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8일 주보 칼럼 -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 환대"

 미국에서 처음으로 유학 생활을 시작했을 때, 아내와 저는 세 달 동안 다양한 교회들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흑인 교회, 오순절 교회 그리고 크고 작은 다양한 교회를 방문하면서 드렸던 예배의 경험은, 평생 한 교회에서만 자라온 저의 식견을 넓혀주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한 작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날 아침, 사실 그 교회를 찾아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큰  교회를 찾아 갔다가, 시간을 잘 못 알아 예배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들르게 된  미주리 주의 작은 감리교회 였지요. 멋진 건물도 아니었고, 예배에 훌륭한 음악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설교가 무엇인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처음 찾아 온 젊은 동양인 부부를 향해 보내 온 그들의 미소, 그리고 다가와 먼저 말 걸어주던 그들의 환대 입니다. 여러 교회를 둘러 보면서, 먼저 다가와 인사해 주고 말 걸어 준 교회는 그곳이 처음이었습니다. 저에게 미주리에 있는 교회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교회는 그곳 입니다.


Charleston, SC 에서 있었던 끔찍한 기사를 읽다가 그 교회가 생각 났습니다. 18일 저녁, 딜란 루프가 임마누엘 교회에 들어섰을 때, 그 교회의 모든 사람들은 이 낯선 청년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냈고,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딜란 루프는 그들이 보인 환대의 표정 때문에 총을 쏘지 못할 뻔했다고 고백합니다.

 낯선 이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일은 성경의 기본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나그네를 영접(take-in) 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마태복음 25) 하지만 철저한 환대 radical hospitality 는 수고스럽고, 불편하며 때로는 위험한 일입니다.  낯선 이가 자기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Charleston 의 임마누엘 교회는 그 사건 며칠 뒤였던 지난 주일에도 문을 활짝 열어 사람들을 맞이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아픔의 현장에서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인종의 갈등으로 인해 뒤틀려진 세상이 창조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의참교회됨에 박수를 보냅니다. 교회는 감동적인 설교나 화려한 건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모든 이들에게 언제나 한껏 열려짐’, 바로 그 깊은 환대의 정신으로 참 교회가 됩니다. 모든 사람을 의심 없이 자기 삶 안으로 받아들이신 예수님, 바로 그 분의 몸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환대. 그 일이 불편하고 수고스러우며 때론 매우 위험한 일일지라도 우린참교회됨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주여 우리 안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소서

Summer Sermon Series 평균대 위에 선 신앙, 4/6 성경, 하나님의 영감과 인간의 언어 사이에서 (디모데후서 3장 13절 - 17절) - 2015년 6월 28일

   함께 예배하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오늘은 평균대 위에 선 신앙, 네번째 시간으로, ‘성경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말씀도 여러분이 편안하게 들으실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따뜻해지기 보다는 머리가 무거워지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야 하는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저는 참 신앙을 갖는 과정에서 이러한 고민의 시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균형 잡힌 신앙인이 될 수 있고, 그래야 교회 밖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신영복은 나침반이 북쪽을 가리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고 말합니다. 유한한 존재로서 절대자, 절대 진리를 마주하는 신앙의 행위는 어쩌면 나침반의 떨림과 같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굳건한 신앙도 좋지만, 흔들려 보아야 무엇이 결국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인지, 발 딛고 설 수 있는 바탕인지 알게 됩니다. 나침반의 진폭이 아무리 클지라도 진리를 중심에 두고 흔들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국 이 고민의 시기를 통하여 더 온전한 신앙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자 함께 흔들릴 준비가 되셨습니까?

