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희생자와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는 예배. "아파하시는 하나님" - 마태복음 25장 31절 – 40절

세월호 희생자와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는 예배
아파하시는 하나님 - 마태복음 25 31– 40

세월호가 수많은 생명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은지 4개월이 지난 지금, 여전히 광화문에는, 그리고 한국의 주요 도시 곳곳에는 노란 리본이 매달려 있습니다. 무사 귀환을 바라던 이 리본이 이제는 정의롭고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어보자는, 필사적인 외침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월호라는 그 끔찍한 사건을 통해 마음이 찢어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지금도 그 억울함을 풀고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자, 그들을 향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이 예배가운데 나왔습니다. 예배는요, 기독교적인 예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사실, 내일이 저희 교회 첫 예배여서 기도하고 준비할 일도 많은데, 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다고 자꾸만 생각되었습니다. 하나님 주신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아파하고 있는 한국 사회를 위해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마음 말입니다.
그것은 토요일에 특별히 있는 한 예배에 참석함을 넘어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라는 초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마음 먹은 진짜 제자들은 주린자들, 목마른자들,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하는 일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하나님께 하는 일이기 때문이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5장은 교회의 봉사활동이나 사회활동에 기초가 되는, 참 많이 읽히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지요. 마지막 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갈라지게 될 것이다. 오른 쪽에 있는, 양과 같은 사람들에게 임금님은 말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준비되어 있던 복을 받아라. 왜냐하면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들은 의아해 했지요. 저희가 언제 그랬습니까? 그러자 임금되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간혹 이 본문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서 양이 되자그래서 천국에 가자 이렇게 받아들여집니다. 쉽고 그럴 듯 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맞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고, 또는 믿음을 통해 이 땅에서 하늘 나라의 삶을 살아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믿음이 진짜 우리 안에 있다면,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이 믿음이, 정말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으면 우리는 오른편으로 분리된 양과 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참 믿음을 간직한 자라면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임금되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 곳에서 함께 억울해 하시고 배고파 하시고 아파하고 계십니다. 그 크신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우리 중에 가장 작은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들의 죄가 만들어 놓은…  돈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여겨 배를 불법으로 개조하고, 위험한 항해를 강행하고또 마땅히 있어야 할 구조작업이 전혀 행해지지 않고, 그 가운데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통곡하며 사죄하지는 못할 망정 자기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불법을 자행하고.. 이 말도 안되는 세상 가운데, 이 창조의 아름다움이 말끔하게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 하나님은 가장 많이 상처 입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들과 함께 하라고, 아니, 하나님 자신과 함께 하자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른쪽의 양과 왼쪽의 염소가 있지요. 옳은 양. 그리고 그릇된 삶을 산 염소가 있습니다. 염소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들을 누군가를 병들게 하거나 옥에 가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누군가 병들었을 때,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제 시작하는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한국사회의 모든 교회들이 이 분명이 다른 두 가지 삶의 방식 중, 옳은 양의 삶을 선택했으면 하고 기도합니다.
교회는 가만히 있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다 죽는 거니까, 이 기울어가는 세상 속에서 가만히좀 있지 말고 그들의 자리에 내려가서 함께 아파하며 함께 회복되는 기적을 경험하여야만 합니다.

첫 번째 할 일은 로마서 12장의 말씀처럼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인 듯 최선을 다해 함께 아파해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파함에 그치지 않고, 젖은 눈을 가지고 옳음을 위해, 더 이상 그런 아픔이 없는 세상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합니다. 변화되고 구원받아야 하는 세상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 지는 듯 합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거든요. 이 세대를 뭐라고 할까비유하자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는 것과 같구나.. 하십니다. 마치 2000년 전의 말씀이 지금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두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아파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함께 일어나야 합니다. 정의를 위해서 애써야 하고, 삐뚤어지고 어긋난 이 땅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기도 뒤에 숨어 온 것도 같습니다. 기도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 마음을 알았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더 이상 교회가 게토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한국 교회는 역사적으로 매우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족의 앞날이 어두웠던 시절, 일제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민족대표 33인 중에 기독교인이 16명 그리고 천도교인이 15명이었습니다. 천도교의 교리는 많은 부분 기독교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그 아름다운 열정이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요... 안중근 의사의 서거 하기 전 옥중에서 썼다는 경천이란 글자가 제 마음에는 깊이 남아 있습니다. 하늘을 두려워하라…  
하늘이 두렵습니다. 비단 광화문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을 보아도 그렇고요,  여전히 인종 때문에 사람을 갈라 놓는 이 땅, 미주리 퍼거슨 뿐만 아니라 바로 이 곳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누리는데, 정말 많은 사람은 최소한의 것들도 갖지 못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늘이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 이 이상한 세상 속에서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내가 주리고 헐벗었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먼저 해야 할 일 - 교회를 세워 가는 이야기 3

