지만 싫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10절입니다.

“니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고, 또 내가누군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나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텐데…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물을 줄 수 있는데…”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처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작업’ 입니다. 저는 여기서 아주 능숙한 사랑꾼의 작업방식을 배웁니다. 말하자면 이런 거 잖아요. 차 한잔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내가 왜요… 하하하… (당황하지 않고)  제가 누군지 아셨더라면… 그리고 제가 줄 수 있는 선물을 아신다면… 저랑 차를 한잔 하자고 먼저 말씀하셨을텐데요…

이 설교의 부제는 작업의 정석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성으로서 그 여인에게 다가가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그녀에게 관심이 있으셨고, 마음을 열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측은덕 대십니다. 이 표현이 불편하실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측은덕 대시는 분이십니다. 요한1서 4장은 우리가 그를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했다고 알려 주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말 거시고, 관심을 끌려 하시고, 우리가 마음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지요. 아십니까? 주님은 이 본문에는 주님이 물을 결국 한 모금 드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제 생각에 주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거신 작업이지요. 그리고 작업은 성공해서 그 여자는 주님께 올인하게 되요.

자 본문으로 돌아가봅시다.

여인은 예수님의 태도가 의아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을 두레박도 없고, 우물은 이렇게나 깊은데, 무슨 물을 준다는 말입니까? 여전히 까칠합니다.  계속하여 말합니다.  야곱이라면 모르겠습니다. 그는 여기에 우물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 우리가 이런 해택을 보고 있으니까요. (12절입니다.)

이미 작업에 걸려 들었다고 봅니다. 처음에는 왜 나한테 물을 달라고 묻는 여인이, 비록 아직 퉁명스럽지만, 길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야곱 이야기까지 하면서 예수님께 관심을 보입니다. 여인도 외로웠던 걸까요? 아니면 주님께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러자 사람 마음을 낚는 데 선수이신 주님은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목마르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생명의 물은 다르다.

주님은 보다 깊은 차원의,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한 차원으로 대화를 이끄십니다. 목마름… 이런 질문입니다. “야곱이 파 놓은 물을 잔뜩 마시면, 더 이상 갈증이 없는가? 자녀들과 가축들이 다 배부르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인가? 더 깊은 차원의 갈증, 그리움 혹은 갈급함은 없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영혼의 목마름에 관한 이야기가 우물 한 바가지를 사이에 두고 진행 됩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우린 모두 목마르니까요.  

아무리 배가 부르고, 아무리 가지고 싶은 것을 가져도, 늘 어떤 영적인 갈망을 갖습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도 우리는 외롭고 불안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그것 자체가 행복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관계 속에 살아간다고해도 누군가의 노래처럼 우리는 매일 이별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무엇으로도 우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물이 아니라 예수의 생수가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는 세상 무엇보다 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보다 더 큰 존재,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으로만 영혼의 목마름은 해갈될 수 있습니다.

홍수가 나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생수라고 합니다. 물이 지천이지만 그 물로는 안됩니다. 우리 주변에도 내가 너의 갈증을 채워주마…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많이 가져라, 높아져라 혹은 더 많이 지배하고 정복하라…   그걸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영혼의 갈증을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으로 채우려고 하면 늘 불만족스러워요. 또 목마르지 않더나… 그러한 기쁨은 늘 시간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아이폰 7의 기쁨은 7s 가 나올 때까지 지속되고요, 맛있는 것 먹는 기쁨? 금방 사라집니다. 여자친구의 손을 잡는 가슴 떨림은 두달 정도 지속됩니다. 금방 다시 목말라지지요.

