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예배드리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좋은 사순절 보내고 계시지요? 주님의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앞 으로 6주 동안 복음서에 나와있는 예수님 이야기, 특별히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는 “장소” 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주로 어디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그러니까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경험하시나요? 교회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습니다. 강의실이나 차 안, 혹은 예전에 갔던 어느 곳을 떠올리시는 분도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아니 계신 곳 없는” 하나님.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기에만 특별히 있다 뭐 이런 건 잘못된 생각이지요. 세상이 전부 하나님의 것이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을 잘 만나게 되는 공간이 있습니다. 산이 될 수도 있고, 기도의 골방이 될 수도 있지요. 왜 그런걸까요?
거기 하나님이 더 많이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그곳에서 하나님께 더 잘 열리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복음서의 예수님도 그러하십니다. 안 가시는 곳 없이 제자들과 늘 동행하셨지요. 그런데, 특별히 그들이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과 능력, 그리고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더 잘 알게 된 곳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6주 동안 살펴 보겠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무덤가에서 만나고, 잔치집에서 만나서 어떤 공원에서 만나는가하면 오늘은 배 위에서 만나게 됩니다. 늘 함께 있는 예수님이지만, 그리고 늘 지나다니던 장소이고, 늘 타고 있었던 배 지만 그곳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람이 있다면 사순절의 기간동안,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장소를 살펴 보면서, 여러분의 삶터가 곧 거룩한 곳 임을 발견하게 되기 바랍니다. 지금 그 곳에 충만히 임하신, 아니 언제나 충만히 임하여 계신 그 하나님을 더 깊이, 더 온전히 그리고 더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날도 무척이나 바쁜 날이었습니다. 4장 1절에 보면 에수께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배에 오르셨고, 낮에는 주로 해풍이 부니까 바닷가 (사실은 호수가입니다) 에 사람들을 앉게 하고, 가까이에 배를 띄워 그 위에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아주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로 농사 짖는 일에 비유해서 하늘 나라를 설명하셨는데, 가장 긴 가르침은 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린다 씨가 길가에도 떨어지고, 돌이 많은 자갈 밭에 떨어지고 또 흙이 깊지 않은 곳에 떨어지거나, 매우 비옥한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가 쪼아 먹고, 자갈밭의 씨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타 버린다. 가시 밭에 떨어진 씨도 덤불이 자라는 것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30,60,100 배의 열매를 맺는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듣고 흘리지 말아라,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믿어 열매를 맺고 살라는 말씀이지요. 말씀이 자라게 하여라.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는 계속 씨에 대한 비유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씨를 뿌리는 일과 같아서 자라나야 한다, 겨자씨와 같은 것이니 작게 시작하지만 공중의 새들에게 쉼터를 제공할 만큼 커진다. …”
그리고는 저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저쪽으로 가자”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갑니다. 동서 11, 남북이 21km 정도 되는 큰 호수입니다. 5장에 보면 결국 배는 호수의 건너편인 거라사 지역에 이르고 거기서 중요한 일이 일어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가자 그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배가 호수에 나가자 갑작스러운 광풍이 불어 옵니다. 성경은 배에 물이 덮쳐들어와서 가득찼다고 말해 줍니다.
갈릴리 북쪽은 헬몬산이 있습니다. 찬 물이 내려오지요. 이스라엘은 아열대성 기후로 더운 바람이 불어온답니다. 그 둘이 만나서 종종 광풍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 중 많은 사람들이 어부입니다. 베드로는 선주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배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요.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이 짧은 보도.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벌써 가득찼다’ 이 말이 오늘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가 되게 합니다.
왜 이 위기가 닥쳐왔는지 모릅니다. 성경의 보도에 충실하자면 그날 제자들은 뭐 크게 잘못한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자고 그래서 가는 겁니다. 왠만한 어려움 정도는 핸들할 수 있습니다. 평생 배를 탔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배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위기는 바로 이곳에서 찾아옵니다. 그러기에 더 절망스럽습니다.
우리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무너질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두려움에 빠집니다. 본문에서 광풍이라는 말은 “라일립스 메갈레” 메갈레는 mega 라는 어원을 갖습니다. 한자로는 미친 바람입니다 삶에 “메가” 의 어려움이, 미친 바람이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아주 잘 할 수 있는 곳에서, 아니면 내가 아주 익숙한 곳에서 그런 바람을 맞이 합니다. 배에 물이 다 차서 곧 가라앉을 것 같은 느낌 말입니다.