메디슨 한인 연합 감리교회는 8월 31일 드릴 첫 예배에 앞서
 8월 30일 토요일 오후 2시에
'세월호 희생자와 남겨진 가족들을 위한 예배' 를 갖습니다.

누군가는 너무 정치적인 일에 교회가 나서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고,
또 누군가는 한발 늦은 천주교회 따라 하기가 아니냐고 빈정거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님, 몇 명 오지도 않을 개척교회 예배를 두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걸지도... ^^

그런데, 예수님을 생각할 수록, 그리고 "생명과 평화를 꿈꾸는 참된 예배 공동체" (우리 교회의 비전입니다) 를 놓고 기도할 수록 이 예배를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4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마음은 그 일로 참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뉴스를 읽는 일이 참 수고스럽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마음이 무겁고 수고스러울 때, 그 마음. 당신께 가지고 나오라 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답답한 우리 마음을 나누고, 우리보다 더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그들의 손을 잡아줄 지혜를 모으고 싶습니다.
헌금도 해서 마음 담아 전달할 겁니다.
멀리서도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편지로 적어 보내 드릴 생각도 합니다.

마태복음 5장은 예수정신의  황금률이라할만큼 중요하고 즐겨 읽히는 말씀인데요, 그 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물을 드리려고 성전에 오다가 갑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그 예물 성전 문 앞에 내려 놓고, 가서 그들과 화목해진 후에, 그 다음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

첫 예배를 드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원망이 하도한... 바로 그들을 위로하는 일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아파하며, 최선을 다해 손 잡아 주는 것...
그것이 예배보다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8월 30일 토요일 2시에 Trinity UMC (1123 Vilas Ave. Madison WI 53715) 에서 드리는 예배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예배에 대한 문의나 라이드가 필요하시면 973-525-9584, kumcmadison@gmail.com 으로 연락 주세요.

첫 예배를 준비하며 - 교회를 세워 가는 이야기 2

메디슨 감리교회는 8월 31일에 첫 예배를 올려 드립니다.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작은 교회, 개척 교회이다 보니 그 시작만큼은 그럴 듯하게 하고 싶었지요. 감사하게도 이웃하는 도시의 한 교회는 창립 예배에 축하객들과 성가대를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유명하신 목사님이나 찬양 사역자를 불러 관심 몰이를 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며칠 전부터 이 노래가 입가를 떠나지 않는 겁니다. 기도 할 때도 성경을 볼 때도 이 노래가 계속 생각 났습니다. 지금은 찬양집 '많은 물소리'의 편집자로 더 알려진 황병구 님의 노래입니다.

누구나 삶의 시작은 작구나
작은 시작은 그 소리조차 없구나...

교회는 생명체 입니다. 태어나고 자라고 때론 아프기도 하면서 결국 존재의 몫을 담담하는 생명입니다. 생명의 시작은 신비롭되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작고 소박하게, 하지만 진실하게 시작하는 편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성경이 말해 주는 첫 예배 장면들이 연상되었습니다. 긴 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올려 드렸던 첫 예배. 오랜 뱃 여행 탓에 많은 것들을 준비할 수 없었지만 정한 동물 몇 마리와 드렸던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셨고, 무지개를 통해 그들에게 새 희망을 주었습니다.(창세기 8장)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세겜에서 드린 첫 예배나 모세가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서 지켰던 첫번째 절기도 '외적 화려함' 과는 거리가 있었지요. 심지어 예수님이 이끄신 어떤 모임도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탄생하게 되는 오순절 사건을 기억합니다. (사도행전 2장) 그들은 화려한 성전이 아닌 어느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설교자는 뱃사람 출신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전적이 있는 베드로 였고요. 아주 작은 시작... 하지만 오늘날의 모든 교회는 그 날의 모임을 최고의 예배로 기념합니다. '성령'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 예배를 기대합니다. 열심히 말씀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말씀나눈 후 함께 먹을 한끼 식사도 준비하겠습니다.