  오늘의 주제는 성경- 어떻게 볼 것인가? 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 더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이 쉽사리 결론 나지 않는 고민을 갖기 마련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두 부류의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 성경을 읽다가 자연스럽고 건전한 여러 질문들을 해 본 사람들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 인데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성경의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 때문에 이 소중한 책 전체를 폐기 처분하지 않고, 결국 성경을 신앙 생활의 중심에 다시 두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염두해 둔 다른 한 부류의 사람은 성경이 그냥 다 믿어지는 사람들, 성경에 대하여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러면 더 위험한 것인데, (이 설교를 통해 왜 그런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이 설교를 통해 성경 읽기에 어려움을 갖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얻어가길 바랍니다. 왜 누군가에게는 성경이 그리도 고민되는 책인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기회로 오늘 이 시간을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성경에 대한 공부를 좀 합시다. 성경은 언제 쓰여졌지요? 우리 가운데 성경이 하늘에서 내려온 번개로 인해 지직 하고 쓰여졌다고 믿는 사람들은 없지요? 성경은 오늘 말씀에서 함께 읽은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 속에서 인간들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습니다. 구약성서는 히브리어 이스라엘 말로 써졌고요, 신약 성서는 헬라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성경은 신약과 구약으로 나누어 집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오심이 둘의 구분 점이 됩니다.  구약은 대체로 기원전 18세기부터의 역사를 담고 있는데,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모아진 것은 기원전 2-3세기 경입니다. 신약 성서는 당연히 기원후에 쓰여지겠지요. 기원 후 40년부터 150년 사이에 쓰여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동의합니다. 바울 서신 중 일부가 가장 먼저 쓰여진 것 같고요, 복음서는 신앙 공동체 가운데 구전되다가 바울 서신보다 오히려 조금 늦게 기록됩니다. 요한복음은 2세기에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이 책들은 4세기 초반에 경전Canon으로 온전하게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됩니다. (카톨릭에는 우리보다 9권이 더 많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성경의 원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모든 성경은 기독 공동체의 필사본입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는 영어 성경이나 중국어 성경을 번역했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이나 새번역 성경은 모두 성서 원어에서 번역한 것입니다창세기나 요한복음은 사실 그 자체로 하나의 책(두루마리) 입니다. 처음부터 한권을 염두하고 쓰여진 책의 챕터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하나로 묶여진 성경은 2000년이 가까이 되는 집필기간과 수많은 기자들의 작업임에도 엄청난 통일성을 갖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의 장과 절은 언제 생겨났는지 아세요? 장은 휴고라는 성직자가 1250년에 라틴어의 용어 색인을 위해서 구분하기 시작해서, 13세기 켄터베리의 주교 스테판 랑톤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인정됩니다. 절은 그보다 200년 더 지나서 1551, 인쇄 업자 로버트 스티븐에 의해 생겨난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경의 내용이 성스럽고 절대적인 것이지 성경책 자체가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신비한 물건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함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역사 속에서 구성되었고, 또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설명함으로 이것을 비신비화 시키는 이유는, 그 속의 내용이 참된 신비함, 참된 놀라움의 자리를 회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 기도하면 이루어지나요? 라는 질문에 이어 이번 주도 어려운 질문을 하나 드리지요. (지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였습니다) 성경은 한글자 한글자가 틀림이 없나요? 조금 어려운 말로 성서가 무오한가요? 성서 무오설의 근거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런 논리의 결과인데요, 하나님은 흠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so, 성경은 흠이 없다. 다른 근거는 성경 안에 그런 구절들 입니다.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베드로후서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말이 성경의 한단어 한단어가 무오하다는 의미인지는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질문이 합당한 이유는, 우선 우리가 보는 성경이 모두 사본이고 번역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을 조금 흔들 것이라고 말씀드렸지요? 마태복음 21 28절을 함께 볼까요

먼저 킹제임스 번역입니다
28 But what think ye? A certain man had two sons; and he came to the first, and said, Son, go work today in my vineyard. He answered and said, I will not: but afterward he repented, and went. And he came to the second, and said likewise. And he answered and said, I go, sir: and went not. (한글 개역 성경도 이 내용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개역개정 성경을 볼까요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분명하게, 두 번역의 내용이 다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어떤가요? 마태복음 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줄것이라고 말하지만, 누가복음 11장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글자 그대로 무오하다고 말할 때 과연 어떤 성경이 무오한 것일까요? 마태복음 21장의 말씀은 말이 아니라, 순종의 행위가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첫째가 갔는지 둘째가 갔는지 그게 그리 중요한가요?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기도로 얻어지는 궁극적 선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니까요.

