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예배당이 아니라 주님 주신 자연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종교 개혁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God
writes the Gospel not in the Bible alone, but also on trees, and in the flowers
and clouds and stars. 깊이 동의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아름다운 봄날이면 바람으로, 꽃으로 그리고 하늘색으로 우리에게 말 걸어 오시는 창조주를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예배를 시작하면서 읽은 시편 8편, 시인의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호수와 하늘에 둘러 쌓여 읽은 말씀은 누가복음 24장,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 입니다. 누가는 마가복음에서 단 두절에 걸쳐 이야기되고 있는 엠마오 길의 이야기를 거의 24장 후반부의 전체를 들여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한 누가에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계셨을 때의 일들을 전하여 주는 누가복음과, 약속하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시작되는 사도들의 이야기 - 사도행전을 연결하는 데에, 오늘의
이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이 됩니다.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절 이후의 날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십니다. 말씀을 살펴 보지요.
13절. 그날,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마리아와 같은 몇몇 여자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에 전해진 그날에, 여전히 부활의 소식을
믿지 못하는 사도들과 제자들의 틈 바구니 속에서, 그 비열한 도시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가 살았던 곳, 엠마오로 향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따뜻한 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엠마오가 실제적으로 어디인지에 대해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 따르던 스승을
잃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슬픔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삼십리 길. 그러니까 약 11km 정도 거리면 보통 걸음으로 세시간 남짓 걸릴텐데, 엠마오에 도착하였을 때 날이 어두워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아마도 지금처럼 따사로운 오후의 봄
햇살을 맞으며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14절에 기록한
대로 이 모든 일을 이야기하며 걷는 길에 맞는 봄 햇살은 삼년 전 예수라는 선생을 따라 나설 때 만났던 따스한,
그리고 희망 찬 봄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를 따르게 되었건, 혹은 그의 생명과 같은 말씀을 듣고 온 생을 결심하게 되었건 그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이라는 신비한
인물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했고, 용서와 사랑의 힘을 경험했으며 치유와 회복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 만사가 변하는 놀라운 사건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틀 전에
그 분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그 수치스러운 십자가가 위에서 맨몸뚱이로 말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들 인생의 희망과
의미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얼굴빛이 침울하였다고 전해줍니다.
상실로 인한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부활의 기쁨과 회복의 복음이 시작됩니다. 그 잃어버림이 누군가에게는 절망의 이유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진정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누구도 채울 수 없는 갈급함. 누구를 만나도 갈할 수 없는 갈증이 하나님으로부터만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림이 축복이다 라는 말이 가능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 잃어버린 자들의 여정에, 예수님께서 이미 동행자로 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소리 없이 발
맞추어 걸으시며 그분은 글로바와 그의 길벗에게 묻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소?’ 아파하는 영혼들과 위로자 예수님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무슨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신 예수님은 그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십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이 정말 좋습니다. 왜 예수님이 모르고 계셨겠습니까? 그들이
하는 말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물으시고 귀 기울이십니다. 제자들의 이야기가 25절까지 계속되는데, 예수님은 그 사이에 한번도 그들의 말을 막으시거나 자르지 않으십니다. 말을
들어 준다는 것은 그를 인정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계신 것처럼, 가장 좋은 위로는 들어줌입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무슨
일 있었니? 그리고, 우리에게 서로의 좋은 청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하신다고 하셨는데, 누군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것은 가장 잘 사랑하는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이야기 또는 한풀이가 끝나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입을 여십니다. 그런데, 그 첫마디가 참 놀랍습니다. 25절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이것은
공격하는 말입니다. 아직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미련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내가 그렇게 얘기 했건만. 참된 사랑은 죽는 자리까지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그 죽음은 단지 슬픈 일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완성이라고 그렇게 알려주고 당부했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나의 영광은
세상의 죄를 대신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온다고 선지자들이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상실감으로 진리를 놓친 제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 말 가운데 녹아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함께 걸으며 대화하다가 엠마오에 도착합니다. 수많은 보물과