시작이란 말은 우리를 가슴 뛰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설레이는 마음을, 겉모습만 화려하게 하는 일에 쓰지 않으려 합니다.  오히려, 그 기대로, 좋은 교회- 진짜 교회 세우리라는 깊은 다짐을 새롭게 하겠습니다.

황병구의 노래는 이렇게 끝납니다.

작은 친구야, 소리 없는 벗들아
높이 살자 깊게 사랑하자

성령 안에 높고 깊은 삶을 경함하게 될
메디슨 연합 감리교회의 첫 예배에 당신을 초대 합니다

평화~

강단 없는 설교 하나. 8월 10일 - 그가, ‘나다’ 라고 말했을 때… (마태복음 14장 22-27절)


저에겐 당분간 설교할 강단이 없습니다. 지난 6월말에 섬기던 교회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이곳 메디슨에서 8월 마지막 주에 다시 예배를 시작할 때까지 저에게는 허락된 강단이 없습니다. 물론 가족 예배때마다 설교할 기회가 있지만, 세 살 그리고 한 살인 딸 아들은 제게 마음껏 설교할 시간을 주지 않지요. 설교가 없으니 시간이 많이 나긴 하는데^^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 마음이 많이 허전하더라고요. , 하나님 이야기 하고 싶다그런 생각을 하다가 교회력을 따라 오늘(8 10)에 해당하는 복음서 본문을 펴고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듣는 사람 없어도, 정해진 예배 공간이 아직 없어도, 하나님 이야기는 멈출 수 없어서 말입니다. 오늘의 설교는 누군지 모를 당신에게,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는 한 이민교회의 젊은 목사가 전하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교회력을 따라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예수님이 소년의 작은 도시락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바로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는 특별한 시리즈 설교가 없는 경우, 교회력을 따라 함께 성경을 읽을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그냥 돌려 보낼 수 없었던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그 분의 손에 들려만 진다면 내가 가진 것으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소년의 헌신이 멋진 만남으로 인해 남자만 5,000명도 넘는 사람들이 배부른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시 보기 시작했지요.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일이 유월절 가까이에 일어났는데, 이 유월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것이 만나 사건이거든요. 그러니 기적을 통해 주린 배를 채워주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위대한 민족이 지도자 '모세'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시고, 무리를 흩으십니다. (22날은 저물었고, 제자들은 지금 배를 타고 호수 반대쪽 가버나움으로 돌아가고 있고, 예수님은 기도하시며 아직 산 속에 계십니다.

얼마를 진행해 나갔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거세지면서 배가 풍랑에 휩싸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북쪽에 높은 산이 있고 호수 남쪽으로 급격하게 내리 깎인 지형이기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풍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십여리. 4킬로미터 정도밖에 가지 못했습니다. 어두운 밤에 만난 폭풍 앞에서 제자들은 두려움에 압도되었습니다. 25절은 이른 새벽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니 밤새 풍랑과 싸우고 있었던 게지요.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밤새 지칠대로 지쳐 있는 제자들.

그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 오십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두려움에 질린 제자들에게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그분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대낮에 제 정신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해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밤중에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고 두려움에 짓눌려 죽음을 두려워하던 상황에서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 예수님이 예수님처럼 보였겠습니까? 반대로, 죽음의 사자가 음부의 문을 열고 자기들을 잡으러 오는 줄로 알았겠지요. 그런데 죽음의 사자처럼 보이던 그 사람이 말합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기적도 신기하고, 결국 예수님이 배 위에 오르셨을 때 잠잠해 진 파도 이야기도 참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의 행동 또한 깊은 묵상꺼리 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어떤 것 보다 이 짧은 말에 마음이 쏠립니다

나다

왜냐하면, 이 나다라는 말이 의미를 갖을 수 없을 때 그 분의 놀라운 능력. 혹은 베드로를 걷게 하시는 믿음으로의 초대 또한 의미를 갖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폭풍 속에서,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러니까 절박한 인간의 실존적 한계 앞에서 예수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안심하여라