  사랑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너무 사랑해서 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편지는 번역되어야 했고, 필사되어야 했습니다. 그 편지를 받아 보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띄어쓰기, 맞춤법, 번역의 세련됨 따위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맞습니까? 문자를 넘어, 그리고 시대와 문화에 따른 표현을 넘어 편지 보낸 이의 마음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성경의 권위는 그 문자 하나 하나가 신비한 힘을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이 틀림없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의 표현으로서 그 내용이 온전한 진리임을 말합니다. 문자 하나 하나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얼핏 신앙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종종 자기 신념을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AJ 콥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스콰이어지의 칼럼리스트인데, 재미있는 실험을 합니다. 성경의 모든 명령을 지키면서 1년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AJ Cobbs, TED 강연 영상) 이 사람이 쓴 책은 성경대로 살아본 1년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는 1년의 삶을 통해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21세기 미국에서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립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는 어짜피 다 지키지 못할 것 좋은 구절들을 pick 해서 살자.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우리 삶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니라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성경을 취사적으로 읽고 지켜야 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참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벼운 마음으로 취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듣기 좋은 말, 내 마음에 맞는 말만 선택할 것이고, 결국 성경은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문자에 빠지지 않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감동 속에서 버리고 싶은 성경 구절이 왜 쓰여졌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결국 하나님이 하시고 싶어 하시는 말씀은, 그 분의 뜻은 무엇인지를 겸손히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은 중요합니까? 크리스챤들에게 성경이 중요한 이유는 책을 통해 하나님을 있기 때문인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캠핑도 좋아하고 다른 종교의 이야기 속에서 진리와 사랑을 발견하는 일도 좋아합니다. 잠자는 아이의 얼굴 속에서도 창조주의 솜씨와 섭리를 발견하며 감탄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아닌 그 어디에서도 저는 예수님의 이야기, 날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참된 구원자, 그분의 이야기를 읽을 수 없습니다. 날 위해 목숨을 바치신 구세주 예수의 이야기는 성경에 적혀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서 해석의 기준은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이름은 성경교인이 아니라 기독교인, 그리스도인, 예수쟁이입니다. 성경에 때론 너무 잔인해 보이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읽다보면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맡게 됩니다. 진멸하고 말살하라. 호흡이 있는 것들은 하나도 남겨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때론 여호수아의 말씀이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의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안에서 구약의 전쟁이야기들이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절대적 사랑의 정신 안에서 평화의 존재들로 부름받은 우리에게 이 말씀이 전해지는 이유를 겸손하게 구해야 합니다. 섣불리 문자를 취해 하나님의 말씀을 폭력의 근거로 삼아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쓰여진 시대의 문화와 정서를 반영하며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번역상의 이슈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기독교 공동체속에서 운동력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해 왔습니다. 그 문자에 어떤 마술적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진리를 가르치기에 우리는 나의 사랑하는 책이라고 이 책을 부릅니다. 이 천년의 시간동안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왔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보내진 위대한 멘토 바울의 편지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성경은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일에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론 이해하기 힘든 말을 만나고, 내 삶과 관련 없어 보이는 말을 읽는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지혜를 구하다 보면, 그렇게 성령의 도우심 속에 이 거룩한 책을 대하다 보면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올 것입니다. 

