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9:1" - 누가복음 17장 11절 - 19절 (2014년 12월 28일)

  함께 예배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오늘은 2014 마지막 주일 예배 입니다. 지난 360여일, 52주간을 살아 오시느라 쓰셨습니다. 살아 있다는 . 한해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만,  이곳에서 지금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스럽고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없습니다.
  해를 보내는 마지막 주일, 함께 읽은 하나님 말씀은 누가복음의 고침 받은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누가복음의 후반부는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을의 안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그의 제자들과 지나고 계십니다. 그리고 곳에서 나병에 걸린 열명의 사람들을 만나시지요. 오늘의 본문은 크게 이야기. 나병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시는 이야기, 그리고 중에 명만 돌아온 것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이렇게 두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해를 보내며 치유와 감사의 이야기를 함께 읽는 것은, 지난 시간 동안 우리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늘의 만지심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파할 때마다 아픔에 동참하여 주셨고, 시간의 신비와 보내신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달래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각자의 치료된 상처를 품고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치료된 상처는 은혜의 도구입니다. 상처를 통해 겸손을 배우고, 은혜를 고백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있고, 앞날의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있습니다. 치료된 상처를 만져 봄으로 말입니다. 반면,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 아픔은 종종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칼이 되고 모서리가 됩니다.
   생명과 평화의 사람이 되는 것은 치유의 경험을 가진 사람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만지심, 그분의 고치심을 경험한 사람이 세상에서 생명과 평화를 누리며 전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눈먼 거지 바디메오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주님의 고치심을 경험한 바디메오는 길에서 예수를 따라 나셨습니다. 우리를 고쳐주신 경험들을 기억하며 본문을 살펴 봅시다.
   성경은 그들이 지역의 경계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 줍니다. 사람들은, 특히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그런 고을의 경계에는 살지 않았습니다. 성이 있고, 그곳에서 자기를 지켜줄 있는 여러 장치들 속에 살지 경계에는 살지 않았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은 바로 그들이 버려진 사람들, outcast 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한편으로는 천형병에 걸렸다고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이들이 측은하긴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모두 이렇게 경계선을 살아가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이곳 미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경계인입니다. 나이에 대해서는 어때요? 저는 20대와 40대의 경계에 있습니다. 지금은 조금 불안하지만 때가 되면 많은 것이 안정되어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지요.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때가 되도 다른 불안과 전이를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 세대, 이웃 그리고 모든 삶의 여건이 사실은 잠정적인 것이고, 우리는 사이-경계의 사람들이라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의 측면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되 땅을 살아가는, 땅의 사람이되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가지 세상의 경계인입니다. 언제나 영원한 것을 그리워하는 근본적인 향수를 가지고 있지요.
   교회는 그런 경계인들의 모여든 공동체 입니다. 성경의 나병 환자들도 10명이 함께 모여 살았습니다. 여기엔 몸이 건강했다면 함께 하지 않았을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이 섞여 있었거든요. 이들의 아픔이 서로의 차이를 무시하게 하였고, 이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ㅅ로 위로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경계를 사는 사람이다 라는 공동의 정체성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되어 있는 것입니다. 경계의 삶은 어쩌면, 서로 다른 우리를 함께 여행하게 하고, 근원적인 고향 -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고 내일을 희망하게 하는 다른 모양의 축복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병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문둥병은 전염병입니다.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사람들이 곁에 그들은 나는 부정합니다. 라는 말을 반복해서 자기가 천형병에 걸린 사람임을 말해 주어야 했습니다. 가족에게도 가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그들이 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 높여 주님을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십니다.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각성이 없는 병이기에 병이 발견되었을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님 앞에서 너무 늦은 병은 없었습니다. 때론 우리 삶의 문제도 자각 증상 없이 어느 틈에 우리 삶을 제압헤 버리지만, 주님 앞에 너무 늦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디오에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오늘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주님 만나기에도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죄를 인식하였다면 소리 질러 외쳐야 합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아픈 사람들의 목소리를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유대 법으로 병을 깨끗하다 판정하는 사람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에게 자기 몸을 보인다는 것은 그들이 육체적 병으로부터 치유된다는 것과 함께 사외적인 소외와 추방으로부터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보고싶은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러 고향 땅으로 돌아갈 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던 모두의 몸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아시는 것처럼, 성경은 그들 한명만 돌아와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말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아홉 명은 어디에 있는지 물어 보십니다.
나머지 아홉명은 어디 있을까요? 어쩌면 예수님을 잊고 건강한 몸으로 떠나갔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말씀대로 지금 열심히 제사장에가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게 한시라도 빨리 인정받아야 제대로된 삶을 영위할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무엇이 먼저인지 그들과 달리 생각했습니다. 제사장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자기를 낫게 분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족을 만나는 것도, 지난했던 지난 날을 훌훌 털어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가 병을 치유했다면, 먼저 그를 다시 만나 그를 아는 . 그가 일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동안 어떤 치유와 어떤 만지심을 경험하였습니까? 어떤 은혜의 선물들이 하늘로부터 허락되었습니까? 그것을 누리고, 증언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쳐주신 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며 사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누가 일을 가능하게 하였는지 돌아와 기억하는 , 감사를 드리는 ,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일을 하신 분께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있을 것입니다. 그의 선물보다는 그가 우선입니다.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9:1 싸움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일이 없도록, 우리가 이 어려운 확률을 뚫고 그 분께 먼저 달려 갑시다. 고쳐주신 분을 먼저 생각하는 . 한해를 마무리하는, 우리 삶의 방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