아마 지금 이야기 드리는 이 두가지 중 한 경우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실 겁니다. 전화를 받았는데, 요즘은 번호 확인이 되지만, 예전에 말입니다. 누군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난데… 라고 이야기를 해서 당황하셨든지, 아니면 여러분들이 전화를 해서 난데 라고 말했는데, 상대편이 누구시죠? 라고 말해서 뻘쭘해 하시는 상황 말입니다. 사실, 난데요… 혹은 우리 동네에서는 나여하는데, 이 말은 굉장히 대담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서로의 존재가 매 순간 인식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어느 순간이든 나라는 사람이 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고 생각 될 때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서로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노예 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라고 부르셨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청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어떤 하나님이 너를 보내셨느냐?”고 물으면 대답해야 하니,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말입니다. 출애굽기 3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말씀하지 않으시고는나는 나다라고 답하십니다. 개역성경에는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니라고 번역되었는데, 표준새번역에서는 나는 나다라고 표현입니다. 헬라 사람들도 히브리 성경을 번역할 때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헬라말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에고 에이미나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어투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르면, 이미나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친구처럼 자신들을 아끼시던 사람 예수의 음성을 들었을 뿐 아니라, 그분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을 것입니다. “나다!” 에고 에이미 라는 이 말 속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말처럼 힘이 되는 말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은, 풍랑 가운데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나여걱정하지 말어그 말씀이 들리십니까? 베드로는 뱃사람이지요.  제자 중에 많은 수가 어부출신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겨납니다. 나뭇잎 같은 조각배. 일엽편주 같은 것이 우리네 삶이지요. 특히나 타향살이엔 풍랑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 때 주님은 그 풍랑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제 사투리를 용서 하십시오) 나여. 걱정 말어.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말만 그렇게 위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에게 다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다" 라는 말을 듣고, 그 분이 누구신지를 알 때 우리의 문제는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평행이 되는 요한복음 6장에는 마지막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배 안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21절 마지막에 보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헤치며 밤 새 도록 저어간 거리가, 19절에 보면, 십 여 리 정도라고 했습니다. 바다라고도 불리웠던 갈릴리 호수의 동서 넓이가 가장 넓은 곳으로 따져 11킬로미터 정도 되었으니, 밤새도록 노를 저었지만 호수의 반도 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배 안에 들어오시자 배는 신기하게도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373, 고요한 바다로 라는 곡의 2절은 이렇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풍랑을 만난 어부들처럼,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가장 잘 해낼 것 같은 일들 속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지요.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는 나다하면 단박에 알 수 있는 바로 그 분이 계십니다. 그가 내 배에 오르시면 이 풍랑이, 가야 할 곳에 더 빨리 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고, 그가 오라 하시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풍랑 가운데로 뚜벅 뚜벅 걸어갈 수 있습니다. 때론 그 길에 믿음이 적어 넘어질 지라도 그는 우리를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눈을 드시기 바랍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다이 참 듣기 좋은 말이 여러분들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평화

함께 이야기 해 보고 싶은 것들
1.     예수님이 배로 걸어 오실 때, 베드로는 나도 주님처럼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렇게 합니다. 중간에 빠질 뻔하기도 하지만요. 베드로는 왜 그랬을까요?
2.     당신이 전화기로 나다라고 말하면 금방 알아들을 친구가 있으십니까? 혹은 당신 전화기에 난데라고 하면 누군지 알만한 사람이 있나요? 그와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3.     지난 한 주 당신의 배에 분 바람은 어땠는지요

자랑거리 하나

지난 7월 시카고에서, 중북부 지방의 한인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함께 사역하는 동업자(?) 들을 만나는 자리엔 기분 좋은 설레임이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 6월까지 저는 중남부에 속해 있었기에, 이번 모임은 새로 이웃하게 된 목사님들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요.

개회예배가 끝난 후에 함께 참석한 가족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진행을 맡은 목사님이 재미있는 제안을 하셨는데요, 소개와 함께 그 가족이 자랑하고 싶은 것 딱 하나씩"을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한 가정 한 가정씩 일어나서 소개를 하고 우리 가족이 자랑은…” 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우리 집의 순서는 중간 쯤 되었는데, 뭔가 돌아가면서 이야기 할 때는 그 중간 자리가 딱 좋지요. 너무 앞이면 생각할 시간이 충분치 않고, 너무 뒤면 앞에서 좋은 이야기를 다 해버리니까요아무튼, 소개를 들으면서 머리 속으로는 열심히 생각했습니다. 우리 가정에 자랑은 뭔가진짜 잘난 척을 하라는 건 아닐텐데그렇다고 자랑할 게 없습니다하고 진지하게 겸손을 부리면 분위기를 못 맞추는 꼴이니… 생각보다 쉽지 않은 질문이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사람들의 대답은 대체로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바로자식 자랑이지요. “우리 아들이 이번에 ** 대학에…”, “우리 딸이 이번에 풀 스콜라로…” “우리 두 딸은…” 부모가 되어 보니 자식 일에 겸손해 지는 것이 쉽지 않던데, 다른 선배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럼 나도 아이들 이야기를 해야겠군. 수진이가 동생을 아주 사랑한다고 말할까? 식상한데도진이가 아주 건강하고 머리가 크다? – 실제로 도진이는 항상 첵업에서 머리 둘레 99%를 찍습니다.^^ - 이건 자랑이 아니잖아! ‘