Summer Sermon Series 평균대 위에 선 신앙, 3/6 기도, 주술적 열정과 자기 반성의 묵상을 넘어서다 ( 마태복음 7장 7절 - 12절) - 2015년 6월 21일

  목회 기도
사랑의 하나님, 당신의 날에, 당신의 집에서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당신의 아름다운 이름을 높여 부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찬양과 기도를 통해 온전히 영광을 받으소서.

오늘은 사람들이 정해 놓은 특별한 하루, 아버지의 날입니다. 우리 가정의 아버지를 통하여 세상 가운데 우리를 보내신 주님 감사합니다. 많은 좋은 것들을 배우고 누리게 하여 우리의 아버지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를 먼저 하늘나라에 보낸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가르침과 남겨진 부탁을 따라 우리 생을 아름답게 살아갈 있도록 지켜주시오며 하나님 품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그리움과 보고싶은 마음을 이겨낼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직 아버지에게 사랑하고 감사한다는 말을 직접 전해 있는 기회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용기를 더하게 하시어 낳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라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소서.

주님, 지난 수요일에는 우리가 담은 땅의, 찰스톤에서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와야 교회당에서 아홉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주여 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무겁고 아픕니다. 가운데 평화를 내리소서.
 생존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남겨진 가족을 위로하소서. 충격에 쌓여 있는 지역과 교회 공동체를 지키소서. 사건을 통해 우리 안에도 피부색과 인종, 출신학교와 지역을 따라 누군가를 가려 생각하는 잘못이 없었는지 돌아 봅니다.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 말씀해 주신 하나님처럼 우리 또한 차별 없이 사랑만으로 서로를 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도자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일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지혜를 더하셔서 앞으로는 이상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위험한 무기를 가지고 죄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리고 겉모양의 다름과 상관없이 하늘로부터 허락된 서로의 존귀함을 함께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많은 사람들은 방학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그러하셨듯 성실히 일했던 날들을 뒤로 하고 편안한 쉼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선물로 주어진 삶의 여백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되뇌이고 몸과 마음을 충전하게 하시니 우리가 기쁩니다. 그런데 주님 혹여 쉼과 여유가 지나쳐서 우리 삶이 게을러지지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좀더 눕고 좀더 졸고 , 좀더 자다가 가난해 지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님을 잠언의 지혜자를 통해 배웠으니 주님 우리를 맡겨신 시간과 삶에 대하여 성실하게 하소서.

균형 잡힌 신앙을 위한 말씀을 들으려 합니다. 주께서 듣는 귀와 말하는 입술에 복을 내려 주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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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예배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의 가장 위기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대화가 사라지는 일입니다. 기도를 성도의 호흡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대화가 사라진 관계에서 사랑은 존재할 없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평균대 위에 신앙, 번째 시간으로 기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가끔 기도 부탁을 하면, 저는 기도할 모른다고 대답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대표기도를 보셨거나 쑥스러우셔서 하시는 말씀이지요. 그럼 보통 제가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저는 기도를 아는 사람인가요?
 누가복음 11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주님은 질문이 좋으셨는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 우리가 매주 함께 하는 주의 기도를 알려 주십니다. 우리도 기도하는 방법을 묻고, 우리의 기도 생활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사랑이 깊어져 서로에 대한 이해가 커지고 사귐이 풍성해 지면  대화의 방식도 달라지기 마련이지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오른 기도의 평균대에서 조심해야 낭떨어지는자기 반성의 묵상주술적 열정입니다. 기도에 대한 오해는묵상 행위로서 기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기도? 하면 좋고... 그걸 한다고 되는 같지도 않고 그러니까 조용히 묵상을 하고 여유를 갖는 것처럼 자신을 돌아 보면 그것이 기도다.” 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  말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니까  매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지, 딱히 열심히 필요 없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에게 기도는 단순한 묵상행위가 절대 아닙니다. 기도는 살아있는 은혜의 도구입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의 차이는 실로 엄청납니다.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산에 갔다가 내려 오십니다. 아래에는 귀신들린 아이를 데려온 아버지가 있는데, 제자들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아야 되는냐, 그를 데리고 오라’  주께서 고쳐 주십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우리는 못했습니까? 29절의 말씀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러 종류가 나갈 없느니라

