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절 : 흩어진 언어가 성령을 만날 때 (사도행전 2장 1절 - 13절) - 2015년 5월 24일

 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절입니다. 영어로는 부활절 후 50일(오순)이라는 의미로 Pentecost라 하는데, 저는 성령 강림절이라 부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 그날, 성령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개역개정) 새번역 성경은 이를, 내려 앉았다 라고 번역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던 날 성령이 비들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처럼 그날, 성령 하나님은 각 사람들의 삶 가운데 내려 앉으셨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 크리스챤으로 살아간다는 건, 바로 그렇게 내려 앉은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렇게 내려앉은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 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의 시작을 이야기해 줍니다. 이 본문으로부터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존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내려 앉으심 없이는 어떤 교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모임일지라도, 조직과 건물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이 없더라도 성령이 계신 곳. 그곳이 바로 예배 공동체이고 교회입니다. 우리 모임 안에도 성령의 내려 앉으심이 있기를 진정으로 소원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령 강림은 모습은 퍽 드라마틱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시고 열흘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의 말씀을 기억하며 교회의 리더쉽을 정해야 했고, 앞선 사람들은 어떻게 주님 없이 공동체를 지켜 나가야 할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외부 사회에는 여전히 위협적인 적대감이 팽배합니다. 그 때에 그들에게 강한 힘으로 나타나십니다. 성경은 신비한 언어들로 그 날의 일을 묘사합니다. 불의 혓바닥 같은 것, 강한 바람 그리고 방언. -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의 방언과는 달리 다른 나라 언어들을 이야기 합니다-  

 처음 이 본문을 대하면  신비한 광경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술에 취한 듯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이 기록된 이유가 단지 신기한 일을 레포트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20장 마지막 부분이 성경의 기록 이유를 잘 설명해 주는데,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행한 다른 징표도 많지만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보다 더한 일도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걸 기록하고 가르치는 이유는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 강림절에 성령에 대해 생각하면서 한가지 염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신비하고 비일상적인 현상” 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이시기에 신비한 일을 행하실 수 있지만, 그 기적들이 성령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적과 비일상적인 현상에 현혹되어서 성령을 오해하거나 그의 역사를 제한해서는 아니됩니다. 한국 교회의 이런 성령 특화 현상을 박영돈 교수는 성령의 일그러진 얼굴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령의 이적을 따라다니다가 참된 신앙을 망가뜨린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얼마나 기적적으로 체험했느냐가 아니라 그 만남이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고, 영생을 누리게 하였느냐 입니다. 성령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어떻게 삶이 바뀌었는가… 그게 중요합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아주 로멘틱하게 시작하지만 때론 그 사람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론 아주 일상적이고 별 다른 것 없이 누군가를 만날 수 있지만 그 만남이 우리 삶을 완성시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체험할 때, 그리고 누군가가 성령 체험을 하였다고 말할 때, 우리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반드시 물어보아야 합니다. so what?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예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났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는가? 과연 이 예배와 만남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보다 깊어지고,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하는 참 생명이 누려지는가… 체험과 만남을 통해 내 삶이 보다 정의롭게 변하고, 친절해 졌으며, 주와 동행하게 되었는가, 기쁨 인내, 온유, 착하여짐, 거짓을 싫어함 과 같은 하나님의 성품이 내 안에 생겼는가… 이런 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성령과 예배의 체험은 그저 가벼운 감정의 동요 혹은 유사 종교의 신비 체험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때론, 강렬한 만남의 경험이 없어도 좋습니다. 성령님은 조용하게, 조금씩 조금씩 우리 안에 거룩한 영을 창조하시기도 하시니 말입니다.

 이제 기적과 신비를 넘어,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시 한번 살펴 봅시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4절 입니다.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서 성령이 시키는대로 방언으로, 다른 언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국제적 도시입니다. 바로 그들이, “자기의 언어”로 복음을 듣고, “자기들의 언어” 로 은혜를 소통하게 된 것입니다. 갈릴리 촌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남의 언어를 이야기하며 살았던 사람들, 메데에서 사람,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리비아 각처에서 사람들, 심지어 유대 사람뿐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크레타와 아라비아에서 사람들까지, 모두가 각각 자기네 나라 말로 알아듣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기 언어로 복음을 듣고 고백하는 일. 그 일은 굉장히 소중한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언어를 통해,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였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서로의 의사가 소통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이 사도행전 2장에서 벌어지니까, 이제 사도행전을 통해서 병도 고쳐지고, 사람들 살아나고, 교회가 물건을 서로 나누며 구제하고, 교회 공동체는  엄청나게 부흥하고 그럴 겁니다. 막 놀라운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을 복음으로 던질 것인데, 그 일 이전에 가장 먼저 교회에 일어난 역사는… 서로의 말이 자연스럽게 통하는 소통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말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듣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고, 즐거웠습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세상이 지어졌을 때 사람들의 언어는 하나였다고 합니다. 창세기 11장 1절. “처음에는 세상의 언어가 하나 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언어,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옳지 못한 일을 모색하였습니다. 하늘에 닿을 있는 탑을 만들어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어리석은 일에 대하여 한가지 벌을 내리시는데, 그것이 서로의 말을 통하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11장 7절입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창세기는 이 11장을 기준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질 수 있습니다. 11장 이전을 원역사 PREHISTORY라 부르고, 이 뒤를 이스라엘 역사라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12장에 등장하거든요. 말하자면, 하나님이 지으신 낙원의 역사는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일로 끝이 납니다. 무너진 낙원의 마지막 결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낙원의 실패는 여전히 우리 삶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지금, 소통이 없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인종간의 문제, 계급간의 문제, 세대간의 문제도 따지고 보면 모두들 말이 통하지 않아, 마음이 통하지 않아 생겨나는 문제입니다. 성도들 간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내 입장에서 말을 하는데, 상대방이 영 알아 먹지를 못합니다. 참 여러번 설명을 해 주어도 그렇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진 제자들은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그들의 언어로 말하였고, 그들의 언어로 소통하였습니다. 바람 소리 가득한 다락방에서 불의 혀와 같은 성령의 임재를, 거룩한 기적을 경험한 이들이 행했던 가장 놀라운 역사는, 바대의 언어로, 갑바도기아의 말로, 본도와 아시아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셨던 그 날, 마가의 다락방은 소통의 기쁨이 흘러 넘쳤습니다. 잃어버렸던 낙원의 기억이 그곳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서로의 언어가 통할 수 없게 되어서 흩어졌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마지막 부분에는 이날 3000명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말로 복음이 설명되고, 그들의 말로 하나님의 크신 일이 고백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이 통하는 교회를 꿈꿉니다. 말이 통하는 가정, 말이 통하는 동아리, 말이 통하는 사회를 꿈꿉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하신 첫번째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성령의 첫번째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