그렇게 머리 속이 복잡해 질 무렵, 디트로이트에서 오신 어떤 목사님 가정의 순서가 되었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그 목사님 가정은 그 어려운 질문에 이렇게 답했지요.

우리 가정은 예수를 믿습니다

 ! 저건데…’ 제 속에서 터져 나온 말입니다. 진짜 좋은 자랑, 누구에게도 질투를 사지 않고, 아무도 초라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진짜로 자랑스럽고 자랑하고 싶은 말… 

우린 예수를 믿습니다” 
그 좋은 대답은 큰 웃음과 함께 깊은 울림을 전해 주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글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쓰여진 것인데, 그 책의 결론부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 14 , 새번역) 자랑할 것이 적지 않았던 바울이었지요. 공부도 할 만큼 했고, 그간의 사역 가운데도 많은 일들을 이루어 낸 사람입니다. 아직 할 일이 많은 바울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 자랑을 조금 해도 괜찮을 법 합니다. 왜 겸손하게 말하는 척 하면서 하는 그런 자랑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예수님 아니면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빌립보서 에서는 세상의 자랑들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3 8)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증명하지요.

혹시 여러분은 그 쉬워 보이는 듯 어려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신에게 가장 큰 자랑은 무엇입니까? 큰 성전이 자랑스러웠던 솔로몬 왕은 말년에 아 참 헛되다…” 라는 말을 반복 또 반복하지요. 새로 산 자색 옷이 자랑스러웠던 한 부자는 아브라함 앞에서 자신의 지난 날을 깊이 후회하고요, 자~알 생겼던 사울 왕도 그 용모의 자랑스러움을 그다지 오래 간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 말고 예수님을 유일한 자랑으로 삼았던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이런 말을 남기지요. 내가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 11, 13

단 하나의 자랑이라는 말에 예수님이라는 답을 놓치지 않았던, 그 목사님의 행복한 얼굴이 오래도록 기억됩니다. 그 단 하나의 자랑 때문에 저와 당신의 삶이 뿌듯하기를 소원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에이, 그게 무슨 교회야?! - 교회를 세워 가는 이야기 1.

 메디슨에 New Church Planter로 파송을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학생 교횐가요?"  그리고는 애정과 염려를 가지고 이렇게들 말씀하시지요. “학생들만 가지고는 쉽지 않을텐데오히려 이민자들이나 이중문화 가정 -난 이 말이 도대체 입이 붙질 않습니다. 세상에 이중문화적이지 않은 가정도 있나요? ^^- 을 잡아(?) 보는 건 어때요?”

거의 매번 그런 대화들을 나누다 보니 제 스스로도 마음 속에 한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난 누구를 잡아야(?) 되지? 유학생? 2세들? 아니면 이민 온 지 오래 되신 분들? 영어를 쓰는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은 사람들? 대학원 유학생 가정들? 한참 그렇게 재어 보고 고민하다가 혼자서 이렇게 말해 버렸습니다.

에이, 근데 그게 무슨 교회야

장사를 하는 것이라면 이 물건 저 물건 다 갖다 놓을 것이 아니라 잘 팔리는 것들 몇 개 잘 준비해 놓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특히 이미 지역을 선점하고 있는 옆 가게에는 없는 상품들을 전략적으로 준비해야겠지요. 그런데, 전 우리 교회의 owner 가 아니라 server 입니다. 그리고 나의 owner 께서는 그렇게 어떤 그룹을 특별히 선별하여 취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가끔 그런 교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박사들이 모이는 교회, 이민 사회에 정착한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미안합니다. 하지만 제게 그건 교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의 중심이 되는 분들이 있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곳이라면 그건 교회 아닌 겁니다. 진입 장벽이 있는 곳은 그저 하나의 이익 집단일 뿐입니다. 문턱이 있다면 그건 끼리끼리 모이는 사교클럽일 뿐이고요... 예수의 몸된 교회는 아닙니다.