생명을 살리고, 악한 영을 쫓는 일에 기도는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 위로부터 오는 능력 없이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기도, 그것은하나님과 나의 연결고리. 이건 우리 안의 소리” :)

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지금도 그런 기적은 계속됩니다. 찰스톤에서  가족이 교회에 갔다가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은 범인을 용서한다고 합니다. 기도 없이 이런 고백은 불가능합니다. 마가복음 9 23, 그러니까 아이가 고쳐지기 전에 아버지가 묻지요. 무엇이든지 있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유명한 구절입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

기도는 그저 한가로운 자기 반성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기도의 능력이 오해되기도 합니다. 믿는자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허용하시지는 않습니다. 평균대 위에 기도의 다른 낭떠러지는 바로 주술적인 열정으로 기도를 대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면 뭐든지 이루어진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마구 부르짖기만 하면 안될 일도 되게 하신다고 가르쳐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응답되지 않으면 당신의 기도가 약했다고 말합니다.

기도는 대화인데, 사랑하는 이와의 속삭임인데, 이들의 가르침엔단판승부결사각오 정신만 있습니다. 물론 통성의 기도와 작심 기도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플 ,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강팍하고 선하지 못한 자신이 깨어지지 않을 , 주님 나를 도와 달라고, 마음을 고쳐 달라고 부르짖여야 합니다. 하지만 기도가 항상 그럴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대화이고 사귐입니다.

어려운 질문을 하나 드리지요. 기도하면 무엇이든 이루어 집니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기도 하면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집니다. 다시 말하면 진실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가운데 하나님의 뜻은  온전하게 이루어 집니다.

 기도가 기도자의 의도대로 결과 맺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 기도하셨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잔을 나에게 옮기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기도가 실패한 기도입니까? 아닙니다. 주께서는  당신 뜻이라면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바울도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탄의 사자라고 부를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세번 간구합니다. 하지만, 들어주지 않으세요. 바울은 9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오늘 본문은 구하라, 얻을 것이고 찾으라 찾을 것이고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부모가,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이가 어디있겠는가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역할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좋은 것을 구하는 것은 성도의 본분입니다. 좋은 것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서 무엇이 진짜 좋은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좋은 것입니까? 원하는 시험에 합격해서 행복을 누리는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욕하는 많은 정치인들은 그런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합격과 함께, 얻게 힘과 영광을 옳게 사용할 있는 신앙과 양심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돈을 버는 .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나누지 못하는 사람 때문에 세상은 점점 병들어 갑니다. 그러니 돈과 함께 베풀 있는 사랑과 용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와 권력이 뱀이나 돌이 아닌 떡과 생선이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떡이고 무엇이 생선인지. 먼저 마음을 우리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12절은 연결이 어색합니다. 기도에 대해 이야기 하시다가 갑자기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율법의 정신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어색한 내용을 연결하는 접속사는 그러므로 입니다. 이렇게 읽습니다.

너희들이 구할 , 찾을 , 두드릴 . 그래서 좋으신 아버지가 너희에게 반드시 것은 바로 율법의 정신이고, 자신처럼 남을 아낄 있는 사랑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구하여라. 구할 때마다 받을 것이다. 사랑의 방법을 찾으라 반드시 찾게될 것이다. 사랑의 마음 문이 열리길 바라며 두드려라 이내 열릴 것이다.

오늘 설교를 마치는 기도는 노르위치의 쥴리안 기도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당신 자신을 저에게 주십시오
저에게는 당신만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아닌 다른 것을 당신 만큼 값있다고 생각하고 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 아닌 어떤 것을 구한다면 저는 부족함을 느끼게 것입니다.
오직 당신 안에 있을 , 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