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설교 : 인터스텔라를 가르는 눈물 (요한복음 11장 1절, 32절 - 44절) – 2015년 1월 25일

함께 예배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오늘은 영화와 함께 하나님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가끔 영화 설교를 준비할 생각인데, 설교에서 영화를 이용하는 이유는 단지 하나, 말씀을 보다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명한 슬램덩크의 대사처럼 영화는 단지 거들뿐입니다. 우리 교회의 영화 설교는 최근에 화제를 일으킨 인터스텔라입니다. 우주, 종말 그리고 우리의 생존은 과학과 영화의 주된 재료이면서 동시에 우리 신앙의 중요한 요소이지요. 접근 방법은 많이 다르지만 말입니다. 속회 모임 중에 인터스텔라 라는 영화를 소개 받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영화는 공상 과학 영화라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과 사랑을 다룬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으로부터 가져온 영감을 아주 많이 담고 있었습니다. 영화 장면을 보기 전에 성경 말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 그러니까 천년 정도 전에, 지구 반대편에 세명의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자 둘과 남자. 이들의 부모에 대해서는 성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부모가 있었는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없습니다. 남매 중에 막내 동생은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깨뜨린 사람입니다. 교회 전통은 그녀가 창녀였다고 말해 왔지만,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자가 창녀였는지 아닌지도 우리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속되는 이들의 삶은 암울한 그림자로 덮여 있습니다. 바로, 그들 중에 오빠가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죽는다지만, 자신과 관련된 죽음은 언제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고,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것이 인간 모두의 실존입니다. 장면 기억 나세요? (장면 1, Mann 박사가 쿠퍼를 죽이려 하는 장면) 이게 무슨 장면이냐하면, 멸망해가는 지구를 구하려고 다른 행성을 찾아 사람들을 보내는데, 거기서 Mann박사는 지구로 신호를 보내고 기다린 거예요. 사실은 가능성이 없는 행성이지만 살고 싶어서, 신호를 보내고, 다시 자기만 살려고 사람들을 배신을 하는 것이지요. 이게 인간입니다. 죽음 앞에 있는 인간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언제나 그것은 두려운 것이고 이기기 힘든 것입니다. 사실, 영화, 아니 대부분의 헐리우드 영화가 죽음 앞에 인류 공동체 속에서 자기만 살아 것인가? 아니면 희생적인 모험을 통해 모두 살아날 것인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박사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장면 볼까요? 신호를 보내고 동면에 들었던 박사를 찾아가는 장면이예요. (장면 2) 오랜 기다림 끝에 처음 만나지요. 이들이 진행했던 인류 구원 프로젝트의 이름은 Lazarus Project 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는 죽습니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단절 또는 격리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으로 생의 모든 관계가 끝나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죽음을 넘어서는 믿음입니다. 나사로는 죽지만,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그런데 그가 살아났다고 인간이 갖는 죽음의 문제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결국 죽습니다. 그러니 그가 살아난 기적에 우리 생각이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이야기가 말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가 그의 친구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이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셨다는 것이고, 불쌍히 여기심과 함께 아파하심을 통해, 무덤의 문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은 동굴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에는 돌을 막아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도 그러했지요. 돌문은 건널 없는 강을 상징합니다. 삶과 죽음. 개의 완전히 다른 차원. 말하자면 돌문 안쪽 세계와 바깥 세계의 거리는 인터스텔라 - 별과 별의 거리 - 보다 멀지요. 돌문 바깥에 사는 사람들은 돌문 안의 공간과 시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39절입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우리 시간의 개념으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차원의 존재이십니다. 그는 죽음 넘어에 있는, 음부의 권세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무덤을 가로질러 소리로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사로야