그래서 소위 타겟 그룹이란 것을 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Church planting strategy 의 관점에서 볼 때 나쁜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냥 나쁜 선택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실패해도, 누구를 위한 교회는 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막 섞여 있는 공동체도저히 교회 아니면 만나지 않을 사람들을 교회니까 만나는 그런 공동체를 꿈꿔 볼랍니다. 가방끈, 은행 잔고, 나이, 정치색, 출신지 뭐 그런 것들 상관 없이 예수님 때문에 서로를 만나고, 서로의 삶을 배워가는, 그런 천국 같은 공동체를 이루어 보고 싶습니다.

불편할 테지요. 우선은 찬양을 고르기도 힘들 것이고, 설교 때 농담을 해도 모두를 한꺼번에 웃기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불편한 만큼 성숙해 지고, 성숙해 지는 만큼 경계 없이 사셨던 예수를 닮아갈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여곡절 끝에, 참된 제자로 살기로 결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말입니다. 그 감격스러운 디베리야 바닷가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요한은 그날 물고기가 153마리 잡혔다고 합니다.(요한복음 21) 모나미 볼펜에 쓰여 있는 153이 이 153 맞습니다. 그걸 어떻게 세어 봤는지는지 모르지만, 초대 교회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제롬은 매우 흥미로운 해석을 들려줍니다. 요한복음이 쓰여졌던 2세기경,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의 물고기가 모두 153종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제롬의 해석에 따르면) 요한은 이 구절을 통해 주님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내린 그물에, 이 세상의 모든 고기가 다 잡혔다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의 그물은 물고기를 골라 잡지 않습니다. 주님의 어부는 사람을 골라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교회도 사람을 고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의 첫번째 진리 실험입니다.
모두를 위한 교회, 모두가 환영 받는 교회
아무나 와도 되는 교회.

그게 진짜 교회니까요

6월 22일 설교 - 수정교회에서 나눈 마지막 말씀, 행복한 나무 시편 1편

행복한 나무, 시편 1 - 수정교회 마지막 주일 (2014 6 22) 설교

시편 1편과 2편은 시편의 서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의 각 장마다 소제목이 붙어 있는 유일한 책이 바로 이 시편인데 요즘 나오는 성경책의 소제목들은 20세기가 지나서야 편집자들이 붙인 것입니다 시편 1편과 2편만 그 소제목이 없지요. 아마도, 시편 전체의 주제를 나타내는 머리말이기에 특별히 제목을 붙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나눈 대화인 이 시편은, 지난 해 넘기는 예배 때도 말했듯이, 시간의 신비 앞에서 읽기 좋은 책입니다. 디트리히 본훼퍼 목사님은 시편을 성서의 기도라고 합니다. 마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고 알려주신 주님의 기도처럼 시편을 읽다보면 독서가 아니라 기도를 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인 제가 이 교회에서 마지막으로 말씀을 전하는 날입니다. 정말 신비롭게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를 처음 만났던 날은 저는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제 잠시 페북과 문자로만 만나야 합니다. 함께 읽는 마지막 말씀으로, 이 시편을 정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행복하고 울창한 나무 같기를 바라며, 또 기도하며 함께 시편 1편을 생각해 봅시다.

여섯 연으로 기록된 오늘의 말씀, 그 첫번째 말은 예수님이 산 위에서 하신 여덟 가지 복에 대한 이야기를 연상하게 합니다. 우리 말 성경으로는 복 있는 사람은 어찌 어찌 한다 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원문의 뉘앙스는 복있는 사람의 삶에 대한 묘사라기 보다는 복있는 삶을 위한 지침 혹은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팔복의 문법처럼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 그리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렇게 읽는 것 더 정확할 듯 합니다. 영어 성경도 그런 뉘앙스를 가지고 있지요.
  
