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y of Ruth 2/3, "세상을 거스르는 공동체" (룻기 1장 15절-18절, 2장 1절-3절) - 2015년 2월 8일

함께 예배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룻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두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주일에 룻기의 배경이 되는 사사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왕이 없는 시대,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자신의 욕망대로, 그리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은 , 그분의 다스림을 받지 않은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하나님의 제사장을, 자기 가족에게 복을 주는 사적 제사장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무너졌지요. 나그네에 대한 환대 규율, 결혼의 신성한 규율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말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나라가 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전쟁을 만회하고자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대량 학살이 일어나고, 살인과 납치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정의와 사랑은 없고, 약탈과 폭력만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시기를 사사기 기자는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읽는 룻의 이야기는, 어떤 현명한 여자의 바람직한 러브스토리가 아니닙니다. 살인과 착취, 전쟁과 학살이 난무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꺼이 받는 사람들, 없던 시대에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시금 가정과, 종교 그리고 민족을 회복시키시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어둠 속에서 시작합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법과 정의가 사라진 시기, 어떠한 개인과 가정도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없었습니다. 유대 베들레헴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엘리멜렉.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은 그들이 사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말뿐인 신앙, 이름 뿐인 고백이 그들의 현실입니다. 그의 아내는 나오미였고, 그의 아들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나오미는 기쁨을 말하고요, 말론은 허약함, 기룐은 병듬 혹은 낭비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왕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 그렇게 살지 않는 시대 가운데, 나오미 - 기쁨을 맞아 들이려 하는 이들에게 결국 남게 되는 것은 허약함이고, 병듬이고 낭비되는 삶뿐입니다. 그들이 사는 땅에 흉년이 듭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압지방으로 이주합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이곳에 가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땅이고, 여전히 정복전쟁이 한창인 때에 안정된 삶이 보장되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살아야 하기에 어쩔 없는 선택을 하지요. 그곳에서, 3절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레멜렉은 죽고, 나오미와 그의 아들이 남았다.” 그들이 아내를 맞이하는데, 말론은 오르바를, 나오미는 룻을 맞아 들입니다. 그런데 5절엔 이렇게 말합니다. “말론과 기룐. 사람이 죽고, 여인은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우리가 읽고 있는 룻기는 처절한 상실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림의 경험 통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됩니다. 사실, 산다는 것은 잃어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상실은 부정할 없는 인간 보편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이들에게 상실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는 망원경입니다. 어떤 이들에게 실망과 상실은 낙심하고 포기하게되는 이유이지만, 결코 빼앗길 없는 희망,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믿는 자들에게, 상실의 경험은 엄청난 영적 훈련의 도구이고, 어쩌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도 있습니다. 상실을 통해, 아픈 경험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채우심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와 그리고 오르바가 크나 상실을 경험할 때에, 그들은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이 다시 살기 좋아졌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남편 잃은 땅에서 사는 일은 마음 아프고 어려운 일입니다. 폭력의 시대 속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음을 말하지요. 그러니 돌아와야 합니다. 그곳을 떠나며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말합니다. 8절입니다. 너희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내려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자 며느리는 말합니다. 아닙니다. 어머니와 같이 가겠습니다. 11절에 두번째로 말합니다. 그래도 가라. 당시 이스라엘의 법은, 형이 죽으면 남동생이 형의 아내를 다시 아내로 맞아 들입니다. 이는 여전히 남편 없이 사는 여성의 삶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지금 애를 낳아도 애가 커서 너희 둘을 책임질려면 엄청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까, 돌아가라. 여인은 한껏 소리 높여 되에, 14절에 보면,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추고 떠납니다. 15절에, 이제 세번째로 나오미가 룻에게 이야기 합니다. 봐라, 동서도 돌아가지 않았느냐. 그러니 돌아가라. 그러자 룻이 입을 열어 말합니다. “나에게 떠나라고 말하지 마시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모무시는 곳에 내가 머물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말이 모압 출신의 이라는 여인을, 위대한 신앙의 어머니 . 룻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고백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4 입니다. 그들은 모압 여자였더라. 이방인입니다. 모압은요, 이스라엘 민족과 다투던 사람들입니다. 이사야는 모압을 하나님의 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룻은 모압 사람이예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구약 시대의 분위기를 생각해보자면, 심지어 여자입니다. 이방 여자. 구약성서에서 그렇게 자주 이야기되지 않는 사람들이예요.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쳤던 사람들, 그리고 사람 수를 때도 여자와 아이들은 세지 않던 사람들. 그들의 가장 위대한 경전 속에 룻이란 이름은 일곱번째 책의 제목이 됩니다. 룻의 혈통을 따라, 다음 주에 살펴 보겠지만, 다윗왕이 탄생하고요 결국 계보 속에서 예수님이 땅에 오시게 되요.
어떤 고백을 통해서 입니까?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것입니다라는 말을 통해서 입니다. 룻의 위대함은, 절망의 가운데에서. 남편이 죽고, 시아버지가 죽고, 여전히 자신의 삶의 안정을 위협하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도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안위를 위해 무엇이든 있었던 시대를 거슬러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신앙으로부터 돌봄 실천하지요. 룻도 과부거든요. 아마 룻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녀를 부를 , 어린 여자라고 표현하니까요. 젊은 여자는 자기도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자기도 상실을 경험하였지만, 남편도 잃고, 자녀까지 잃은. 그래서 사람들에게 1 20절의 이야기인데요, 나를 기쁨이라 부리지 말고, 마라괴로움 - 이라 불러다오 부탁하는 시어머니를 버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이 도착했을 룻이 일이 무엇인 아세요? 시어머니 나오미는 집에 있게 하고요, 자기가 나가서 곡식 거두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뒤를 쫓으며 이삭을 줍습니다. 다시 한번이요. 사람이 굶어 죽기도 하던 그런 시기입니다. 사회적인 안전망이, 오늘날과 같던 시기가 아닙니다. 자기 혼자 먹고 살기도 쉽지 않았지만, 룻은 자기보다 더한 어려움에 처한 나오미를 버릴 없었던 겁니다. 떠난 오르바의 입장도 이해가 되긴 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오르바가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았는지, 하나님이 오르바의 삶을 어떻게 이용하셨는지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룻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룻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어쩌면 사사기와 같은 폭력의 바다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이들이 없는 시대, 하늘 무서운 모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마치 섬처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지켜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고, 그를 위해 나의 삶을 결정하는 사람들. 바로 룻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대를 거스르는 사람들의 모임. 우리가 꿈꾸는 교회입니다.

말씀 한절만 볼까요? 2 3절인데요. 말씀드렸듯이, 룻이 나오미를 집에 두고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갑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레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제게 가장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단어는 바로 우연히입니다. , 나오미, 그리고 다음 시간에 자세히 살펴보게 보아스. 사람이 룻기의 등장 인물이거든요. 그런데, 룻기는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이야기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고려해야 합니다. 폭력의 시대, 왕이 없는 시대에, 보살핌과 사랑을 결단한 사람은 유력한 보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눈에는 우연으로 보이는 일입니다. 정말 우연이었을까요?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바로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말입니다. 왕의 뜻을 삶으로 실현한 자들의 삶을 하나님은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왕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우연인 , 하지만 놀랍도록 치밀하게 하나님은 공동체를 다스리십니다.

사랑을 결단함으로 어둠 속에 희망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옳고 좋은 선택을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왕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랑의 선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