저는 오늘 본문에서 35절이 좋습니다. 예수님이 우십니다. 예수님이 신약 성서에는 두번 우세요. 예루살렘을 보면서 평화를 알지하시며, 안타까움에 우시는데, 여기서는 슬픔 때문에 우십니다. 어떤 주석은 부활에 대해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답답해서 우신다고 하시는데,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은 답답했거든, 그런데 여기서만 우세요. 우리의 상실에, 우리의 아픔에 그리고 죽음 앞에 우리의 실존에 온전히 동참하시는 그분의 눈물을 봅니다. 그리고 눈물이 그를 소리치게 합니다. “ 돌을 치워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리라, 인터스텔라와도 같은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 가운데 틈을 내어라 왜요? 사랑하시니까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힘을 보여주사, 결국에는 모두가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으리라는 희망을 보여주시려고 그리 하십니다. 일은 예수님의 부활에 예고편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기도할 이렇게 기도하세요. 말을 항상 들으시지만, 이제는 힘과 사랑을 보여주소서그리고 말씀하시지요. 나사로야 나오너라예수님의 나사렛 프로젝트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사랑이 인터스텔라의 거리, 차원의 다름을 극복합니다. 사랑이 우리를 만나게 합니다. 영화 속에서 브랜든 박사는 이야기를 아주 직접적으로 합니다. (장면3, 쿠퍼와 브랜든의 대화, 증명할 없는 사랑에 대한)

어쩌면 우리는 세상의 신비를 너무 오랫동안 머리로만 생각하려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랑이 우리를 만나게 합니다. 나사로의 이야기우리 때문에 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인터스텔라의 차이와 거리를 극복하게 합니다. 사랑이 다리가 됩니다.

사실, 영화 속에는 많은 인터스텔라가 등장합니다. 별과 , 은하와 은하의 거리, 브랜든 박사 모녀의 거리, 쿠퍼와 머피의 거리 생각들을 우리 현실로 가져와 볼까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터스텔라를 살아갑니까영화의 딸과 아버지는 물리적으로 광년 떨어져 시간을 보내지만, 그리고 다른 시간을 살아가지만 결국 책장 하나를 두고 만나지 못한 살아갑니다. 어쩌면 영화는 딸과 아버지, 우리와 우리 부모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어요. 아니 조금 넓혀보자면 우리와 타인의 관계가 바로 인터스텔라입니다. 사실은 우린 모두 다른 시간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난 겨울이 짧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길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고통스럽고, 어떤 이에게는 행복하고타인의 거리는 언제나 억만광년입니다. 그런데 인터스텔라를 관통하는 길은 사랑, 눈물 밖에 없어요.
인간 관계 안에서 항상 인터스텔라가 있다면, 보다 훨씬 차이와 다른 차원은 바로 우리와 하나님의 다름 입니다. 우주를 이해할 있어요? 그걸 누가 만들었는지, 그게 이런 모양인지 이해할 있습니까? 과학이 무용하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때론 과학이 알려 주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있습니다. 연세대학에서 천문우주학을 가르치는 이영욱 교수는 현대우주과학과 창조섭리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지동설을 주장하던 갈릴레오의 시대처럼 현대 과학의 발견들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들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뱅의 순간은 관측이 불가능하고, 거기에는 어떤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힘이 개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광활함 가운데 우리가 존재한다는 , 그리고, 작은 존재가 우주를, 세상을 꿈꾼다는 것이 바로 기적 아니냐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의 별과 드넓은 바다를 보니까 이것들을 지으신 이의 위대함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뭐길래 그런 존재가 나를 사랑하십니까...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차원과 우리의 차원. 엄청난 차이가 우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차이가 크면 클수록, 인터스텔라가 멀면 멀수록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은 위대해 집니다. 죽음의 공포가 크면 클수록, 마리아와 마르다의 눈물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한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죽음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극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과감한 고백을 있는 것입니다.


언약 이라는 말이 구약 성서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가 끝난 후에도 그의 사랑하는 모든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말로 약속.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그분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되었습니다. 언약의 히브리어가 무엇인 아세요? 베레 입니다. 단어와 영어 단어 between 어원을 함께 합니다. 사이가, 차이가, 거리가 언약을 가능합니다. 우리를 사랑하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인터스텔라가 있습니다. 사랑함으로 소통할 있고요, 그렇게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나사로 프로젝트를 통해 사랑을, 인터스텔라를 가로지를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사이를 책으로 매꾼 것은 의도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바로 아름다운 , 성경을 사이에 두고 있지요. 사랑의 편지 덕에 우리는 무한한, 다른 차원의 하나님과 소통할 있고, 전혀 다른 차원의 당신과 삶을 나누어 가질 있고, 우주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있습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영생을 허락하시는 언약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