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읽기 좋은 여름 4. 낮게 엎드린 사랑 (7장 24절- 30절)

함께 예배드리는 일이 기쁜 일입니다. 이번 여름, 우리 교회는 함께 마가복음을 읽고 있습니다.
복음서 속에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셨는데, 이스라엘 밖에서 일하시기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은 두로라는 곳에서 여인을 만나십니다.

두로는 예루살렘에서 200km 넘게 떨어진 곳인데, 이미 기원전 10세기에 이미 지중해의 대표 도시가 됩니다. (지도) 역대상(14) 보면, 두로 왕이 다윗에게 백향목, 석수 목수를 보내서 왕궁을 짖게 하고 이사야는 두로에 대하여 빛나는 왕관을 쓰고 있는 두로, 상인들 귀족이고 무역상들은 세상이 우러러보던 사람들 이라고 말합니다. ( 23:9)
  그리로 피하신 이유는 휴식이 필요해서였지 않나 싶습니다. 6장에서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죽게 되지요. 일은 분명히 예수님과 그를 따르던 무리에게도 전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행보를 늦추지 않으시지요. 7장의 이야기는 손을 씻지 않는 일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이 대립하신 이야기 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율법에 위배된다고 비판하자 주께서는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 말씀하십니다. (7:15
주님은, 겉으로 거룩한 하는 사람들을 정면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음식을 대할 때마다 손을 씻을 없는, 거리의 사람들 혹은 들판의 목자 같은 이들의 친구셨습니다. 이주 전에 한국에선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고치다가 19세의 청년이 열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지요. 그의 가방엔 아침에 놓은 사발면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일하느라 편하게 앉아서 식사도 제대로 없는 사람들은 시대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힘겹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외면한 , 스스로 거룩하다가 자랑하는 종교인들, 사회의 지도자들을 주님은 용납하실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은, “누가 부정한 자냐, 누가 더려운 자냐 씻고 먹는 나의 친구들이 아니라, 말할 때마다 율법을 들먹이며 다른 사람을 더럽다고 무시하는입으로 못된 것을 내뿜는 너희들이다…” 라는 것이지요.   싸움이 지경이 되니 주님은 이스라엘 영내를 조금 떠나셔야 했을 합니다. 쉬고 싶으셨을 겁니다. 그래서 6 24절에는 아무도 몰랐으면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찾아 것입니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여자. 그는 예수 앞에 와서 엎드립니다. 성경은 그를 그리스 사람, 그런데 시리아 페이키아 출신의 여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녀가 지금 피곤에 지친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을 어떻게 예상할 있을까요? 그는 자비의 왕이시고, 자기 몸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지요. 그러니 당연히 고쳐 주시지 않을까요? 게다가 자신이 아니라 딸의 문제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친절하고 사랑 가득한 말을 기대해 봅시다.
 27 입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제대로 들었다면 예수님이 여자를 개라고 불렀습니다. 분명히 친절하지 않은언사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들은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은 어디로 갔셨는지요? 설사, 여자가 개처럼 살았더라도 자신이 것은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던 주님 이십니다.조금 피곤해도 그렇지.. 이건 심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말은 기가 막힙니다. 우리 같으면, “잠시만요, 지금 저한테 개라고 하셨어요?” 하면서 뭔가 한바탕 해야 같은데, 여자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지금 여인에게는 자존심을 세울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개가 되어도 좋습니다. 그러니 주님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온전히 자존심을 버린 여인의 모습을 봅니다. 그녀는 그리스인, 두로에 사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거칠 언사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언어와 문화를 고려해 봅시다. 개라는 말이 항상 우리 문화에서처럼 경멸적인 언사는 아니지요. 여기에 쓰인 퀴나리온”quinarion”이라는 단어도 애완견을 말합니다. 그리고성서학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자녀에게 떡을 개에게 주랴라는 말이 당시 가나안 지역에서 쓰이던 관용어구라는 점도 발견했습니다.
두로는 잘사는 동네였는데 항구도시의 사람들은 갈릴리 지방으로부터 곡식을 사다 먹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갈릴리 사람들은 자기들 먹을 것을 두로에 팔고는 배고픔을 겪곤 했는데, 그럴 자조 섞인 말로 자녀들 먹을떡을 개한테 줬다 라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관용적인 표현을 통해 자신의 우선하는 관심이 이방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그런 말을 면전에서 하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한가지 예수님의표현을 이해할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녀가 그리스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에는 사회적인 규율과 관습을 중시하는 학풍에 맞서 자기 안의 평화로움 혹은 자유로움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들을견유학파라고 하지요.
