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시리즈 "예수와 만난 사람들" 1/3.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과 까칠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7장 24절- 30절) - 2015년 3월 8일


  함께 예배드리는 일이 기쁜 일입니다. 오늘부터 3 동안예수님과 만난 사람들 대해 성경을 살펴 보려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 여리고에 사는 세리장 그리고 눈먼 거지 - 디메오의 아들 이야기를 읽을 것입니다. 하나 하나 각기 다른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인데요, 만남 속에 그들은 새로운 생명을 찾게 됩니다.  오늘 첫번째 만남은 이스라엘 북부 두로 지역에서 이루어 집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대체로 이스라엘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두로는 예루살렘에서 200km 넘게 떨어진 곳인데, 이미 기원전 10세기에 이미 지중해의 대표 도시가 됩니다. (지도) 역대상(14) 보면, 두로 왕이 다윗에게 백향목, 석수 목수를 보내서 왕궁을 짖게 하고 이사야는 두로에 대하여 빛나는 왕관을 쓰고 있는 두로, 상인드은 귀족이고 무역상들은 세상이 우러러보던 사람들 이라고 말합니다. ( 23:9)
   그리로 피하신 이유는 휴식이 필요해서였지 않나 싶습니다. 6장에서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죽게 되지요. 그리고 예수님과 그를 따르던 무리에게도 압박이 가해져 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행보를 늦추지 않으시지요. 7장은 손을 씻지 않는 일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이 대립하신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장도 그냥 넘어갈 없는데,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20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 탐욕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사실 말은 당시 사회 지도층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음식을 대할 때마다 손을 씻을 없는 사람들의 친구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부정한 자냐, 누가 더려운 자냐 씻고 먹는 나의 친구들이 아니라, 말할 때마다 율법을 들먹이며 더러운 것을 내뿜는 너희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싸움이 지경이 되니 주님은 이스라엘 영내를 조금 떠나셔야 했을 합니다. 쉬고 싶으셨을 겁니다. 그래서 24절에는 아무도 몰랐으면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찾아 것입니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여자. 그는 예수 앞에 와서 엎드립니다. 성경은 그를 그리스 사람, 그런데 시리아 페이키아 출신의 여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녀가 지금 피곤에 지친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을 어떻게 예상할 있을까요? 그는 자비의 왕이시고, 자기 몸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지요. 그러니 당연히 고쳐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복음서에서 주께서 하신 가장 주된 사역은 치유와 가르침인데게다가 자신이 아니라 딸의 문제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친절하고 사랑 가득한 말을 기대해 봅시다.

  27 입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제대로 들었다면 예수님이 여자를 개라고 불렀습니다. 분명히 친절하지 않은 언사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들은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은 어디로 갔셨는지요? 설사, 여자가 개처럼 살았더라도 자신이 것은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던 주님 아니셨던가요?  조금 피곤해도 그렇지.. 주님 까칠하십니다.