같은 이야기 중에 다시 한번 우리의 시선이 머무르는 단어는 바로 29절의 강권(개역개정) 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시지 못하게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도 그렇게 헤어지고 싶어하시지는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28절입니다. 예수는 더 가려하는 것 같이 하시니... 아마도 주님은 이들이 나를 좀 잡아 주기를 바라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단 한번의 사양함도 없이 그렇게 하자고 하시며 그들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아마도. 상상해 보건데, 그들이
예수님을 그 순간 자기집으로 초대하지 않았다면 그날 밤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오늘 아주 멋진 길동무를 만났다네. 그 사람은 요즘 세상 소식에는 조금 어두웠지만 조상들의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정말 좋은 인품을 가지고 있었지. 그와 함께 걷는 길이 우리에게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그렇게 우리는 엠마오까지 왔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네. 함께 걷는
길이 즐거웠습니다. 잘 가시오. 좋은 여행 하시고, 기회가 되면 또 만납시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을 초대하지 않았다면. 우리 집에 들어오소서. 나와 함께 식사라도 하시고, 더 말씀해 주소서. 하고 강하게 초대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는 것도, 자기들
삶의 희망이 여전히 아니 더욱 크게 살아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유하소서. 예수님은 우리의 초대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세상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그 분 뜻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능력 있으신 분께서 여러분들 마음 문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초대를 기다리시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아멘.
신자인 우리들은 하나님을 만났던 경험을 나름의 방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합니다. 마치 슬픈 빛을 띠고 서로에게 지난 일을 말하고 있는 엠마오 길의 두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그 때에 어디선가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함께 발 맞춰 걸으시면서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직접 해주시는 말씀.
이것을 교회에서는 계시라고 부릅니다. 진리의 드러남이지요.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그냥 떠나지
마시고 우리와 함께 유하소서. 바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진리와 사랑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고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
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그의 사랑하는 딸과 아들인 인간들의 만남, 소통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한 예배는 서로 빵을 나누는 성스러운
만찬에까지 이어집니다.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나누는 자리. 그곳에서
신자들은 모든 삶의 에너지를 얻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아름다운 성찬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30절과 31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곳, 여전히 그 분이 우리의
산 소망임을, 어두운 두 눈 밝혀 알게 되는 곳, 그런 감격의
장소가 엠마오라면, 우리의 엠마오는 바로 이곳, 주님을 예배하는
이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 - 즉 자기를
드러내심과 그에 대한 인간들의 알아차림 곧 반응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엠마오의 식사는 곧 예배이고, 우리의 예배는 곧 엠마오의 하나님 체험입니다.
성찬 때에 빵을 떼어 주시듯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예배를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나누어 주십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말씀으로 함께 계시고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들으며 하나님의 현존.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내
앞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영적 시야를 확보한 제자들은 세상에 대해서도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됩니다. 비천해 보이는 자신들의 상황이 희망차게 느껴집니다. 낮은 자가 높아지고
버림받은 돌이 모퉁이 돌이 되는 대 반전과 전환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 십자가 앞에 나왔지만 예배를 마치고 십자가를 등지고 나갈 때에는 샘솟는 듯한
삶의 에너지를 소유하는 것이 바로 성례전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연합할 때에 당연히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한 구절의 말씀만 더 생각해 보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33절 전반부입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엠마오 길에서 시작된 예배는 황홀한 성만찬의 자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행복하게 살았다. 라는 글로 성경은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보내집니다. 예루살렘에
아직 위험한 도시입니다. 예수 처형 후 제자들은 자기네 운명이 어찌 될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이제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보다
힘찬 사랑이 그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파송입니다.
엠마오길의 예배 안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신 여러분. 아니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밝아진 눈으로 발견하신 여러분. 이제 여러분 삶의 자리로 당당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살아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에서 여러분들을 도우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다시 거슬로 돌아가는 여러분의 엠마오 길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