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 나귀 등의 높이 (2016년 3월 20일)



함께 예배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주께서 마지막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는데, 때문에 우리는 부활절 주일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내일부터 주간이 고난 주간이고, 고난의 시기를 지나 다음 주일은 부활 주일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누군가와 대화하실 , 상대의 어디를 보십니까?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 있고, 그의 생각이 궁금할 , 여러분은 신체의 어떤 부위를 보시나요? 누군가의 마음이 알고 싶을 , 여러분들은 그의 어디를 보시나요? 질문을 마음 구석에 담아 두고, 그날, 예루살렘 성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함께 살펴봅시다.

유대인들의 가장 명절인 유월절 일주일 전에, 예루살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저쪽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척이나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왕을 기다려왔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식민통치와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기를 구원해 왕을, 구약의 시대로부터 예언되었던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출신의 젊은이가, 바로 메시아- 구원자와 같다는 소문이 이스라엘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그는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렸다는 소문도 들렸습니다. 그의 말을 리트윗하고 팔로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놀라운 지혜로, 로마의 권력에 붙어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곤란하게 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오랜 예언의 도시 시온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때마침, 유월절 직전에 말입니다. 알고 계시다시피, 유월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오랜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시기에, 누가 보아도 해방자이며 구세주인 영웅이 역사의 중심지에 입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흥분할 밖에 없었습니다. 트럼프나 샌더스를 쫓는 이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그들의 마음은 간절했고, 희망은 이루어질 같았습니다. 누가 먼저라고 것도 없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땅에 깔았습니다. 왕의 입성을 축하하려고 귀여운 양탄자가 깔렸습니다.

누군가는 종려나무 가지를 잘라 흔들기 시작합니다.  사사기 4장에 보면, 혼란의 시기에 사사 드보라가 백성들을 정의롭게 다스립니다. 그녀는 항상 종려나무 그늘 아래에서 심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정의의 왕을 상징하는 종려나무의 환호를 받기에 마땅합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당신의 이름이 복을 받으옵소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시아나. 말은 우리를 구원 하소서라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런데, 말은 감탄사가 됩니다.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란 말이지요. 말은 무척이나 위험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 황제의 다스림에 속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30 여년 예수가 태어나던 때에, 헤롯은 자신의 왕권을 예수가 빼앗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베들레헴 지역의 갓난 아이들을 학살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예수님을 부르는 행위는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입성 시기도 종려나무의 흔들림도 그리고 호산나 하는 외침도 완벽하게 왕의 입성에 어울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얼굴이 마냥 기쁘지는 않으셨을 합니다. 그는 분명 구원자이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이제 주께서 강한 힘을 가지고 로마의 제국주의자들을 멸망시키시기를 기대했지만, 주님의 구원 방식은 희생과 사랑의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 18절은 무리가 예수를 따르는 이유가 표적 때문이었다고 말해줍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그가 하실 일들을 기대하고,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기대가 충족되지 않음을 느끼자, 정확하게 4일만에 그들은 외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박아라

그들이 한가지 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귀입니다. 마냥 왕의 입성을 축하하기에는 한가지 걸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귀입니다. 그는 지금 나귀에 올라타 있습니다.

 나귀 있으십니까?  무척이나 초라한 동물입니다. 귀엽긴 하지만, 위엄이 있는 모습은 아닙니다. 왕의 입성이라면, 예수님은 나귀보다는 백마에 올라타셔야 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가 나귀를 타리라는 것은 이미 500 전쯤 스가랴를 통해 예언되었던 일이었습니다. 스가랴 9장에는 (9절과 10)  ‘구원을 베푸는 왕은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탔다. 그가 병거와 말을 끊어 화평을 전할 것이다. 화평이 세상에 미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힘이 아닌 사랑으로 일하시는, 억압이 아니라 겸손과 희생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세상도 온통 백마를 추구합니다. 말을 위엄 있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생명은 나귀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초라해 보이는 십자가의 위대한 역설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방식입니다. 권력이 아니라 사랑이, 기적이 아니라 희생이, 전쟁이 아니라 죽어짐이 생명의 길이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나귀였을까? 물론 스가랴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스가랴에는 왕이 나귀를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을까?

흥미롭게도 성경에 나귀를 왕이 군데 등장합니다. 바로 열왕기상 1장에서 솔로몬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데, 솔로몬이 노새에 올라탑니다. 나귀일까

예전에 뉴욕에 갔다가 말을 경찰을 적이 있습니다. 굉장히 멋집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말에 사람을 올려다 보게 되고, 그들은 우리를 내려다 보게 됩니다. 나귀는 어떤가요? 성인 남자가 나귀를 타면 발이 끌립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높이는 주변 사람들과 같아 집니다.

솔로몬이 노새를 탔을 ,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선정을 배풀었습니다.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물으시지요. 소원이 무엇이냐솔로몬은 겸손하게도 장면에서 지혜를 달라고 구합니다. 주께서는 부탁을 좋게 여기셨습니다.

노새를 솔로몬은 아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있었고, 사랑의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다스릴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열왕기상 10 끝부분에 가면 그가 이집트로부터 말을 들여옵니다. 말에 오른 그는 백성들을 내려다보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과한 노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열왕기상11장에 붙어있는 제목은 솔로몬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다입니다.

 나귀를 타신 주님의 모습을 묵상하다가, 그가 나귀를 고른 이유가 이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와 마주치고 싶어서 말입니다. 설교 처음에 질문 드렸지요. 누군가의 마음을 알고 싶으면 우리는 그의 눈을 바라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바라보셨습니다. 속에서 우리의 아픔을 아셨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눈이 아닌 그의 손과 입에 집중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을 알기 보다는 그가 주시는 선물과 능력에 집중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마주치고 싶어하십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높아지고, 강해지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와 함께 사랑은 전하고 함께 십자가를 , 그래서 결국엔 온전히 부활할 사람들을 기다리십니다.

무척이나 흥미롭게도, 오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기 바로 전에 주님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주시는 일입니다. 바디메오가 처음 것은 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바디메오가 처음 것은, 그의 눈이었습니다. 눈을 순간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자신에게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그가 하시는 일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종려주일에 우리 모두가 그를 호산나라고 노래하며, 그의 눈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우리를 나귀의 등잔등으로 초대하시는 말입니다. 좁은 , 낮아지는 길로 그가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우리와 마주쳐 주시는 . 호산나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