그런데, 여인의 말은 기가 막힙니다. 우리 같으면, “잠시만요, 지금 저한테 개라고 하셨어요?” 하면서 뭔가 한바탕 해야 같은데, 여자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지금 여인에게는 자존심을 세울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개가 되어도 좋습니다. 그러니 주님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온전히 자존심을 버린 여인의 모습을 봅니다. 그녀는 그리스인, 두로에 사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거칠 언사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언어와 문화를 고려해 봅시다. 개라는 말이 항상 우리 문화에서처럼 경멸적인 언사는 아니지요. 여기에 쓰인 퀴나리온이라는 단어도 애완견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서학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자녀에게 떡을 개에게 주랴라는 말이 당시 가나안 지역에서 쓰이던 관용어구라는 점도 발견했습니다. 두로는 잘사는 동네였는데 항구도시의 사람들은 갈릴리 지방으로부터 음식을 사다 먹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갈릴리 사람들은 자기들 먹을 것을 두로에 팔고는 배고픔을 겪곤 했는데, 그럴 자조 섞인 말로 자녀들 먹을 떡을 개한테 줬다 라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말을 면전에서 하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한가지 예수님의 의도를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녀가 그리스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에는 사회적인 규율과 관습을 중시하는 학풍에 맞서 자기 안의 평화로움 혹은 자유로움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들을견유학파라고 하지요. 학파의 선생님인 디오게네스가 자신을 개라고 불렀기에, 개와 같은 사람들. 겉으로는 남루하지만 내면의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이런 (견유)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견유학파의 무리 속에서 여인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의 종교와 신념 속에 있으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자신들의 문제만을 해결받으려는 . 이렇게 해석될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을 자녀라고 부르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 안의 문제 해결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의 자녀가 되는 것이 먼저다 그런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런 많은 학자들의도움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예수님은 여전히 까칠하십니다. 귀신들린 아이 때문에 도움을 찾아 나선 여인에게 예수님은 그러셨을까?  대화를 조금 유심히 들어보면서 저는 거친 대화 속에서 높은 영적 차원을 교감하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우선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마가의 진술은 그녀의 출생지입니다. 수로보니게 시리아-페니키아 지방은 지역에서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던 땅입니다. 페니키아에서, 피닉스 (불사조) 라는 말이 유래될 만큼 있는 지역입니다. 게다가, 인류의 스승이라고 자처하는 헬라인이예요. 지적이고 문화적인 그리스 사람. 그런데, 지금 그녀는 정신과 마음의 문제로 아파하고 있는 자식 때문에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앞에 나와 자신의 문제를 내려 놓는 좋은 출신의 여인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삶의 자리, 자존심 그리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은 개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서 여인에게, 자기를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녀의 문제는 언제나 어머니들과 연관되어 있어요. 특히 엄마의 입장에서 자녀의 아픔은 자기 자신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요. 주님은 그런 자책과 염려를 내려 놓으라 명령하십니다.

   마가복음, 아니 모든 복음서에서 주님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창조된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라고 이야기 합니다. 바리새인, 율법학자, 유대인, 세리, 창녀그가 있는 자리가 어디가 되었든 곳에서 나와 주님의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에게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그들은 결코 자기를 내려 놓지 못했습니다. 율법과 자존심, 사회적인 안정감에 쌓여 그들은 결국나를 따르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됩니다. 하지만 여인은 주님의 거친 요구에 순종합니다. 시리아 페이키아 라는 출신 성분, 그리스 사람이라는 우월감. 그리고 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모든 것을 오직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내려 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흥미롭습니다. 대화속에서 여인은 예수님을 이깁니다. 스승의 수준 있는 요구에 여인은 응답합니다. ‘이렇게 까지 낮아질 있겠는가?’ ‘주님, 내가 개가 되어도 좋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살려 주십시오’.   어떤 신학자들은 여인을 계기로 이방인들의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변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그럴 같지 않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사람을 위한 주님이셨으니까요. 그러나 여인의 자기를 버림이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마음으로 허허 웃으시며 여인의 요구를 들어 주셨을 것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주님의 음성과 명령이 항상 부드러운 만은 아닙니다. 분의 마음과 우리를 향한 사랑은 한결같이 부드럽지만 그분의 가르치는 방법, 말투는 까칠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다루지 않으시면 우리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주님은 때론 까칠하게 우리를 대하십니다. 깊은 속내의 말씀 앞에서 나를 버리지 않고, 내가 온전히 낮아 지지 않고서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없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낮게 고개를 숙임으로 생의 시련을 이겨낼 있었습니다.

   그렇게 까칠하셨을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의 까칠함에 결려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만난 예수님을 우리도 만나게 되기를

생명을 살리는 일에 개가 되어도 좋으십니까? 사랑하는 일에 개가 있으시겠습니까? 낮아질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 곁에 있었지만 그를 만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곁에 있는 사람입니까, 예수와 만난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