행복하려면, 이것들을 하거나 쫓지 말라는 말로 시편은 시작됩니다. 바로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 이지요. 성경은 무엇무엇을 하지 말아야 복이 있다라고 말해 줍니다. 무엇을 쫓는가에 따라, 말하자면 무엇을 추구하는 가에 따라 우리 삶의 복. 그 삶의 질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난 한주간 무엇을 쫓으며 사셨습니까? 하나님 원하시지 않는 길을 걷지는 않았는지요? 오만하게 굴거나 그런 마음을 품으시지는 않으셨습니까? 혹시 지금 충분히 행복하지 않다면, 우리가 쫓지 않아야 할 것만을 추구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은 아닐런지요?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쫓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가 바랄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두번째 연입니다. “율법을 쫓는 것. 그 말씀을 쫓는 것이 복된 길이다

히브리어를 잘 하지는 못하지만, 원어의 뜻이 알려 줄 수 있는 것을 하나만 생각해 볼까요? 복이라는 말은 아솨르 입니다. 아솨르 라는 말에는 길을 가다, 나아가다 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복은 그 사람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나 이제까지 이룬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옳은 길로 나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래서 성결교 신학대의 이성훈 교수는 시편 1편을 주석하면서, 그 제목을 걸어가야할 그 길이라 이름 붙여 놓았습니다.

참 복을 위해 어디로 가야 합니다. 어떤 길을 걸어야 합니까? 율법을 즐거워하는 삶, 그리고 그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 성경은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율법이라 함은 토라, 창세기, 출애굽기 같은 책들을 의미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율법의 가장 중요한 것을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 참 행복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사랑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도 마지막으로 드리게 되는군요. 행복하십시오. 그러려면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들을 사랑하며 사십시오. 그런 삶을 추구하며 사십시오. 바로,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말입니다.

시인은 3연부터 인생을 나무에 비유합니다. 다윗의 노래라면 사막에서 지어진 노래일 것입니다. 물이 귀한 지역에서, 시내를 따라 심겨진 나무들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잎도 무성하고, 열매도 맺고광야 같은 이 로렌스 땅에서 참 그리운 풍경이지요. ^^ 하지만 나무의 행복은 그 하나의 번영에 있지 않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소설을 아시지요. 소년에게 그늘과 열매, 목재와 쉴 수 있는 그루터기까지 내어주면서 책의 모든 페이지는 작가 쉘 실버스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우리 수정교회의 이름은 계시록 22장의 말씀으로부터 만들어 졌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수정"과 같은 생명수가 보좌로부터 흘러 나오고, 그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길이 강을 만들고, 그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자라 납니다. 그리고, 그 잎사귀와 열매가 만국을 치료 합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이고, 또 요한이 본 환상입니다. 저는 깊은 마음으로 여러분들이 그런 나무들이 되기를, 주께서 주신 힘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치유하는 나무 같은 사람들, 그래서 행복한 나무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시인은 짧은 시를 마무리 하면서 의인의 길은 주님이 인정해 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한다 라고 선언합니다. 세상 일이 꼭 그런 것 만은 않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요. 3장 후반부에는 의인들이 하는 일마다 잘 된다고 합니다. 음... 거짓말 같기도 합니다. 여전히 악하고 약삭 빠른 자들이 성공하는 것 같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잘 되는 일, 안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이 시는 여전히 참입니다. 우리의 욕심대로 되는 것. 그것이 잘 되는 일이라면, 성경이 거짓이지요. 얼마나 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만사 형통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지만, 마지막 절을 다시 보지요. 악인은 망하는데, 의인은 성공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말합니다. 어떤 성공을 바라십니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면 된 것이지요. 그가 좋다고 하시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이지요. 이것 말고 또 우리가 얻을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으시면, 눈에 보이는 악인의 성공. 그것들은 다 복스럽지 못한 일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 없는 세상의 성공적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허탄한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잊지 않고 살아가셨으면 합니다. 점점 힘이 많은 힘을 갖게 되고, 점점 더 나이를 먹어 갈 수록 진짜 성공이 무엇인지 올바로 깨닫고 살아가셨으면 합니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참 행복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납시다. 윤법을 쫓는 그 길 위에서 행복한 얼굴로 말입니다. 그 때, 우리 주님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성장했는지를 서로에게 보여줍시다. 나중에 만났을 때, 얼마를 벌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서로 자랑합시다. 

흔들리는 세상 가운데, 진리에 깊이 뿌리 박고 필요한 이들에게 그늘을, 열매를 그리고 놀이터를 제공해 주는, 우리 예수님이 하셨던 그 일을 계속해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나무이기를 소원합니다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