학파의 선생님인 디오게네스가 자신을 개라고 불렀기에, 개와 같은 사람들. 겉으로는 남루하지만 내면의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이런 (견유)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견유학파의 무리 하나인 여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여전히 자기의 종교와 신념 속에 있으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자신들의 문제만을 해결 받으러 왔다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지요.너희들 견유학파(개와 같은) 사람들아…  문제의 해결 보다 우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먼저다 이런 말씀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런 많은 성서학자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불편합니다. 귀신들린 아이 때문에 도움을 찾아 나선 여인에게 예수님은 그러셨을까?  대화를 조금 유심히 들어보면서 저는이 거친 대화 속에서 높은 영적 차원을 교감하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우선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마가의 진술은 그녀의 출생지입니다. 수로보니게, 시리아-페니키아 지방은 지역에서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던 땅입니다. 페니키아에서, 피닉스 (불사조) 라는 말이 유래될 만큼 그녀는강대국 출신입니다.  게다가, 인류의 스승이라고 자처하는 헬라인이예요. 지적이고 문화적인 그리스 사람. 그런데, 지금 그녀는 정신과 마음의 문제로 아파하고 있는 자식 때문에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고침을 받은 다른사람들과는 달리 그녀의 출신지를 분명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주님은 출신 좋은 여인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삶의 자리와 자존심을 내려 놓으라고 명령하시는 합니다. 그리고, 죄책감으로부터도 자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은 개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서 여인에게, 자기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녀의 문제는 언제나 부모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엄마의 입장에서 자녀의 아픔은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아이가 귀신에 들렸구나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요. 주님은, 그런 자책과 염려에 쌓여 있는 여인의 자아를 깨어 버리십니다.  
  마가복음, 아니 모든 복음서에서 주님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창조된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라고 이야기 합니다. 바리새인, 율법학자, 유대인, 세리, 창녀그가 있는 자리가 어디가되었든 곳에서 나와 주님의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자체로 서라고 명령하십니다.
바리새인들에게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그들은 결코 자기를 내려 놓지 못했습니다. 율법과 자존심, 사회적인 안정감에 쌓여 그들은 결국나를 따르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됩니다. 오히려 병들고아팠던 사람들은 쉽게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자기 자신 찾았습니다.
여인은 주님의 거친 요구에 순종합니다. 시리아 페이키아 라는 출신 성분, 그리스 사람이라는 우월감. 그리고 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모든 것을 오직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내려 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래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개처럼 낮아질 있겠는가? 주님은 물으십니다.
흥미롭습니다. 대화속에서 여인은 예수님을 이깁니다. 스승의 수준 있는 요구에 여인은 응답합니다. ‘이렇게 까지 낮아질 있겠는가?’ ‘주님, 내가 개가 되어도 좋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살려 주십시오’. 주께서 의문의1패를 당하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여인을 계기로 이방인들의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변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그럴 같지 않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사람을 위한 주님이셨으니까요. 그러나 여인의 자기를 버림이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마음으로 허허 웃으시며 여인의 요구를 들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여인은 그저 자연인, 어머니가 되어 건강해진 딸을 만나러 갑니다.  
알고 계십니까? 주님의 음성과 명령이 항상 부드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분의 마음과 우리를 향한 사랑은 한결같이 부드럽지만 그분의 가르치는 방법, 말투는 까칠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다루지 않으시면 우리는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주님은 때론 까칠하게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렇게 까칠하셨을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의 까칠함에 결려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개가 되어도 좋으십니까? 사랑하는 일에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 놓고 개가 있으시겠습니까? 학벌, 출신, 명예그것들 내려 놓고 개가 있겠습니까?

낮아질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 곁에 있었지만 그를 만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곁에 있는 사람입니까, 예수와 만난 사람입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시험을 통과할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