공부하는 일도 그렇고, 일하는 일도, 가정생활도, 장사도 다 그런 것 이지요. 사실은 내가 잘 안다고 하지만, 내 나와바리라고 하지만, 내가 이 일만큼은 이제 익숙해 졌고, 또 나에게 그런 달란트를 주셨고 그렇다고 느끼지만, 사실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은 큰 바다의 배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인간을 너무 나약한 존재로 생각하시는 것 아니냐고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철학가들이 우리 인생을 지나간 곳에 자욱 하나 남기지 못하는 배 한척으로 묘사해 왔습니까? 세상에는 고난이 있고 우리 힘으로는 그것을 이겨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린이 시간에 봤듯이 아무리 균형감각이 좋아도 서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곳에서, 나의 경험과 나의 예상과 나의 능력이 다 소진했을 때,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주님의 모습은 참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모든 일을 같이 하셨거든요. 함께 걸으시고, 식사 하시고 같이 사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의 잠버릇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주무시는 장면은, “인자는 누울 자리도 없다…” 정도만 나오지 예수님이 주무시는 이야기를 여기에만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죽을 지경인데, 저 배 끝을 보니까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십니다. 멀미를 하셨을까요? 아니면 하루 종일 강의가 피곤해서 그러시는 걸까요? 제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안할 겁니까?
두려움에 압도되면 마음이 날카로워집니다. 원망할 일을 찾게 되고, 잘 주무시는 모습에 화가 났을 법 합니다. 작게 말했겠습니까? 생사의 기로에서, 폭풍우를 맞으며 하는 그들의 말에는 절망과 원망이 당연히 섞이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험한 말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야기의 끝을 볼까요? 금방 배는 잠잠해 집니다. 예수님이 물으시지요. 왜 무서워했냐, 왜 믿음이 없냐.
예수님은, 너 아까 뭐라 그랬냐? 이렇게 묻지 않으십니다. 욕했냐? 그러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이 안타까워하신 이유는 그들이 두려워했다는 것. 그리고 믿음이 없었다는 것. 어떤 믿음입니까?
제자들은 광풍에 눈을 빼았겼습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잃었습니다. 경험이 있다 보니까, 조금 할 수 있다 생각하니까 자기 힘으로 이겨내려다가 결국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자신감이 무너지자 두려움이 배 위를 가득채웠습니다.
그제야 예수님을 보게 된 거예요. 배 끝쪽, 고물에서 베개까지 베고 편하게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지요. 그들이 예수를 부르지 않았다면, 더 오랜 시간 흔들리는 배 위에서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원망이 섞인 말투라도, 뭐하고 있냐고, 나를 좀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두려움을 계속 되었을 것입니다.
주무시고 계셨어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44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니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이런 풍랑이 없었으면 좋았겠지요. 그런데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건 아니건,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들로 우리는 고통의 바다를 운행합니다. 배는 흔들리지요. 왜 이런 일이 있나… 망했다 라고 생각이 들 때쯤, 고물에 누워계신 주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깨워 주기를 기다리시는 주님. 고난과 풍랑의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지금도 주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의 돌아섬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파도에 시선을 빼앗겨 불안해 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 그분은, 하나님께 돌아와라. 두려워할 것은 출렁이는 바다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우리의 마음이다… 말씀하십니다.
원망이어도 좋습니다. 그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무슨 일이냐, 몇 시냐 하시지 않고, 바람을 꾸짓으십니다.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 그 불안과 고난의 바다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수 없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 나라) 은 씨앗 갖지만, 곧 열매를 맺을 것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반드시 삶의 열매를 맺는다. 귀가 있으면 들어라…
바로 그날 밤, 그들은 좋은 실습의 기회를 얻었습니다.여러분에게도 실습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배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흔들림을 경험할 때, 내 마음 깊숙히, 배의 고물에 살아 있는 평화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원망이 되던, 조용한 부탁이 되든, 주님 내 마음의 바람을 잠재워 주소서. 하는 우리의 기도가 울려 퍼지길 원합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it is well with my soul 미국인들도 사랑하는 찬양이지요. Horatio Spafford. 시카고 대학 법리학 교수였어요. 잘 나가던 그는 1873년 시카고 대 화재로 집도 잃고 건강도 잃습니다. 의사의 권유로 온 가족이 유럽으로 요양하러 가지요. 그런데, 그가 섬기던 무디 재단에서 화재 복구 과정에서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서 자신은 일정을 며칠 미루고, 아내와 아이들을 먼저 보냅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탄 배가 영국 선적 로키안과 부딪혀서 아이들이 모두 죽어요. 아내가 친 전보는 “saved alone” 스패포드는 급히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탑니다. 고통과 번민 속에서, 배가 그 사고 지점을 지날 때, 알 수 없는 평화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적습니다.
사고는 일어난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작은 배에 타고 있고, 세상 바다는 언제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을 줄지 모릅니다. 그 마음의 풍랑 속에서 스패포드는 고물에 계신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하지요.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던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it is well with my soul it is well with my
soul”
이 노래가 절망에서 그를 구해냅니다. 결국 스패포드는 예루살렘의 한 수도원에 가서 수도사로 살면서, 전쟁가운데 부상당한 사람을 종교와 국적에 상관없이 돕는 일에 헌신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올 때, 그 배위에서 주님을 만나기 바랍니다.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그가 우리의 풍랑을 잠잠케 하실 것입니다.