먼저 채워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늘의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수를 받아 먹는 삶입니다. 먼저 채워져야 할 것. 그렇게 만족스러우면 그 다음에는 연연하지 않고 살 수 있어요. 가진자의 만족… 그 고상한 삶으로 주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말에 여인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15절입니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 마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다 넘어 왔지요. 그런데 아직 여인은 영혼의 생수와 우물에서 건지는 물을 혼돈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그 물 주셔서 물 기르러 오지 않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이 쯤 되면 예수님의 작업이 끝난 것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래, 이제 내 제자가 되도록 하여라’ 라고 말할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하수들의 작업입니다. 아직 중요한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게 괜찮아 보이고 내가 관심이 있고 해서 마치 물건을 사듯이 택하겠다… 가 아니고요. 이 난데 없는 질문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건 치명적인 질문입니다. 어쩌면, 이제껏 공들인 작업, 이제껏 힘들게 열어 놓은 여인의 마음을 닫게 만들 수 있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아픈 부분을 건드리지 않고는 이 여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듯이 여인은 전 남편이 다섯입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은 아닙니다.  전통적으로 이 여인은 부정한 여인 혹은 창녀 라고 해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남편을 고를 수 없었고, 합의 이혼도 없던 시기 입니다. 불륜이라면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폈건, 죽었거나… 또 다른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녀를 남편 잡아 먹는 여자라 불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결혼 못하고 있었을지도… 박복한 여인 입니다. 자기의 삶을 부정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훅 들어오셔서 여인의 아픔을 건드리십니다. 기구한 팔자, 그래서 낮 12시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외롭게 살아가는 여인에게… 그래도 괜찮다… 너도 충분히 그 물을 마실 자격이 있다 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그림 아세요? (김기창 화백 작) 저는 이 그림의 가을이 좋고, 거룩해 보이지 않는 여인의 뒷모습이 좋고, 예수님의 시선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눈을 보고 계셨을 것 같아요. 사람들은 여인의 행색이나 출신지를 보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제자들이 돌아오는데, 그들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나누시는 것을 보고 놀라거든요. 그들에게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 이었습니다. 또 여인을 아는 다른 사람에게는 남편이 다섯 있는 사람. 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이 여인은 목말라하고 외로워하는 하나님의 딸이었습니다.

작가 이현주 목사님은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말을 이렇게 상상합니다.  ‘어여쁜 여자여, 하나님의 딸이여. 사람들이 그대를 개처럼 여긴다고 그대 자신까지 그대를 개처럼 여겨서는 안되오. 사람은 남이 만들어주는 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대로 정해지는 법이오. 사람이 짓는 죄 가운데서도 가장 고약한 것은 남을 버리는 것보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라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을 버리는 것이면서 또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니까’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나그네에게 까칠하게 대하며 자신의 껍질 속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여인에게 주님은 먼저 다가오시고, 측은덕 대시고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찾아 오십니다. 사마리아. 내가 어디에 있던지 오신다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는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내 눈을 보세요. 내가 남편이 다섯이건,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건… 내 아픔을 보시고, 내 껍질을 깨고 들어오세요. 언제까지 그렇게 혼자서 갇혀서 행복하지 않게 살 수는 없으니까…


그 만남이 우리를 살립니다.알고 계십니까? 요한복음의 첫번째 복음 전도자가 이 여자예요. 예배 때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그 유명한 명령이 이 여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행복과 만족이 여기 있습니다.

우린 열심히 물을 기르고 있지요. 때로는 좋은 관계를 건지고 싶어하고, 때로는 성공을 건지려고 합니다. 많이 건지면 행복하고 적게 건지면 불행합니다. 열심히 두레박을 내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물을 기르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뭘 그렇게 하고 있나… 그러지 말고, 내가 주는 물을 마시게. 나와 함께 살아가게나.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아픔이 있지? 괜찮아. 깨어진 상처가 있지? 괜찮아. 나와 함께 가자.


주님은 우리에게 그 영생을 주시려고 자기 몸을 던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늘에 이르는 길, 그 영생을 누리도록 우리 죄를 씻어 주시려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말씀하셨지요. 내가 목 마르다. 인생의 목마름이 예수 안에 사라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